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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바이러스'가 끝난지 2주가 지났습니다. 후속 드라마 '종합병원 2'도 시청률 고공 행진을 하고 있지만, '베토벤 바이러스'는 2008년의 가장 인상적인 드라마 중 하나로 기억될 전망입니다. 시청률은 간신히 20%에 턱걸이한 정도였지만, 화제성과 파급력은 시청률 40%대를 넘나드는 드라마 이상이었습니다.

수천개의 기사와 블로그 포스팅이 쏟아졌고, 저도 이 드라마와 김명민이 연기한 강마에 캐릭터의 인기 원인에 대해서는 다른 포스팅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간혹 해괴한 주장들이 발견되더군요. '우리도 강마에같은 지도자가 필요하다' '강마에 리더십의 요체는 무엇인가' 하는 류의 주장들이었습니다.

과연 이 드라마에서 '강마에 리더십'이라고 부를만한 긍정적인 부분이 발견된 일이 있던가요? 실력만 좋으면 자신의 지휘하에 놓인 사람들을 그렇게 공깃돌 놀리듯 다뤄도 되고, 그렇게 해서라도 성공만 하면 칭찬받아 마땅한 것일까요? 문득 20여년 전의 또 다른 신드롬이 생각났습니다.

(오해의 소지를 막기 위해 한마디 덧붙이자면, 이 글은 '베토벤 바이러스'에 열광한 모든 시청자들에 대한 글이 아닙니다. 바로 위에서 말했듯 '비정상적으로', '강마에 리더십'이라는 키워드에 집착하는 사람들에 대한 글입니다. 이 점을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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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강마에의 외인구단', 그렇게 마음에 드시던가요?

 1983년, 대한민국 곳곳의 만화 대본소에서는 비슷한 대화가 수없이 오고 갔다. "'외인구단' 9권 나왔어요?" "네. 나왔어요." "어디 있어요?" "지금 누가 보시는데. 줄 섰어요. 기다리세요."

이현세의 장편 극화 '공포의 외인구단'은 30권으로 완간될 때까지 당대 대중문화의 코드를 지배했다. 처음에는 만화에 친숙했던 10대들이, 곧이어 대학생을 거쳐 사회인들까지도 이 만화의 영향권에 흡수돼 버렸다. 1986년 이장호 감독이 만든 영화 '이장호의 외인구단'도 원작 마니아들에겐 혹평을 받았지만 그해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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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내용이었을까. 잠시 기억을 되살려 보자. 한국에도 프로야구라는 것이 생긴지 얼마 안 됐을 즈음, "강해져라, 그럼 아무도 너희를 무시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손병호라는 광적인 지도자가 야구계의 루저들을 불러 모은다.

주인공 까치를 비롯한 여섯 명의 선수들은 무인도에서 손 감독의 지휘로 1년 동안 인간의 한계를 넘나드는 혹독한 훈련을 받아 무적의 야구 전사로 거듭난 뒤, 꼴찌 구단과 단체 계약을 한다. 조건은 후기리그 50전 전승에 1인당 2억원씩(당시 물가로는 서울 시내 아파트 5채 값 정도 된다)의 보너스를 맞바꾸는 것. 물론 구단주는 야구에서 50전 전승이란게 가능할 리 없으니 날로 먹는 기회라고 생각하지만 이들은 차근차근 목표를 달성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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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스토리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였을까. 많은 사람들이 "강한 것은 아름답다"는 손병호 감독의 메시지를 가장 큰 이유로 꼽았다. 돈 없고 가방끈 짧고 빽 없어서 한탄하던 사람들에게, 유능하고 집념에 불타는 지도자가 나를 단련시켜 최강의 승부사로 거듭 나게 해 준다는 얘기가 더없이 매력적인 판타지로 여겨진 거였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한 얘기 아닌가? 최근 한국 시청자들은 어중이 떠중이 단원들에게 "이기적이 되어라. 남들을 위해 희생해서 얻은 게 뭐냐"고 강변하는 한 곱슬머리 지휘자에게 푹 빠져 있었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는 단원들의 볼멘 소리에도 아랑곳없이 "니들은 내가 연주하는 악기일 뿐"이며, 심지어 "니들은 그냥 개고 난 주인이니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나 짖으라"고 소리친다. 이런데도 차츰 단원들은 그의 가르침에 동화되어 간다.

