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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8강이면 훌륭한 성적입니다. 당초 이번 대회가 시작할 때만 해도 목표는 16강 진출이었습니다. 최근 몇년간 20세 이전부터 스타플레이어로 이름을 날리던 선수들이 팀을 이룬 상태에서도 16강 진출에 계속 실패해왔고, 이번 대회에도 카메룬-미국-독일과 한 조를 이루면서 '죽었구나'하고 생각한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브라질-스위스-나이지리아와 붙어야 했던 2005년, 브라질-미국-폴란드와 한 조였던 2007년에 비해 유난히 나쁜 대진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만...)
사실 이번 대회를 지켜보면서 1983년의 기억이 되살아난 사람은 저뿐만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때의 찬란했던 기억과 함께 그 시절의 아쉬움도 함께 다시 살아나더군요. 그래서 써본 얘깁니다.
제목: 청소년 강국
청소년 축구 대표팀이 이집트에서 선전하는 바람에 많은 사람에게 잊혀졌던 기억 하나가 되살아났다. 1983년 6월 16일 오전 8시. 일찌감치 출근한 사람들은 TV 앞에서 일손을 잡지 못했다. 각급 학교에서도 수업은 뒷전이었다.
온 국민의 관심은 멕시코에서 열리고 있던 한국과 브라질의 U-20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 준결승 경기에 쏠려 있었다. 박종환 감독이 이끌던 한국은 경이적인 연승으로 세계 4강에 진출, 온 국민의 가슴을 들끓게 했다. 비록 접전 끝에 1대2로 아깝게 패하긴 했지만 외신들은 붉은 유니폼을 입은 한국 선수들의 분전에 ‘마치 붉은 악마들 같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 뒤로 이 말은 한국 축구의 상징이 됐다.
박종환 감독과 주축 선수들은 귀국해서도 영웅 대접을 받았고, 1986년 아시안 게임과 88년 서울올림픽을 유치한 신군부는 “이 팀이 88년 올림픽 대표팀의 주축이 될 수 있도록 지금부터 집중 육성하겠다”고 선언했다. 온 국민이 ‘88팀’의 밝은 미래를 기원하며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성공 신화는 여기까지. 박종환 감독은 1986년 대표팀을 맡았지만 88년 7월, 올림픽 개막을 2개월 남기고 성적 부진을 이유로 해임됐다. 결국 그해 올림픽에서 한국 축구는 2무1패로 조 예선 통과에 실패했다. ‘83년 멤버’ 가운데 소기의 목적대로 88년 대표팀에서 주전으로 뛴 선수는 수비수 김판근 정도였을 뿐, 신연호와 김종부 등 발군이었던 선수들은 여러 이유로 한국 성인 축구의 간판이 되지 못했다. 83년 당시 한국을 꺾고 우승한 브라질의 베베토와 둥가·조르징요 등이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가 되어 1994년 미국 월드컵 우승의 주역이 된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축구에서만 이런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분야에서 ‘한국 청소년’은 세계 수준의 기량을 과시했다. 국제 수학 올림피아드나 과학 올림피아드 무대에서도 한국 고교생들이 지난 20여 년간 거둔 성적이 좋은 예다. 하지만 이들이 성인으로도 세계 최고 수준으로 자라났는가를 생각해보면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다. 어느 분야에서나 장기적인 성장보다는 즉시 점수를 딸 수 있는 편법만 판을 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홍명보 감독의 데뷔작인 이번 젊은 영웅들은 ‘한국 축구의 미래’로 커나갈 수 있을까. 이제부터가 중요하다. (끝)
1983년 청소년 팀의 기적같은 4강 신화는 이미 리뷰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브라질만 베베토나 둥가 같은 저런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8강에서 탈락한 네덜란드 멤버 가운데에도 그 이름도 거룩한 마르코 반 바스텐이 포함돼 있더군요.
