마침내 스티븐 소머즈 감독의 '지.아이.조 - 전쟁의 서막 (G.I. Joe: The Rise Of Cobra, 2009)'이 할리우드보다 한발 빨리 한국에서 공개됐습니다. 시차를 감안하면 약 사흘 빠른 셈이죠. 이병헌이 연기하는 스톰 섀도우를 마침내 봤습니다.
지난번 포스팅에서도 이병헌의 할리우드 진출을 앞두고 "배역이 스톰 섀도우라는 걸 알고 마음이 놓였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역시 좋은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나치게 악당으로 묘사된 부분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 이어 2연타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근래 한국인 배우가 할리우드에서 맡은 역할 가운데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을 거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을 듯 합니다.
'지.아이.조'는 대체 어떤 영화고 이병헌은 어떤 역이었을까요? 그리고 왜 이병헌의 선택이 좋았다고 하는 걸까요?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세계적인 무기제조업체인 MARS사의 대표 맥컬렌(크리스토퍼 에클레스턴)은 NATO의 투자를 유치해 수술이나 의료 목적에 사용되던 미세 로봇 나노마이트를 무기로 개발하는 데 성공합니다. 이 나노마이트가 장착된 탄두를 이송하던 듀크(채닝 테이텀)는 정체불명의 괴한들로부터 습격을 받는데, 습격자 중 하나가 자신의 애인이었던 애나(시에나 밀러)라는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습니다. 괴한들이 탄두를 차지하기 직전, 역시 정체불명의 특공대가 나타나 괴한들을 쫓고 탄두를 되찾습니다.
이들의 정체는 초국가적인 정의의(?) 특전부대 G.I.조. 이들의 리더인 호크 장군(데니스 퀘이드)은 탄두 탈취 시도의 배후에 맥컬렌이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합니다(영화의 진행으로 보아 그건 의심할 바가 없죠^^). 그리고 맥컬렌은 최강의 닌자 스톰 섀도우(이병헌)를 동원해 탄두를 다시 빼앗을 계획을 세웁니다....
물론 이 정도는 이 다음에 진행될 사건들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이번 '전쟁의 서막' 편은 앞으로 주구장창 나올 '지.아이.조' 시리즈의 맛뵈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서 터지는 사건들은 글자 그대로 잠시도 관객을 쉬게 두지 않습니다. 수많은 사건들과 전투 장면을 보여주면서 결코 적지 않은 등장인물들의 캐릭터를 모두 설명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죠.
비슷한 경우였던 'X맨' 1편의 궤적을 그대로 따라간다는 느낌도 있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X멘' 1편에서 브라이언 싱어가 시도했던 철학적인 고민의 흔적은 싹 사라지고 없다는 점입니다. 'X멘' 시리즈를 지배하고 있는 '선택된 민족', 혹은 인종 차별과 인종 청소에 대한 은유 같은 것은 '지.아이.조'에는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자리를 차지한 것은 쉴새 없이 뛰고 달리고, 그러면서도 연애질도 하고, 할말 다 하는 만화적인 주인공들과 엄청난 돈이 투입되어 구현한 만화적 비주얼입니다. 네. '지.아이.조'는 그야말로 '대놓고 활극'인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보는 동안 대뇌는 쉬고 있어도 됩니다. 무릎 반사가 가능할 정도만 살아 있다면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영화입니다.
물론 정신을 바짝 차리고 보면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진행의 연속이지만, 이 영화의 강점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니 설사 영화가 마음에 들지 않는 관객이라 하더라도, '두 시간 본 값은 충분히 했다'는 느낌을 갖게 될 겁니다. 굳이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겠지만, G.I.JOE라는 완구-만화-애니메이션의 3종 시리즈가 갖고 있는 위력을 생각하면 쏟아 부은 제작비가 아깝지는 않을 겁니다.
이병헌이 연기한 스톰 섀도우는 그 다양한 인물들 가운데서도 꽤 인기있는 캐릭터입니다. 흥미롭게도 이 캐릭터는 시리즈에 따라 어디서는 G.I.조의 편에서, 다른 쪽에서는 G.I.조의 상대편인 코브라 조직의 일원으로 등장한다고 합니다. 아무튼 본래 일본인 캐릭터(이름은 토미 아라시카게)이고, 최고의 기술을 가진 닌자이며, G.I조의 핵심 멤버인 스네이크 아이즈와는 어려서부터 동문수학한 형제 같은 사이라는 설정입니다. 이번 영화에서는 스네이크 아이즈와 '어찌 보면' 철천지 원수의 관계라는 점이 강조됐는데, 앞으로는 변화의 여지가 있을 겁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이 '앞으로는'이라는 말에 의문을 제기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천하의 스톰 섀도우가 이렇게 한번 나오고 말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습니다.)