물론 현실에선 어림없는 얘기다. 그래도 실력은 있으니 따르는 거 아니냐고? 강마에는 커녕 카라얀이 다시 살아 온다 해도 이런 막말을 참고 견딜 단원들이 있을 리 없다. 야구 감독이라면 당장 선수들이 태업에 들어간다. 담임 선생님이 이런 식이면 교육청에 신고할 학생들이 줄을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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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20여년 전 '외인구단' 분위기 그대로 '강마에 신드롬'이 등장한 건 무슨 이유일까. 역설적으로 말하면 한국 사회에는 아직도 억울한 사람이 너무 많은 거다. 즉, 내가 성공하지 못한 건 내 탓이 아니다. 머리 좋게 낳아 주지도, 엄청난 재산을 물려 주지도 않은 부모 탓이며, 일찌기 재벌 2세와 초등학교 동창이 되지 못한 탓이고, 욕설과 구타를 퍼부어서라도 올바른 길로 인도해 줄 유능한 스승을 만나지 못한 탓이다.

강마에는 자녀들을 과외로 뺑뺑이 돌리는 학부모들과도 코드가 맞는다. "우리 부모가 나를 이렇게 신경써서 교육했다면 내가 뭐가 되어도 됐을 것"이므로, "우리 애들이 나를 똑같이 원망하는 일이 없도록" 혹독한 강훈으로 아이들을 단련시키는 건 당연하다. 아이들이 나중에 부모님이 바로 강마에였다는 걸 알아 줘야 할텐데. 글쎄다.

아무튼 온 세상이 강마에를 동경하는 사람들 판인 걸 보면 세상이 지나치게 빨리 변한다 싶어도 절대 변하지 않는 게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고 보니 '공포의 외인구단'도 내년에 드라마로 나온다던데, 무대를 입시학원으로 바꾸는 건 어떨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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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의 '외인구단' 신드롬은 두 가지 면에서 전근대적인 판타지였습니다. 하나는 '지옥훈련' 만능주의였죠. '실미도'에서 보듯 '지독하게 굴리면' 다들 '붕붕 날아다닐 수 있다'는 군대식 문화가 온 사회에 확산된 경우였습니다.

지금 들으면 웃어 넘길 일이지만, 고 김동엽 감독은 롯데 자이언츠(아마추어 시절의 실업 구단 이름입니다) 창단 감독을 맡아 전 선수단을 이끌고 부산에서 서울까지 '천리 구보'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해 롯데가 실업야구 우승을 차지하자 당시의 매스컴은 '스파르타식 훈련'의 미덕을 칭송하기 바빴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분위기를 겪었던 야구인들은 입을 모았습니다. "세상에 그거보다 무식한 짓이 없었다. 감독이 뛰라는데 안 뛸수도 없고, 그 첫해 이후로 몸이 망가져서 옷 벗은 선수가 한둘이 아니었다"는 얘깁니다.

아무튼 이런 문화의 잔재는 지금도 사회 각계에 남아 있습니다. 심지어 국가대표 축구팀이 졸전 끝에 패하기라도 하면 바로 "군기가 빠졌다. 더 굴려야 한다"는 비난이 쇄도하죠. 어떤 조직이든 '쥐잡듯 잡으면' 능률이 올라간다고 생각하고, '풀어 주면 기어 오르는' 게 세상 이치라는 논리가 거의 항상 득세합니다.

인격이나 자율성 따위를 인정하는 리더는 그날로 '나약하고 조직장악력이 떨어진다'는 딱지가 붙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라면 강마에가 멋진 리더로 착각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욕먹는 사람들이 남들일 때 얘기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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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는 '남 탓'과 자율성의 실종입니다(남 탓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남에게 기대는 경향도 강합니다). 내가 지도자는 아니지만, 지도자는 전지전능해야 하고 청렴결백해야 하며, 인격적으로도 완성되어 있어야 합니다. 어디선가 완성된 스승이나 리더가 나타나 나를 불굴의 의지를 가진 용사로 거듭나게 해 줄 것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즐비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 중에 현실 세계에서 자신의 눈 앞에 존재하는 리더나 스승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게 보통입니다. 내가 바람직한 인재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들이 무능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게 일반적이죠. 유능한 리더의 출현을 동경하고, 그 리더의 성공을 찬양하지만, 동시에 실제로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리더의 권위를 인정하는 짓은 죽어도 못한다는 이율배반입니다.

거스 히딩크의 성공을 찬양하고, 히딩크같은 지도자가 다시 없다고 입에 침을 튀기며 칭찬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지도(휘)하는 사람들이 그때 '태극전사들'이 치른 파워프로그램에 해당하는 '마구 굴림'을 시도라도 할라치면 도끼눈을 뜨는게 인지상정입니다. 어떤 지도자도 스스로 변할 의지가 없는 구성원을 드림팀으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물론 동기부여도 리더의 중요한 역할이지만, 그것도 베이스가 있을 때 얘기죠.

그런 의미에서 이제 서서히 식어가고 있지만, '강마에에 대한 열광'은 좀 쓴 웃음을 짓게 합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게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건 왜일까요.  



p.s. 좀 생뚱맞기도 하지만 정말 찾아보니 별게 다 있군요.^^



그나자나 까치 오혜성 역으로 윤태영은 너무 건장한게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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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이 드라마 초창기에 썼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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