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쯤인가 있었던 '빨간 마후라' 사건 때문에 '빨간 마후라'가 구글에서 성인인증을 받아야 검색할 수 있는 단어가 돼 버렸다는 개탄할 일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상옥 감독의 영화 '빨간 마후라'와 김영환 장군의 이름은 우리가 오래도록 기억해야 할 고유명사들입니다.
지난 주 일제히 '김영환 장군'에 대한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지난 14일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 치러진 김영환 장군의 추모제와 관련한 내용들입니다. 요약하자면 김영환 장군은 6.25가 한창이던 1951년 12월18일, 공비 토벌을 위한 공습에 나섰다가 UN 사령부의 공격 목표가 해인사인 것을 알고 명령에 불복, 인류의 문화 유산인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것으로 알려진 분입니다.
또 이 분은 한국 공군 파일럿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를 처음으로 도입한 분이기도 하더군요. 그 분의 사적을 돌아보다 생각난 얘기들을 지난 주말에 써 봤습니다.
제목: 숭고한 불복종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의 1944년 8월 9일, 독일의 디트리히 폰 콜티츠(Von Choltitz) 중장은 파리 점령군 사령관으로 부임한다. 2개월 전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이 시시각각 파리로 진격하고 있는 상황. 히틀러는 그에게 거듭 “절대 파리를 온전한 채로 내줘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폰 콜티츠는 이 명령을 묵살한 끝에 8월 25일 1만7000명의 휘하 장병과 함께 연합군에 항복했다. 히틀러는 폰 콜티츠의 항복 소식에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Brennt Paris)?”라고 고래고래 소리치며 분통을 터뜨렸다고 전해진다. 이 말은 연합군의 파리 수복 과정을 영화화한 르네 클레망 감독의 1966년 작 영화 제목으로도 유명하다.
폰 콜티츠는 회고록에서 “후세에 '파리를 파괴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다”고 밝혔다. 일각에선 전세가 이미 기울었음을 감지한 결과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온전한 파리를 보게 된 것은 폰 콜티츠의 덕분임을 부인할 수 없다.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어떤 군대도 상명하복을 철칙으로 삼지 않은 적은 없다. 대한민국 군 형법 44조도 '적과 대치한 상황에서 상관의 정당한 명령에 반항하거나 복종하지 아니한 자'에게 사형, 무기, 또는 10년 이상의 징역이라는 엄한 처벌을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몇몇 사람들은 양심에 따른 명령 불복종으로 역사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다. 14일 경남 합천 해인사에서는 6·25 당시 유엔군의 폭격 명령을 거부, 국보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김영환 장군의 추모제가 열렸다. 그는 항명을 추궁하는 상부에 해인사의 가치를 조목조목 설명해 '귀하와 같은 장교를 둔 건 대한민국의 행운'이라는 찬사를 얻어내기도 했다.
그 외에도 비슷한 시기 “태우는 건 하루면 족하지만 다시 세우려면 천 년도 부족하다”며 구례 화엄사를 소각령으로부터 지킨 차일혁 총경, 오대산 상원사를 태우려는 국군 장교에게 “그럼 나도 함께 태우라”고 맞선 방한암 선사의 이야기도 감동을 전한다. 물론 그 뜻을 받아들여 법당 문짝만 뜯어 태우고 떠난 이름 모를 국군 장교를 빠뜨릴 수 없다.
위화도 회군 이후 수많은 장군이 사리 사욕에 의한 하극상으로 역사를 더럽히기도 했지만, 이렇듯 숭고한 불복종의 기록은 인간이 명령대로 단순 복종하는 기계와 어떻게 다른지를 새삼 느끼게 한다. (끝)
1921년생인 김영환 장군은 한국전쟁 당시 미국으로부터 F-51 무스탕 전투기 10대를 넘겨 받아 한국 공군 최초의 전투비행단을 지휘한 에이스였습니다. 이 분이 빨간 마후라를 처음으로 착용하게 된 계기를 찾아 보다 보니 참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나왔습니다.
김영환 당시 대령이 1951년 형인 김정렬(뒷날 참모총장) 장군의 집에 가서 치맛감인 빨간 비단 천을 얻어다 목에 감은 것이 시작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2차대전때 독일의 에이스였던 리히토펜의 진홍색 머플러에서 착안한 김대령이 '빨간 마후라'를 후배 조종사들에게도 사용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http://www.army.mil.kr/history/%C2%FC%B0%ED/%C1%D6%BF%E4%C0%CE%B9%B0/%B3%B2/%B1%E8%BF%B5%C8%AF.htm 에 더 자세한 얘기가 있습니다.일설에는 영화 '빨간 마후라'의 주인공도 김영환 장군이라고 합니다만, 이 사이트에 따르면 영화의 내용은 승호리철교 폭파작전을 지휘한 유치곤 장군의 이야기에서 더 많은 것을 따 왔다고 합니다.)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는 그야말로 전쟁 영화의 고전입니다. 이 영화에선 폰 콜티츠가 양심적인 지식인의 표상으로 그려지지만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 인사들은 그가 파리에서 항복하기 전까지 수많은 레지스탕스들을 체포해 처형했으며, 전세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됐다는 것을 판단, 전쟁 이후 자신의 삶을 도모하기 위해 급격히 변신한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요소를 참고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어쨌든 파리의 보존은 아이젠하워도 쉽게 파리로 진공하지 못했을 정도로 중요한 요소였고, 그 부분에서 콜티츠에게 공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듯 합니다. (아울러 콜티츠의 항복 때문에 드골의 자유프랑스군과 파리 수복의 공을 나눠 갖게 된 좌익 레지스탕스들은 콜티츠를 미워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는군요. 이 구도는 2차대전 이후 프랑스 좌익의 운명에 꽤 큰 영향을 미칩니다.)
오래 전, 제가 학교 다니던 시절엔 중학교인지 고등학교인지 국어 교과서에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수필이 실려 있었습니다. 이 수필엔 방한암 선사가 상원사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받은 국군 장교와 갈등을 일으키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물론 이 수필엔 한암 선사가 장교를 "이삿짐을 싸야 하니 며칠 뒤에 오라"고 돌려보내고, 돌아온 장교가 법당 문을 열자 한암 선사가 절명해 있는 광경을 본 뒤 차마 절에 불을 지르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내용은 사실과는 좀 다르다고 하더군요.^ 한암 스님이 절의 소각을 막은 것은 맞지만 입적하신 것은 이보다 좀 뒤의 일이라고 합니다. 선우휘의 단편 '상원사' 때문에 사실과 전언 사이에 혼란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차일혁 총경은 유명한 아드님 때문인지 요즘도 자주 이름이 오르내리는 분입니다. 지리산 공비 토벌대장으로 혁혁한 공로를 세운 이 분은 지금 들어도 전설적인 일화를 여럿 남겼습니다. 가극 '눈물의 여왕'도 그중 하나입니다.
이분이 화엄사를 불태우라는 명령을 듣고 한 말이 "이 절을 태우는데 하루면 충분하지만 다시 지으려면 천년도 부족하다"는 명언입니다. 전쟁중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어지간한 용기로는 감히 하기 힘든 말일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참 이런 분들의 일화가 자꾸 잊혀지는게 아쉬울 뿐이라 한번 정리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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