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열한 거리>의 잔영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영화를 본 것이 실수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전에 본 영화들이 좀 나빴어야 나중에 보는 영화가 득을 보기 마련인데, 왠지 <비열한 거리>에 비해 좋게 보기가 힘들 것 같다는 느낌이 초반부터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간 이식수술을 받아야 하는 어린 아들을 보살피는 하형사(박중훈)는 이미 무능하고 부패한 형사로 낙인이 찍혀 있는 인물입니다. 어느날 술집 주인에게 보호비를 뜯으러 간 사이 파트너가 괴물같은 킬러 철민(김준배)에게 살해당하자 하형사는 상부의 문책과 양심의 가책으로 괴로워합니다.
한때 잘 나가던 칼잡이였던 수현(천정명)은 손을 씻고 미래(유인영)와 함께 버스형 스낵코너를 운영하며 살아갑니다. 그런 그 앞에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 재필(최창민)이 나타나 누군가를 손봐 달라고 부탁합니다. 하지만 사소한 실수가 겹치며 수현은 경찰에 체포돼버립니다.
그러나 수현에게는 저지른 것의 몇 배나 되는 혐의가 씌이고, 수현은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탈옥을 시도합니다. 공교롭게도 하형사가 수현의 인질이 되고 이때부터 두 남자의 치고받는 버디 드라이브가 시작됩니다.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느낌은 대단히 낯설다는 것입니다. 조민호 감독에 따르면 영화 환경의 80%는 종로구 일원이라고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의 눈길이 가지 않는 지역들을 골라 찍은 듯한 느낌이 강합니다. 더구나 조직에서 손을 씻고 라면을 끓이며 사는 미남 조폭이라는 설정과 한국의 조폭들이라기보다는 마피아를 연상시키는 암흑가 인물들의 모습이 사뭇 환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음 속으로 답을 내렸습니다. 아, 이 영화는 판타지다.
하지만 얼마 뒤, 형사들의 사실감 넘치는 대화가 등장하고, 하형사의 파트너 장례식장이 나오고, 몸을 던져 범인과 격투를 벌이는 형사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리얼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어느새 영화는 리얼리티를 강조하는 전통적인 형사 드라마가 되어 있습니다.
한 영화에서 두 개 이상의 장르가 충돌하는 경우는 적지 않고, 그게 반드시 나쁜 결과를 낳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강적>에서 이 두 장르의 결합은 그리 아름답지 않습니다. 비현실적인 주인공이 현실적인 악당들과 싸우다 보니 현실적인 결론이 내려지는 것이 그리 쉽지 않게 돼 버렸습니다.
출발이 판타지(또는 동화)였던 덕분에 이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클럽 여가수(문정희)-하형사-수현의 한강 신이나 수의사 공선생(염혜란)이 나오는 장면은 이 영화와 무척이나 잘 어울립니다. 하지만 이런 장면에서 바로 칼날과 주먹이 부딪는 리얼한 장면으로 넘어갈 때마다 영화는 무척이나 덜컥거립니다. 주인공들의 현실적인 고민이 다시 수현과 미래의 러브스토리로 넘어갈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올해 한국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악역인 킬러 철민 역의 연극배우 김준배는 인상적인 호연을 펼쳤지만 영화 내내 겉돌고 있습니다. 철민이 상징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폭력의 위협이 이 영화와 잘 맞아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죠. 결국 완성된 영화에서 철민이 등장하는 장면은 초반에 강조된 느낌에 비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아마 감독도 고심 끝에 철민의 신들을 최소화할수밖에 없었던 듯 합니다.
마지막 신에서 조민호 감독은 '희망'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합니다. 마지막 신에 저 멀리 보이는 도시가 실재하는 서울이 아니라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점이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아마도 이 영화의 판타지적 성격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 현실적이지 않은 악당들과 형사들이 나오는 동화, 땀냄새를 풍기는 거친 사나이들이 치고 받는 하드보일드 수사물, 아무래도 <강적>은 둘 중 하나의 노선에 보다 충실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영화의 흥행 성적이 그리 폭발적이지 않았던 것은 월드컵의 영향도 있었지만, 관객들이 전혀 다른 두 개의 영화 사이에서 길을 잃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p.s. 한국인 최초로 007 영화에 출연한 오순택씨가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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