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이 오르면 교수대로 가는 해적 용의자들의 긴 줄이 보입니다. 그중에는 올가미에 아예 키가 닿지 않는 어린아이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이 정도 연령의 어린이는 절대 죽지 않습니다. 신비로운 우연의 손길이 닥치든, 주인공들이 필사적인 노력을 해서든 어린이는 구해 내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일본산 공포영화 '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고어 버빈스키는 그따위 오랜 관습에는 눈길 하나 주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애라고 봐주는게 어디 있어! 라는 초강경의 입장입니다. '재미를 위해서라면 뭐든 희생할 수 있다'는, 소름끼치는 임전 태세를 보여주고 시작한다고나 할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기다려 왔던 시대의 괴작, '캐리비안의 해적 3 -세상의 끝에서'가 개봉했습니다. 이 영화는 특이한 기록 하나를 세웠죠. 바로 시사회 없이 극장 개봉을 해버린 겁니다.
대한민국에서 개봉되는 영화들 가운데 언론(은 물론이고 배급 창구를 열어줄 극장주들을 위한) 시사회를 갖지 않고 바로 스크린에 오를 수 있는 영화는 1년에 한편 나오기 쉽지 않을 겁니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거죠. 극장주들에게든, 언론에게든 마찬가집니다. 극장들에게는 '우리 이번에 캐리비안3 갖고 왔는데 스크린 좀 내 주지? 영화를 먼저 보자고? 그럼 안 걸어도 좋고', 미디어에게는 '기사? 안 써도 돼. 어차피 사람들 다 보러 오게 돼 있어'라는 식의 자세인 겁니다. 물론 직접 이런 식으로 말을 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자신있는 영화가 대체 몇이나 있겠습니까.
사실 '캐리비안...' 시리즈는 정말 웃기는 작품입니다. 아주 오래 전부터 평론가들이 싫어하는 히트작은 있어 왔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짜임새가 엉망인 영화가 히트하는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그리고 짜임새는 없는데도 이렇게 재미있는 영화는 정말 드물죠.
이런 오만방자한 행태 때문에, 영화가 엄청난 대박을 내거나 망하기 전에는 미디어를 통해 기사가 나오기 쉽지 않겠지만, 아무튼 '캐리비안의 해적 3'는 전작들 못잖게 재미있는 영화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돈 쳐 들이고 재미가 없을 수가 있냐! 라고 말하시는 분들, 그런 영화도 많답니다.)
줄거리를 한번 요약해 보겠습니다. 단, 이 영화는 1편과 2편을 보신 분들이 보셔야 합니다. 3편으로 처음 이 시리즈에 뛰어드신 분들은 지독하게 불친절한 - 지나간 시절의 요약 따위는 기대하지 마십쇼 - 대접을 각오해야 할 겁니다.
잭 스패로우(조니 뎁)를 되살리는 데 의기투합한 바르보사(제프리 러시), 엘리자베스(키라 나이틀리), 그리고 티아 달마(나오미 해리스)는 배와 선원을 구하기 위해 싱가포르의 대해적 사오펭(주윤발)을 찾아갑니다. 한바탕 예의 엎치락 뒤치락을 거친 뒤, 이들은 배를 타고 이 세상의 끝의 바깥 세상에서 잭을 구해 이승으로 돌아옵니다.
(이 정도는 결코 스포일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잭을 구해내지 못한다면 영화 3편이라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고... 또 아무튼 영화를 보시면 압니다.)
그렇게 해서 이들은 현존하는 해적의 영주(Lord) 9명을 모아 문어대가리 해적 데비 존스(빌 나이)와 악당 베켓(톰 홀랜더)의 연합에 맞서 싸우기로 합니다. 하지만 그 사이에도 이 시리즈 특유의 배신과 음모가 여러 차례 스치고 지나갑니다. 물론 대부분은 음모라고 하기에도 짜증스러울 정도로 유치한 수준입니다.
1편과 2편을 보신 분이라면 잘 아실 수준입니다.
이 영화는 어린이들의 전쟁놀이 게임과 유사한 부분이 있습니다. 어른들이라면 무슨 게임을 하건 미리 정해진 규칙에 따라 하겠지만, 어린이들의 게임은 순식간에 룰이 바뀌고, 상황에 따라 계속 새로운 규정이 등장합니다.
