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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쉬리'의 강제규 감독이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화두를 던진 이래 이 주제는 한국 영화/드라마 제작자들의 벗어날 수 없는 고민거리가 되어 왔습니다. 얘기인 즉 간단합니다. 과연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영화건 드라마건, '블록버스터'라고 불릴 만한 성과를 향해 투자하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 옹호세력은 만만찮습니다. 이를테면 '쉬리'를 위시해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도전했던 수많은 대작들, 그리고 그 가운데서도 관객들의 성원을 얻어냈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나 '디 워', 올해의 천만 관객 동원작 '해운대'에 이르기까지 할리우드 대작들을 겨냥하고 그 스타일을 표방했던 작품들이 '그래도 이게 한국 영화의 저력'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하지만 과연 그 작품들이 겉으로 내세우는 외양에 비해 자랑할만한 내실을 갖췄는가에 대해서는 여전히 시비가 따라다니고 있습니다. 옹호론자들은 "첫술에 배부를 수 없다. 외양을 키우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다 보면 외양과 내실이 모두 탄탄한, 소위 '작품성있는 대작'이 나올 것"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하는 의혹 역시 끊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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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에서 색칠한 스티로폼이라는게 너무 역력한 바윗돌을 던지며 싸우는 신라군과 백제군을 보는 시청자들, '아이리스'의 어이없는 마무리를 보며 분개했던 시청자들은 과연 어떤 쪽의 손을 들어 줄까요. 그와 관련한 생각입니다.

평소 하고 싶었던 얘기를 다 하려다 보니 꽤 길어졌습니다.



제목: 한국 사극의 전투신은 왜 동네 북인가

2010년.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대규모 스펙터클 전쟁 영화와 드라마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소지섭 김하늘 주연의 MBC 드라마 <로드 넘버원>(연출 이장수)이 있고, KBS는 1970년대 인기를 끌었던 6·25 소재 드라마 <전우>를 부활시킨다는 방침이다. 영화계에선 차승원 김승우 권상우 주연 <포화속으로>(감독 이재한)의 제작 소식이 눈길을 끈다.

이런 현대전 대작들의 영향인지 드라마 <선덕여왕>의 붐을 이어갈 사극 대작의 소식은 잠잠하다. 이병훈 프로듀서의 <동이>(MBC) 외에는 눈길을 끄는 작품도 없다. 제작사들은 아예 사극 시놉시스를 대놓고 기피하는 상황이다. 아무래도 제작비가 현대극의 두 배 이상 드는 데다 상품 노출을 통한 제작비 지원 역시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영세한 외주제작사의 입장에선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피할 수밖에 없다.

또 최근 몇몇 대작 사극들의 경우, 드라마 후반으로 갈수록 제작비 부족으로 인해 작품의 시각적 퀄리티가 뚝 떨어지는 안타까운 경우를 낳곤 했다. 유종의 미를 위해선 드라마 후반에 대형 전투 신 등이 나와야겠지만, 불행히도 거기 들어갈 제작비는 이미 다 쏟아 부은 상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사극 전문가는 이런 얘기를 한 적도 있다.

“50부작이라고 치고 처음 2회까지 20회 분의 제작비를 쏟아 붓는다. 초반에 눈길을 끌지 못하면 끝장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10회까지 40회까지의 제작비를 쓴다. 시청률만 기대대로 나오면 나머지 회차에 대한 제작비는 방송사에서 부담하게 돼 있다.” 그러다 보니 초반엔 200~300명의 단역 배우에다 수십 필의 말까지 동원돼 그럴싸한 전쟁 장면이 구현되지만, 후반에는 네티즌들로부터 ‘30만 대군이 아니라 30명 대군이냐’는 악플이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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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들일 돈을 다 들인다고 해서 시청자들이 그냥 감동해 주는 것도 아니다. 최근 종반으로 접어든 <선덕여왕>의 전투 신은 초반에 비해 물량 면에선 크게 차이가 나지 않지만 시청자들의 만족도는 매우 낮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이미 시청자의 기대치는 <글래디에이터>나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 맞춰져 있다. <적벽대전>조차도 어설퍼 보일 정도다. 한국 TV 드라마의 제작비로 이런 작품들과 스펙터클 경쟁을 벌인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불가능한 일이다.

그럴 바엔 전략을 바꿀 필요가 있다. HBO의 인기 사극인 <로마(Rome)>나 <튜더스(The Tudors)>같은 작품들을 참고하는 거다. <로마>는 카이사르의 말년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제정 출범에 이르는 로마의 격동기를, <튜더스>는 영국의 전제 왕정을 확립한 헨리 8세의 파란만장한 편력을 담고 있다. 하지만 이들 드라마에서 대규모 전투 신을 찾아보기는 너무도 어렵다.