잘 키운 청소년 대표팀이 미래의 주축이 되는 경우는 여러 차례 목격됐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1991년, 피구와 코스타 등이 이끈 포르투갈의 '황금세대'죠. 이들의 힘으로 포르투갈은 유로 2000 등에서 좋은 성적을 내며 일약 유럽 축구의 주도국 대열에 진입했습니다. (사실 이들이 가장 화려하게 꽃필 것으로 예상됐던 2002 월드컵 무대는 주최국 한국과 같은 조가 되는 바람에 망쳐졌다는 느낌도 있죠. 이 대목에서 잠시 묵념...)
그리고 1998년 프랑스의 월드컵 우승 당시 공포의 투톱이었던 앙리와 트레제게도 바로 1년 전인 97년 U-20 대회에서 곧바로 두각을 보였습니다. 이때의 프랑스도 8강 진출국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와 예선 같은 조였던 한국은 앙리와 트레제게에게 각각 두골씩을 내주며 2대4로 참패했습니다. 이관우가 이끌던 당시 한국 팀은 박진섭이 두 골을 넣었더군요.
(아무리 한국이 국제대회 대진운이 별로 안 좋은 편이긴 하지만 이 해의 대진은 참 볼만합니다. 브라질-프랑스-남아공과 한 조. 아, 물론 이 대회 전까지 프랑스의 느낌은 지금 같은 강팀의 느낌은 아닙니다. 이 대회를 계기로 프랑스도 축구 강국의 면모를 되찾았죠.
이 대회 최고의 참극은... 당시 브라질에게 당한 3대10의 참패입니다. 지금 볼로냐에서 뛰고 있는 아다일톤에게 무려 6골을 먹었다는.)
뭐 이런 등등의 성공사례들이 있습니다. 반면 한국의 83년 멤버들은 그 뒤로 화려하게 개화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관심을 모으고 집중적인 지원을 약속받은 멤버들 치고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입니다.
88년 대표팀에 속했던 83년 멤버들은 김판근 김종건 김풍주의 세 사람입니다. 이중 주전으로 자리잡은 것은 김판근 정도였죠. 물론 2년 전에 열린 86년 월드컵 대표에 속했던 김종부가 있지만 프로 진출과 관련, 복잡한 스카우트 파문에 휘말려 운동을 쉬면서 성인 무대에서는 기대했던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골감각을 자랑했던 신연호는 물론이고 '제2의 스트라이커'였던 이기근 역시 88년 K-리그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지만 국가대표와는 별 인연이 없었습니다. 이건 물론 당시의 기형적인 대표팀 운영과도 관련이 깊죠. 90년대까지 역대 K-리그 득점왕들은 대부분 국가대표에서는 소외된 선수들입니다.
(많은 분들이 왜 김주성은 거론되지 않나 하실테지만 김주성은 '88팀'의 주요 멤버였긴 했지만 '83년 멤버'는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김주성도 83년 멕시코에 뛴 것으로 착각하시는데 김주성은 83년 4강 이후 88팀의 육성 과정에서 최진한 김삼수 황영우 여범규 등과 함께 뒤늦게 발굴된 선수들 중 하나였던 것이죠. 물론 이들 중 상당수가 한국 축구의 주축이 된 것은 분명합니다만, 윗글은 '83년 멤버'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오해 없으시기 바랍니다.)
아무튼 거듭 주장하고 싶은 것은 한국은 그동안 유독 '청소년만 강한 나라'의 면모를 여러 분야에서 보여왔다는 것입니다. 수학과 과학 올림피아드의 예도 들었지만 그에 앞선 기능올림픽의 경우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스포츠의 여러 종목들이었죠.
홍명보 감독은 2012년 올림픽까지 일단 지휘권을 보장받았습니다. 이번 대회가 U-20(20세 이하)이고 올림픽은 사실상 U-23 대회인 만큼, 2009년과 2012년의 연관성은 굳이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을 듯 합니다.
물론 축구계의 비주류였던 박종환 감독과 대한민국 축구의 적자인 홍명보 감독의 입지를 비교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당연히 훨씬 좋은 여건과 지원이 이뤄지겠죠. 부디 어젯밤 눈물을 흘리던 선수들이 3년 뒤 런던에서는 활짝 웃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물론 그때에는 8강 이상의 성적을 내면 더 바랄게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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