빨간 비행기는 노란 탱크와 싸우면 이기지만 노란 탱크 중에서도 꼬리에 미사일이 달린 탱크는 비행기에게 이기고, 비행기 중에서도 헬리콥터는 모든 탱크에게 이길 수 있다는 식으로, 새로 등장하는 장난감의 종류에 따라 새로운 규칙이 아주 당연한 듯 인정됩니다.
'캐리비안...'의 우주도 그렇습니다. 무척이나 긴 1편과 2편에 걸쳐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던 아홉명의 해적 영주들이 갑자기 등장하고, 데비 존스가 몰고 다니는 플라잉 더치맨의 선장이 바뀌는 규칙(매우 중요합니다)도 어느 한 순간 등장해버립니다.
세상의 끝에서 죽은 사람을 데려오는데 어떤 사람은 거기까지 가서 데려와야 하고(예를 들면 잭 스패로우) 어떤 사람은 말만 하면 다시 살려낼 수 있는(예를 들면 바르보사) 지도 순식간에 그냥 뚝딱 설명 한마디로 정해집니다. 굳이 말하자면 드래곤볼로 살려낼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죠.
그런데도 이 3편을 재미있게 볼 수 있는 것은 1편과 2편의 힘이 매우 큽니다. 두 편의 영화를 통해 친숙할 대로 친숙해진 주인공들의 운명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기 때문이죠. 즉 3편은 그 자체로서는 큰 힘을 갖고 있는 영화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동안 흐트려 놓았던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한데 모으느라 안 그래도 엉망인 플롯은 더욱 허점 투성이가 되거든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 그런 걸 따지는 건 정말 예의없는 행동이 되겠죠. 애당초 한번이라도 말이 되는 스토리였던 적이 없으니까요.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3편이 어느 정도 완결편의 흉내를 내느라, 그동안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잭 스패로우의 등장 신을 엄청나게 줄여버렸다는 점이 대단히 아쉽습니다. 이 영화가 아무리 엉망이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더라도 관객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뭐니뭐니해도 조니 뎁이라는 천재 배우가 만들어낸 잭 스패로우라는 캐릭터의 힘을 빼놓고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3탄에서는 이야기를 일단락지어야 한다는 이유 때문에, 잭 스패로우까지도 평소의 말도 안 되는 행동양식을 버리고 비교적 정상적인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건 누가 봐도 상당히 재미를 떨어뜨리는 요소입니다.
대신 주변 인물들의 재롱은 많이 늘어났습니다. 제프리 러시는 1편에서의 악의 화신에서 벗어나 상당히 정감있고 노련한데다 어느 정도 의리까지 있는 해적 영웅으로 거듭납니다. 티아 달마도 대단히 중요한 역할이 됩니다. (물론 그 역할이 영화의 줄거리에 무슨 영향을 미치느냐 하면 또 그런 것도 아니지만 말입니다.^^)
(티아 달마의 멀쩡한; 모습입니다.)
무려 2시간 40분을 뒤척댄 끝에 영화는 3부작에 걸쳐 펼쳐낸 대 로망의 끝을 보여줍니다. 물론 아쉽습니다. 과연 4편이 나올까요? 현재로서는 나올 가능성이 매우 짙습니다. 각본가 테리 로시오는 "4편에 대해 결정된 것은 없지만 조니 뎁은 '대본만 좋다면 또 할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는 코멘트를 한 적이 있고, 뎁 역시 이를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제작자들이야 불감증이언만 고소영이겠지요.
주인공들 중 하나인 키라 나이틀리는 한 인터뷰에서 "나는 17세부터 21세까지 이 영화에 매달려 있었다. 이젠 다른 영화를 하고 싶다"며 속편 제작에는 참여하지 않겠다는 뜻을 비쳤지만, 아니, 솔직히 말해 나이틀리가 나오고 안 나오고가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아, 물론 4편이 나온다면 또 봐야죠.
감독이 고어 버빈스키가 될지, 다른 감독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섣불리 '말이 되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헛된 노력만 하지 않아야 한다는 걸 장담을 받아야 할 겁니다. 말이 되는 잭 스패로우의 모험담은 논리정연한 오스틴 파워스나 마찬가지일테니까요.
p.s. 3편의 보너스 인물은 잭 스패로우의 아버지 티그 선장입니다. 배우는 너무도 당연히, 조니 뎁이 '잭 스패로우의 모델은 이 사람'이라고 일찌감치 밝혔던 롤링 스톤스의 기타리스트 키스 리처드입니다.
유감스럽게도 티그 선장의 극중 모습은 없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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