그동안 한국의 수많은 배우들이 아시아의 영역에 만족하지 않고 세계 진출을 향해 발을 내딛었습니다. 사실 남자 배우들보다는 여배우들의 경쟁력이 더 뛰어났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남자 배우들이 맡을 수 있는 캐릭터는 21세기가 된 지금까지도 무술의 달인이나 '무표정한 동양인 암살자' 캐릭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게 사실입니다.
어찌 보면 이병헌이 맡은 스톰 섀도우도 그런 역할의 범주 안에 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신 분이라면, 이 영화 안에서 이병헌이 차지하는 비중이 지금까지 할리우드 영화에서 한국 배우가 맡았던 어떤 역할보다 비중이 크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물론 '블러드'를 할리우드 영화로 친다면 전지현의 비중이 훨씬 크겠지만, 그 영화와 '지.아이.조'를 비교하는 건 2차대전때의 제로센 전투기와 F-22를 비교하는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정도 규모의 영화에서 이 정도 비중의 캐릭터를 맡는다는 건 결코 그냥 무시할 일이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이 역할이 이병헌에게 들어온 것은 행운이지만 이 역할에 전념해서 따낸 것은 이병헌의 탁월한 선택이라고 칭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병헌은 이 작품을 통해 '영어로 연기가 되는 배우'라는 점을 인식시켰습니다. 이번에 함께 일한 스티븐 소머즈가 아닌 다른 감독이나 제작사도 동양인 역할이 있는 영화를 만들 때 염두에 둘 수 있는 배우의 선에 오른 셈이죠. 배우를 설명할 때 "그 왜, '블러드'라는 영화 있었잖아. 그 영화에서...."라고 설명하는 것과 "'G.I조'에서 스톰 섀도우 역으로 나왔던 배우"라고 설명하는 것은 천지 차이죠. 아무튼 이병헌이 앞으로 할리우드에서 어떤 족적을 남길 지, 매우 기대됩니다.
'지.아이.조-전쟁의 서막'은 똑부러지게 누구라고 할만한 톱스타는 없지만, 알려진 배우들이 꽤 많이 나오는 영화입니다. 일단 설정상 주인공인 채닝 테이텀은 앞날이 크게 기대되는 스타는 아니라는 느낌입니다. 이 배우는 '스텝업' 시리즈를 통해 인기 스타가 됐습니다.
전형적인 미남형 주인공이라기보단 '유주얼 서스펙트'의 가브리엘 번의 젊은 날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혹시 10년 뒤에 살아남아 있다면, 주인공보다는 성격파 배우로 변신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시에나 밀러가 이병헌과 공연했다는 건 참 감동적인 일이기도 하고... 감독이 스티븐 소머즈이다 보니 '미이라' 군단인 브랜든 프레이저와 아놀드 보슬루(바로 '미이라' 역이죠) 등이 그리 큰 비중 없이 얼굴을 비치더군요.
마지막으로 얼굴과 대사가 한번도 공개되지 않은 스네이크 아이즈. 어떤 분은 이 배우의 이름이 레이 파크(Ray Park)라는 이유로 '혹시 또 하나의 한국계 배우가 있는게 아니냐'고 추론하기도 합니다만, 이 배우는 무술 전문 연기자로는 대단히 유명합니다.
바로 '스타워즈 - 에피소드 1'의 다스 몰 역을 맡았던 배우이기 때문입니다.
길게 보시는게 불편한 분을 위해서 결론을 내리자면, '지.아이.조 - 전쟁의 서막'은 결코 영화사에 남을 걸작이 아닙니다. 올해의 '수작'으로 꼽기도 좀 모자랍니다. 하지만 시원시원하게 쏟아 붓는 물량을 생각하면 본전 생각이 나는 영화는 결코 아닙니다. 제가 생각하는 등급은 '볼만한 영화'입니다. 아, 물론 뵹헌사마의 팬들에게는 '놓치면 후회할 영화'인게 분명하죠.
p.s. 스톰 섀도우가 한국인(영화 중간에 나오는 회상 신에서 어린 시절의 스톰 섀도우가 "도둑놈이다!" 등 두 마디의 한국어 대사를 합니다^^)으로 바뀐 것은 이병헌의 영향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아역으로 나오는 태국계 배우에게 직접 한국어 지도까지 했다는군요.
노력이 가상합니다. 그런데 스톰 섀도우가 워낙 독한 악역으로 나오다 보니 바꾸지 말고 그냥 두는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