특히 <로마>는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대결 - 카이사르의 이집트 원정 - 옥타비아누스와 브루투스의 대결 -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대결 등 로마의 운명을 건 전투들을 정면으로 관통하고 있지만 이 드라마에서 50명 이상의 병력이 격돌하는 전투 장면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은 스펙터클이 없다는 이유로 실망하지 않는다. 긴장감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전쟁 장면만 피해 가는 솜씨가 너무도 절묘하기 때문이다.

물론 의상이나 미술비까지 아낄 수는 없겠지만, 한국 사극의 제작진이 연구해야 할 부분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두어 시간에 끝나는 영화야 어쩔 수 없겠지만, 드라마는 특히 이런 지혜를 닮을 필요가 있어 보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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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태왕사신기'의 전투 신은 위에 든 예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울 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종학이라는 완벽주의자의 손끝에서 나온 전투신은 위에 거론된 작품들과는 좀 다른 차원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왕사신기'또한 '내실과 외양의 균형'을 비교하는 논리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합니다. 배용준이라는 한류 슈퍼스타의 등장과 호쾌한 전투신까지는 흠잡을 데가 없지만, '쥬신의 왕'을 자처하는 담덕이 대체 왜 한민족의 재통일과 중원 회복을 꾀하지 않는지를 비롯해 작품의 내적 논리에서는 수없이 많은 허점이 쏟아져 내립니다.

이런 주장에 대해 현재 방송가나 업계에서 맞서는 내용을 요약하면 "드라마가 드라마지(혹은 영화가 영화지)", 즉 "그만하면 됐지 뭘 더 바래"라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미실의 퇴장을 전후에 '선덕여왕'에 쏟아진 실망과 비난에 대해 제작진이나 MBC 드라마국이 '그런건 설정'이라거나 '작가의 권한에 속하는 부분'이라는 식으로 대응한 것 역시 그 자신들이 만들고 있는 작품에 대한 기대치가 결국은 그냥 그 정도라는 것을 자인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현재 우리 시청자들(혹은 관객)의 수준으로 보아 내용의 논리적 완결성이나 플롯의 개연성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낭비"라는 것이 현재 제작진의 논리입니다. 거기에 쓸 시간이나 노력, 자본이 있으면 더 비싼 배우를 쓰거나, 더 많은 엑스트라를 쓰거나, 말을 몇마리 더 쓰거나, 더 화려한 갑옷을 만들거나, 화약을 몇KG 더 쓰는게 시청률을 높이는데(혹은 관객을 늘리는 데) 더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죠. 그리고 현실을 생각하면 거기에 정면으로 반발하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네. 이 부분에선 시청자/관객들도 반성해야 할 부분이 있겠죠).

하지만 반론을 제기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닙니다. 엑스트라 500명을 써 본 경험이, 제작비 200억원을 컨트롤해본 경험이, 할리우드 특수효과팀과 작업해 본 경험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고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과연 얼마나 더 '시행착오'를 겪으면 한국 영화/드라마가 제작비 1억 달러짜리 영화나 회당 제작비 1000만달러대의 드라마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요. 과연 우리가 열심히 따라잡는 속도가 할리우드의 발전 속도보다 빠르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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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때 참고로 삼고 싶은 것은 BBC의 드라마 진용입니다. 척 봐도 그리 돈 들어가는 드라마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장수 SF 시리즈 '닥터 후'만 해도 거대 미드에 비하면 제작비 얘기를 하기가 부끄러울 지경입니다. 하지만 각개 드라마의 완성도는 찬탄을 자아내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대형 전투신 하나 없이 대작의 느낌을 다 내는 '로마'나 '튜더스'의 교훈도 연구해볼 만 합니다.

이제는 한번쯤, '어떻게 하면 돈을 덜 들이고 돈 들인 드라마보다 잘 만들었다는 느낌이 드는 드라마를 만들 수 있을까'에 좀 투자가 이뤄졌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그 '어떻게 하면'을 연구하는 비용은 절대 공짜가 아니라는 것 또한 생각해둬야겠죠. 언제까지 '역시 일본 원작이 내러티브가 튼튼하다'면서 드라마며 영화며 죄다 일본 원작 판으로 만들어야 합니까.

물론 어떻게 하면 되는지도 다들 알고 있습니다. 다만 실천하지 않을 뿐입니다. 당장 돈이 안 되는 단막극을 통해 연출자나 작가들을 훈련시키는 비용은 너무나 아깝지만, 작품의 완성도와는 무관하게 광고주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투자(이를테면 단막극 한 편의 제작비와 맞먹는 톱스타의 기용)에는 눈에 불을 켜는 방송사에 사실 뭘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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