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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가 감독판 상영 등으로 화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흥행 최고점은 지나친 듯 하지만 뒤늦게 이 영화를 보는 분들이 아직 적지 않은 듯 합니다.

'국가대표'가 주는 메시지는 자명합니다. 21세기의 '겉으로는 최첨단'인 대한민국에 대한 다양한 비판이 영화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타인에 대한 관용의 결여'라는 부분에 대한 비판은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영화 속 밥(헌태)은 스키 점프 대표팀의 정체에 대해 안 다음 자신이 이용당하고, 또 버림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와 비슷하게 국가대표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느낀 사람들은 그 이전에도 많았습니다. 그중에는 재일동포인 김성근 SK 와이번스 감독도 있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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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국가대표

관객 800만 동원을 앞둔 영화 '국가대표'에는 밥(하정우)이라는 재미동포가 나온다. 어머니를 찾기 위해 한국에 왔다가 아예 스키점프 국가대표가 되지만 밥은 애국가 1절 가사도 모른다. 자연히 '양키 새끼'라며 욕하는 동료와 갈등을 빚는다.

영화 속 얘기만은 아니다. 재일동포 출신 김성근 SK 와이번스 감독은 1961년 1월 1일 대만에서 열린 제4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때 처음 국가대표로 뽑혔다. 당시 나이 19세. 59년 8월 7일 재일동포 학생야구선수단의 일원으로 한국 땅을 밟은 지 1년 반 만의 일이다.

최근 출간된 자전적 에세이집 『꼴찌를 일등으로』에 따르면 가네바야시 세이콘(金林星根)으로 불리던 소년은 한국에 와서야 자기 이름이 '김성근'이라는 걸 알았다. 말은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동포 여학생의 미소는 따뜻했다. 처음 먹어 보는 불고기 맛에 반했고 영화 '비극은 없다'의 주인공 김지미에게 매료됐다. 동료 선수의 친척들이 숙소로 찾아오면 그때마다 눈물바다가 펼쳐졌다. 뭉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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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좋지만은 않았다. 경기 도중 교포 투수의 공이 경남고 4번 타자 박영길의 머리를 맞히자 관중은 일제히 '쪽발이 물러가라'며 야유를 보냈다. “일본에서 조센진이라고 차별받고 사는 것도 서러운데, 재일동포 선수단을 구성하는 일도 얼마나 어려운데, 쪽발이라니….” 국가대표가 된 뒤에도 '쪽발이'라는 수군거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단일민족'의 순혈주의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인기 아이들 그룹 2PM의 리더였던 재미동포 출신 박재범은 4년 전 인터넷에 남긴 몇 마디 불평 때문에 하루아침에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고향인 시애틀로 돌아가는 신세가 됐다. '군대도 안 가는 교포'라는 이유가 그에 대한 반감을 더욱 북돋웠다. “한국에서 돈만 벌어 돌아갈 거라면 지금 당장 꺼지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혹시 한국식 생활 방식과 예절에 익숙지 않다는 이유로 4년 전의 그를 몰아붙인 결과가 '난 한국인들이 싫어(I hate Koreans)'라는 불만으로 이어진 건 아니었을까. 그 실수 하나로 등을 떠밀듯 보낸 조국은 과연 그에게 어떤 나라로 기억될까. 그를 바라보는 다른 동포 청소년들에게 '대한민국'은 까다롭고 차갑기만 한 나라로 기억되는 건 아닐까. 2009년 현재 재외 한인의 수는 682만 명에 달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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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감독은 - 가끔 해설자로 TV에 나오는 걸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 아직도 한국어 발음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특히 ㅇ 받침 발음은 절대 안 되는 편입니다.^ 그의 아들 김정준은 그에겐 여전히 '존준'입니다. '꼴찌에서 일등으로'를 보면 '고려왕'이라는 브랜드의 CF 모델로 나섰을 때 '고려왕'이 '고려완'으로 발음되는 바람에 수없이 NG를 낸 이야기도 나옵니다.

그런 그가 1961년,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은지 1년 반만에 국가대표가 됐을 때는 어떤 상태였을지 쉽게 상상이 됩니다. 1년 반을 모두 한국에서 산 것도 아닙니다. 학생야구단 원정을 왔다가 일본으로 돌아갔고, 고교 졸업후 프로 구단과 사회인 야구단 진출이 좌절된 뒤 한국 동아대에 스카웃되어 6개월 정도(그러니까 야구 시즌 동안) 선수 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다가, 철도부 야구단의 선수로 다시 한국에 오게 된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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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찌에서 일등으로'에는 '쪽발이라는 말을 들어도 올 수 있는 조국이란게 있다는게 좋았지만, 조국은 날카로운 발톱을 감추고 있었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국가대표 투수로, 60년대 실업야구의 에이스로 명성을 떨친 그였지만 워낙 외곬수인 성격 탓인지, 아니면 서투른 한국어 탓인지 그는 수시로 코너에 몰렸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조국'을 따뜻하게만 느끼지 못한 사람들은 한둘이 아닙니다. 한때 삼성에 김성길이라는 투수가 있었습니다. 언더스로로 빠른 공을 던지는 투수였죠. 그도 몇 차례 이런 어려움을 털어 놓은 적이 있습니다. "부산이나 광주 경기에서 이기고 있으면 어김없이 '이 쪽발이'라는 야유가 날아왔다. 일본에서는 내가 속한 팀이 이기고 있으면 '조센진'이라는 야유가 날아왔다. 대체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불과 15년 전 일입니다. 지금이라고 크게 달라졌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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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민족과 순혈주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위에서 말했듯 재외 한인의 수는 700만에 육박합니다. 결혼이나 기타 이유로 아예 이 통계에서 빠져나가는 사람들도 한둘이 아닐 겁니다.

그 자손들이 한국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한국인의 생활 방식이나 문화를 자진해서 이어 가라고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먼 해외에서 그런 문화를 갖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그들을 배척하다 보면 결국 한국은 자꾸 작은 나라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윗글에서는 분량때문에 제외했지만, 700만에 달하는 재외 한인은 물론이고 한반도 안에서의 '다문화 가정'도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용모는 같지만 한국말도 못하는' 부류와 '이 땅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어딘가 용모가 이질적인' 사람들은 이미 '한국인'이라는 집단을 구성하는데 있어 무시할 수 없는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단일민족의 신화에 매달리는 것은 이 나라의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사회 모든 분야에서, 지금보다는 훨씬 더 개방적인 풍토가 자리해야 합니다. 더 넓게 수용하지 않으면 이 나라 앞에는 점점 더 쪼그라들거나, 쪼개지는 길이 선명해 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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