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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중되는 업무로 짜증만 늘어가는 나날에 WBC 경기는 단비와도 같더군요. 초반에 류현진이 살짝 흔들릴 때만 해도 잠시 불안하더니, 여지없이 뒤집는 솜씨는 짜릿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일본전 콜드게임패 이후 김인식 감독님을 비방하는 어처구니없는 찌질이들의 손질에 분개하기도 했지만, 결국은 실력으로 이렇게 모든 걸 보여주시는 데 감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감독님의 '집안 칼' 들인 류현진 김태균 이범호가 이렇게 펄펄 날아 주니 고맙지 않을 수가 없더군요. 나머지 7개 구단 팬들이 한화 팬들에게 점심이라도 사야 할 듯 합니다.

모처럼 이른 야구의 계절을 맞아 옛날 추억을 되살려 써 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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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감독과 영화 감독

90년대 초. 처음 신문사에 들어가자 야구 담당을 시켰다. 워낙 야구를 좋아하던 터라 거리낄 건 없었지만 야구 담당 기자라는 건 알고 보니 장돌뱅이였다. 노트북과 속옷을 둘러메고 전국 산천을 유람하는게 일이었다.

비가 와서 경기가 취소된 어느 날, 한 야구단 직원과 여유있게 노닥거리고 있었다. 서로 야구관이 달라서(물론 팬과 경기인의 시각 차이였겠지만) 옥신각신하던 차에 살짝 흥분한 그 양반이 물었다. "그래서 송기자가 생각하기에 한국 최고의 감독은 누구요?"

아니 그렇게 쉬운 걸 묻다니. "그야 임권택 감독이지." 그 다음날부터 다른 구단 직원들의 눈길이 달라진 걸 느꼈다. 그 양반이 "되게 웃기는 기자가 들어왔다"고 소문을 냈다나.

야구에도 감독이 있고 영화계에도 감독이 있다. 한국에선 다 감독이지만 원산지에선 야구 감독은 매니저(manager)고 영화 감독은 디렉터(director)다. 야구 감독은 운영자고 영화 감독은 지시자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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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복장 김경문 감독이 거짓말같은 한점차의 명승부를 연발하며 8전 전승, 감동의 금메달로 전 국민을 오르가즘에 빠뜨렸다. 이때 메달권에도 들지 못한 일본 야구 팬들은 중얼거렸다. "두고 봐라. WBC가 있다." 나오는 스타들을 보자면 솔직히 그렇다. 올림픽이 선댄스라면 WBC는 오스카다.

WBC를 앞두고 한국엔 썩 좋지 않은 소식이 잇달아 들려왔다. 영화로 치자면 흥행이 보장된 톱스타 이승엽과 박찬호의 캐스팅이 잇달아 불발됐고, 김병현은 여권이 없어서 출연할 수 없다는 통보를 했다. 추신수는 깐깐한 소속사에서 액션 신은 촬영해선 안된다고 감시 매니저를 붙였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영화를 살리는 최고의 조연배우 박진만마저 만두를 먹다 체해서 촬영장에 나오지 못했다. 명장 중의 명장 김인식 감독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지만 스타 없는 영화는 소 없는 찐만두다(박진만씨, 죄송합니다).

반면 같은 날 개봉하는 경쟁작을 만드는 재팬 픽처스는 신바람이 났다. 다르빗슈, 오가사와라, 조지마 등 일본을 대표하는 톱스타들이 자발적으로 출연 요청을 한데다 할리우드(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마쓰자카, 조지마, 이치로, 이와무라까지 참여를 선언했다. 그나마 뉴욕 양키스의 마쓰이가 빠져 1.00군이 아닌게 다행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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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개봉 첫주는 콜드게임으로 끝났다. 일본 작품은 작품성과 재미를 겸비했다는 극찬을 받은 반면 한국의 주인공 김광현은 "가서 다트 게임 CF나 더 찍으라"는 혹평을 받았다. 냄비같은 언론들이 또다시 '한국영화 위기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지의 한국은 패자부활전을 딛고 일어섰고, 결국 30만 달러의 추가 보너스가 걸린 1라운드 1-2위 결정전에서 일본을 제압했다. 김인식 감독 만세! 대한 독립 만세!

