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의 치명적인 매력은 브람 스토커의 '드라큘라' 시절부터 존재했습니다. 드라큘라 백작은 매력적인 귀족 남성입니다. 그가 피해자에게 접근하는 방식은 그런 매력을 전제로 한 것입니다.
이후에도 수많은 픽션들이 뱀파이어를 다루고 있었지만, '못생기고 추악한 흡혈귀'에 대한 작품은 '노스페라투'외엔 그닥 생각나지 않습니다. 앤 라이스의 '뱀파이어 연대기' 시리즈를 봐도 그렇습니다. 심지어 '뱀파이어 연대기'의 주요 주인공인 레스타(영화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에서는 톰 크루즈가 연기한 역할입니다)가 록스타로 변신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죠.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여기서 한단계 더 나아가 아예 '인간보다 아름답고 인간보다 우아한' 흡혈귀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목: 뉴 문
흡혈귀의 원형은 그리스 신화의 라미아(Lamia)나 로마 신화의 스트리고이(Strigoi)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유럽에서 뱀파이어라는 단어가 발생한 것은 빨라야 17세기, 영어로는 18세기의 일이다.
로런스 리켈스(미국 UC샌타바버라 교수)는 최근 국내에 출간된 저서 『뱀파이어 강의』에서 이 시기 유럽에서 뱀파이어에 대한 공포가 급격히 확산된 것은 서유럽인들이 느끼던 동유럽의 야만성이나 '나와 다른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근거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당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사망 후 '무덤으로부터 되돌아와 사람들의 피를 빨 가능성이 높은 자들'로 분류됐다. 알코올 중독자, 자살자, 몽유병자, 세례받기 전에 죽은 아이, 매춘부, 동성애자, 심지어 '언청이로 태어난 아이' 등이다.
공통점을 추려 보면 소외의 대상이 될 가능성이 큰 사람들, 다시 말해 죽어도 애도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들임을 알 수 있다. 한 번 더 생각하면, 누군가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공동체에 피해가 돌아올 수 있다는 공리적인 경고가 전설 속에 숨어 있는 셈이다.
브램 스토커가 1897년 소설 『드라큘라』로 뱀파이어를 픽션 소재로 이용한 이후 이 괴물들은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과 영생의 덧없음을 일깨워주는 비유로 성장했다. 하지만 요즘 전 세계적인 붐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꽃미남들은 이전의 뱀파이어들과는 전혀 다르다.
'트와일라잇' 시리즈 2편 '뉴 문'은 미국에서 이미 2억5000만 달러의 흥행을 기록했고, 최근 국내에서도 100만 관객을 동원했다. 이 영화 속 뱀파이어들에게 영원한 삶의 고뇌와 죄의식 따위는 없다. 인간을 죽이지 않아도 혈액은행을 통해 허기를 해결할 수 있고, 신비로운 외모와 초능력에다 '네가 숨쉬는 것 자체가 내겐 선물이야'라고 속삭이기까지 한다. 상대가 반하지 않으면 이상할 정도다.
이런 '뉴 문'의 열기 속엔 마이너리티에 대한 배려를 기대하는 소박한 흡혈귀의 전설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주인공 로버트 패틴슨을 바라보는 여성 팬들의 시선은 하이틴 스타들을 바라보는 10대 소녀 팬들의 그것과 너무도 흡사하다. 아무리 진지한 고민은 일단 거리를 두는 시대라지만 초승달(New moon)에서 밝게 빛나지 않는 부분의 의미를 생각해 보라고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끝)
'뉴 문'을 볼까 말까 망설였습니다. 보고 나서 그리 유쾌해지지 않을 거라는 건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이런 세계적인 문화현상을 외면한다는 것은 직업윤리(?)에 어긋난다는 생각 때문에 영화를 보게 됐습니다.
사실 줄거리는 요약하고 말고도 없을 정도입니다. 일단 악한 뱀파이어들이 자취를 감추자 고민거리가 없어 고민인 에드워드(로버트 패틴슨)는 '로미오와 줄리엣'을 보고 "왜 나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어도 따라 죽을 수가 없을까?"하는 고민을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자신과 함께 있는 한 벨라(크리스틴 스튜어트)가 안전할 수 없다는 (좀 납득은 가지 않지만)결론을 내리고, 깔끔하게 벨라와의 관계를 정리해버립니다.
에드워드가 하루아침에 떠나자 벨라는 산 송장이 되어 버리는데, 그런 벨라를 여전히 노리는 악한 뱀파이어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하지만 벨라 곁에는 어느새 자신이 늑대인간임을 자각한 제이콥(테일러 로트너)이 있습니다. 제이콥이 벨라를 보호하고, 어느새 벨라와 제이콥은 감정을 공유하게 되지만... 벨라는 여전히 에드워드를 잊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미친 짓을 벌입니다.
