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직 드라마의 본격화가 곧 드라마의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일리 있는 얘깁니다. 왕년에는 의사 가운이건, 이발사 가운이건 어쨌든 흰 가운만 입고 나오면 의사라는 식의 드라마도 꽤 있었죠. 하지만 요즘은 명찰 하나까지 신경을 써서 만드는 분위기가 역력합니다. 그만큼 '날림 제작'은 사라져가는 분위기인 듯 합니다.
그런데 아직도, 어떤 직업의 세계를 다룬 드라마나 영화가 나왔을 때 "실상은 저것과 전혀 달라!"라며 분개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불만이 나오지 않는 작품들이 매우 드물 지경입니다. 대체 왜 그럴까요. 어느 쪽에 문제가 있는 걸까요?
그래서 썼던 글입니다.
SBS TV '스타일'이 방송된 이후, 잡지사에 근무하는 여기자들(요즘은 주로 '에디터'라고 부르는 모양이다)의 반응이 이런 저런 방향에서 들어오고 있다. 그런데 제작진에겐 미안한 얘기지만 만족한다는 반응은 거의 없다. 99%가 "세상에 저런 잡지사가 어디 있냐"는 내용이다.
날마다 파티 의상인 김혜수를 두고 "어떻게 저렇게 입고 일을 하냐"는 반응이 기본이고 "남의 회사 어시(assistant, 즉 수습)를 돈 주고 빼간다는게 말이 되냐" "포토그래퍼가 기획회의에 들어오는 회사가 어디 있냐"는 등 디테일에 대한 지적도 적지 않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 보면, '스타일'만 그랬던 게 아니다. 직업의 세계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 치고 해당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로부터 '야, 정말 리얼하다. 실감난다'는 반응이 나오는 경우는 당최 들어 보질 못했다. 신기할 정도다.
의사든 변호사든 예외가 없다. '종합병원' 이후 모든 메디컬 드라마, '애드버킷' 이후 모든 법정 드라마가 진짜 의사나 변호사들로부터는 "세상에 무슨 의사(혹은 변호사)가 그따위냐. 대체 병원(혹은 로펌)인지 놀이터인지 모르겠다"는 볼멘 소리를 들어왔다. 최근의 '뉴하트'나 '파트너'에 이르기까지 주된 평가는 "저런 식으로 했다가는 당장 옷 벗어야 할 것"이란 선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긴 꼭 전문직만 그런 건 아니다. 농부든, 어부든, 간호사든, 항공사 여승무원이든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자신들의 직업에는 죄다 불만이다. 체크해 볼 기회가 없어서 그렇지 재벌이나 조직폭력배들도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자신들의 역할이 그닥 마음에 들지는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정말 궁금하긴 하다. 재벌 2세들도 드라마를 보면서 자기들끼리 "야, 저게 말이 되냐? 근데 너 혹시 니네 회사에 맘에 드는 여직원 있으면 저렇게 하냐?"하고 통화를 할까?)
물론 기자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특히 연예 담당 기자들은 정상인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점점 드물어 지는 것 같다. 사실 '스타의 연인'에 나오던 얼띤 기자(정운택)나 영화 '과속 스캔들'에 나오던 봉필중 기자(임승대)를 마음에 들어 하기란 쉽지 않은 일 같다. 게다가 봉필중 기자처럼 기사를 썼다간 집이 몇 채 있어도 모자랄 판이다.
요즘 방송되는 드라마 '드림'에 나오는 희한한 기자(정은표)는 사진 한 장의 댓가로 스포츠 백 하나에 가득 찬 현찰을 챙긴다. 참 좋은 세상이다. 하긴 그 정도 돈을 막 뿌려댈 수 있을 정도로 격투기 선수와 스포츠 에이전트들이 떼돈을 벌고 다니는 날이 오긴 했으면 좋겠다(이 친구들도 '드림'에 불만이 많더라는 얘기).
기자의 경우는 다른 직업들과 좀 다른 면도 있다. 다른 직업의 경우엔 좋은 변호사나 좋은 의사가 나오는 드라마도 '리얼리티에 문제가 많다'고 지적을 받곤 한다. 하지만 기자의 경우엔 아예 '좋은 기자'라는 것이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걸 본 기억이 거의 없다.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예외는 손예진이 주연했던 '스포트라이트' 정도인 것 같다.
물론 이 경우에도 '정의를 지키는 신념에 찬 방송 기자'들과 '부패하고 타락하고 게으른 신문 기자'들이 드라마 속에서 아주 선명한 대조를 이뤘다(뭐 방송국에서 만든 거니까 이해한다. 신문사가 만들었다면 아마 반대가 됐겠지). 아무튼 일부나마 '좋은 기자'들을 다룬 죄로 이 드라마는 시청률에서 참패했다. 시청자들은 아마도 '좋은 기자'가 나오는 드라마를 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니 군소리가 나오지 않았던 전문직 드라마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그들이 사는 세상'이나 '온에어'를 두고 PD나 드라마 작가로부터 불평이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물론 연기자나 매니저들은 이들 드라마에 불만이 있었던 것 같지만, PD나 작가들이 이 드라마에 불만이 있었다면 그건 정말 심각한 문제였을 거다.
그런데 대체 왜 이러는 걸까. 혹시 작가협회에서는 '해당 직업을 가진 극중 인물들이 실제 그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들면 그 드라마는 망한다'고 가르치는 걸까? 그런데 이거 혹시 한국 드라마만 이런 걸까? (끝)
다른 직업은 모르지만 최소한 기자에 대한 한 한국드라마만 저런 건 아닌 듯 합니다. 로버트 레드포드와 더스틴 호프만이 워터게이트 사건을 파헤치는 '대통령의 음모(All The President's Men, 1976)' 같은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기자라는 종자들은 항상 무슨 일이 되게 하기보다는 안 되게 하는데 재능이 많은 존재들로 그려집니다.
아래 사진의 아저씨가 나오는 '다이 하드'가 대표적인 경우고, 대부분의 기자들은 하는 역할이란게 대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긴 이런 부분을 생각해보면 '스포트라이트'는 대단히 무모한 작품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대체 뭘 믿고 기자를 주인공으로.^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제목에 대한 답은 나와 있는 셈입니다. '망할까봐.'
아무튼 요즘 '스타일'을 본 잡지사 쪽의 반응이나 '드림'을 본 스포츠 에이전트, 혹은 이종격투계에서 나오는 반응들을 보면 한국 드라마나 영화의 '현실불감증'은 여전한 듯 합니다. 그래도 다행히 '현실보다 한심하게'가 아니라 '현실보다 너무 화려하게' 그려냈기 때문에 이 불만은 그냥 불만 수준으로 남아 있는게 다행일 듯 합니다. 만약 현실보다 나쁘게 그려졌다면 당장 소송이나 대대적인 항의를 받았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예전에 간호사 단체나 항공사 여승무원 단체에서는 이런 일이 꽤 잦았죠. 바로 '특정 직업에 대한 비하'라는 항의 말입니다.
이런 항의를 고려한다면 역시 특정 직업을 나쁘게 그리는 것 보다는 좋게 그리는 것이 유리하겠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쁘게 그리는 것이 대세'인 이 직업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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