영화 감독과 야구 감독 얘기로 돌아간다. 두 감독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다. 야구 감독은 선수와 똑같은 유니폼과 모자를 쓰지만(대체 왜 그런지는 알 수 없다), 영화 감독이 배우처럼 입고 메이컵을 하면 스태프들이 수근거린다. 영화 감독은 배우의 동작이 마음에 안 들면 들때까지 다시 시킬 수 있지만 야구 감독에겐 한 번의 기회뿐이다. 즉 영화 감독은 각본으로 드라마를 만들고, 야구 감독은 각본 없이 드라마를 만든다. 배우 출신 영화감독은 그리 많지 않고 명감독으로 남는 경우도 별로 없지만(누구나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될 수는 없다) 선수 출신이 아니면서 야구감독이 되는 경우는 아예 없다.

하지만 공통점도 많다. 두 사람 모두 수십명의 수하를 거느리고, 자기 일에 최종적인 책임을 지며, 연패를 당하면 다른 직업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성공해도 자기가 스타로 만들어 준 새파란 녀석들만큼 돈을 벌지는 못한다. 그래도 양쪽 모두 현장에서 감독이 죽으라면 톱스타들도 죽는 척 해야 한다.

얘기가 갑자기 산으로 가는 것 같지만 아무튼 하고싶은 말은 이거다. 대한민국 최고의 덕장 김인식 감독님! 영국의 대니 보일이란 감독은 '공도 못 만져본' 인도 꼬마들을 데리고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을 따냈습니다. 이번 한국 팀도 간판들이 빠져 김이 새지만 감독님을 믿습니다! 파이팅!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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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 맨 위의 질문을 받은 순간엔 참 난감했습니다. 그 구단 직원 형님과 얘기를 하고 있는데 바로 옆에, 그 구단의 감독님이자 당시 최고의 감독 중 하나로 불리던 분이 바로 옆에 와 있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때까지 제가 하고 있던 얘기는 '그 감독님이 왜 최고 감독이 아닌지'를 역설하는 거였기 때문에, 무척 곤란해 질 상황이었죠. 그걸 보고 이 직원 형님이 저를 궁지에 몰기 위해 그런 질문을 느닷없이 던진 거였습니다. (임권택 감독님, 감사합니다.^)

아무튼 WBC 얘기로 돌아가서,

실제로 베이징에 왔던 일본 팀도 강팀이었지만, 그 팀과 이번 팀은 무게가 다릅니다. 영화 캐스팅으로 치자면 '오션스 11'에 로버트 드 니로와 안젤리나 졸리가 조연으로 나오는 식이랄까요. 물론 일본 야구의 정식 1군(위에서 말한 1.00군)이 되려면 양키스의 마쓰이가 참가해야 하지만, 이 정도면 진정한 일본 야구의 진짜 실력을 대변해주는 팀이라고 해도 좋을 겁니다. 굳이 숫자를 매기자면 1.05군 정도?

반면 한국은 1.2군 정도로 평가해야 할 듯 합니다. 어쨌든 베이징 대표팀보다 현재의 진용이 살짝 무게가 부족하죠. 지금까지 한국이 해외에 내보냈던 최강팀은 개인적으로 1차 WBC 대표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2009년의 시점에서 볼 때 박찬호는 몰라도 이승엽이 빠진 건 한국에겐 실제 전력을 떠나 정신적으로 상당한 허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쨌든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1.2군이 일본의 1.05군과 당당히 맞서 1승1패를 했다는 건 두고 두고 자랑할 일입니다.

게다가 이번 대회는 2006년 이후 한국 야구 대표팀이 병역 혜택 없이 벌이는 최초의 빅게임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동안 한국 야구의 힘 = 국방부의 힘이라고 비아냥거려온 일부 사람들에게 진정한 실력을 보여줘야 할 계기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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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감독님의 사퇴에 대해 이래 저래 말이 많지만, 솔직히 말해 한-미-일 대표팀이 최소 팀간 10차전 이상의 리그를 벌인다면, 김성근 감독님만한 적임자는 없겠죠. '김성근식 야구'는 상대와 만나면 만날 수록 조금씩 더 강해집니다. 데이터가 쌓이기 때문이죠.

반면 WBC처럼 단기전에다, 상대에 대한 전력을 거의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경기에 임해야 한다면, 김인식 감독님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합니다. 순간적인 대응 능력이나, 자신이 키운 선수 아닌 여러 구단 출신의 톱스타들에게 두루두루 존경을 받는 인화의 힘 등에서 그렇죠. 물론 대표팀 감독 선정 과정이 그리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훨씬 더 알맞은 감독에게 지휘봉이 넘어간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번엔 한번 우승을 기대해 보는 것도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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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야구장의 봉중근 의사처럼 극장가에서는 봉테일 열풍도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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