일단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에게 이성적인 사고나 행동을 기대하는 것은 절대 금기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합니다. (뭐 등장인물들이 모두 10대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건 상당히 리얼하다고 볼 여지도 있죠.)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흥분하는 관객들은 - 10대가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긴 하지만 - 상당히 넓은 연령대에 포진해 있습니다. 20대는 물론 30대, 40대 관객들도 꽤 있습니다. 이것 역시 남성 아이들 그룹의 '이모 팬들' 현상을 생각하면 전혀 놀랄 일은 아닙니다. 잘생긴 청년과 닭살 로맨스에 대한 열정은 점점 더 연령을 무시한 전체 여성층으로 퍼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치명적인 매력'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 소설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뱀파이어들이 잘생기고 멋진 인물들로 그려진 건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닙니다. 매력적이고 위험한 뱀파이어의 캐릭터는 기존의 뱀파이어에다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나오는 '불노불사의 미남 청년' 이미지가 입혀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캐릭터들이 상징하는 것 역시 그동안 너무도 분명했습니다. 이런 캐릭터들은 '과연 사람이 늙지 않고, 죽지도 않으며, 영원한 젊음과 미모를 간직하고, 먹고 살 걱정도 하지 않는다면 그때는 모든 고민과 번뇌가 사라질까'에 대한 상상의 결과입니다. 냉정하게 생각을 해 보면 결코 그렇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영생을 가진 존재들은 필연적으로 고독과 권태를 상대로 싸워야 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트와일라잇' 시리즈가 등장합니다. 이 시리즈의 뱀파이어들은 매우 새롭긴 하지만 사실은 상상력 부족의 소산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난 100년간에 걸친 뱀파이어 픽션의 전통을 싹 무시해 버리고, 영생과 불멸이라는 소재에 대한 인간의 축적된 사고 따위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이런 거죠. "잘 생겼는데 늙지도 않아? 그럼 좋은 거 아니야? 돈도 많아? 그럼 더욱 좋지. 몸도 날쌔고 초능력도 있어. 어머, 그럼 내가 위기에 빠지면 언제든지 구해줄 수 있겠네? 그런데 피를 먹는다고? 뭐 내 피만 아니면 어때. 아, 사람은 안 죽여도 된다고? 그럼 문제될 게 없잖아? 완벽한데!"
심지어 에드워드와 크리스틴 커플이 생각해 낸 가장 큰 문제라는 게 2편인 '뉴 문'에 나오는 "내가 늙어서 할머니가 되어도 너는 나를 사랑할거야?" 정도입니다. 이건 '하이랜더' 시리즈만 해도 시작하고 10분만에 등장하는 문제죠. 네네. 어디까지나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아무 생각 없는 10대들입니다.
젊은 꽃미남들에게 온 세상 여성들이 환호하는 분위기를 너무나 잘 아는 처지에서 새삼 '뉴 문'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는 이유는 딱 한가지입니다. 인간의 상상력의 산물인 뱀파이어는 그동안 수많은 예술가들에 의해 발전하고 육성돼 왔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정리된 뱀파이어는 인간이 갖지 못한 장점들을 엄청나게 갖고 있지만, 결코 인간보다 우월해 질 수는 없는 반면교사의 의미였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들을 상대로 '인간들이 원하는 것을 다 갖는다 해도 그것이 곧 인간의 행복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니다'라는 철학적인 배경을 가진 존재들이었던 것이죠.
하지만 '트와일라잇' 시리즈는 그 모든 걸 한방에 날려 버린 얄팍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깊이 있는 사유의 중요성을 아예 부인해 버리는 무시무시한 힘을 발휘하고 있죠. 영화 속의 뱀파이어 집단은 스타이며 셀레브리티인 이들이고, 영화 속 여주인공이나 관객들은 이들의 밝은 면만을 보고 환호하는 사람들입니다.
영화 바깥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죠. 아이들 그룹의 멤버들도 죽을 때까지 춤과 노래를 연습해야 하고, 때로는 성공을 위해 야비해져야 하고, 치열한 경쟁 속의 삶을 살아야 하며, 언젠가는 나이를 먹어 팬들의 사랑을 잃는다는 사실 따위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사랑하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그리 깊은 사랑은 아닙니다. 명품 백에 대한 사랑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깊다고 말하기가 쉽지 않을 듯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트와일라잇' 시리즈와 '뉴 문'은 현실을 떠난 판타지이기는 커녕 현실의 무시무시함을 더욱 강조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고 나서도 몸서리가 쳐 집니다. 제목에 대한 답은 '여자들은 항상 뱀파이어 캐릭터를 사랑했다'입니다. 하지만 뱀파이어라는 캐릭터가 등장한 이후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사랑하게 된 것은 처음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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