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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킥'에서 오래 기억될만한 대사 하나가 나왔습니다. MBC TV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은 이번주면 추억 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동안 복잡다단하게 진행됐던 네 젊은이의 러브라인도 정리될 전망입니다.

지난주 지훈(최다니엘)은 세경(신세경)이 왜 자신이 선물한 빨간 목도리를 잃어버렸을 때 그렇게 정신이 나간 듯 보였는지, 그리고 그동안 세경이 가끔씩 보였던 우울한 표정이 무슨 의미였는지, 세경이 왜 자신과 함께 갔던 LP 가게에 다시 갔는지를 불현듯 깨달았습니다. 심지어 아버지가 있는 나라로 떠나겠다는 세경에게 '가지 말라'고 말하기도 했죠.

그리고 15일 방송에서 지훈은 세경에게 "그런데 빨간 목도리를 잃어버렸을 때와는 달리 찾았을 때에는 왜 그렇게 담담했느냐"고 묻습니다. 세경은 대답합니다. "겨울이 다 갔으니까..."

참 함축적이면서도 여운이 남는 한마디가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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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경의 서울 생활은 내내 겨울이었습니다(물론 방송된 기간 중 상당 부분이 실제로 겨울이기도 했죠).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왔다고는 하지만 생전 처음 해 보는 남의 집 살이에다 동생까지 돌봐야 했으니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지훈에게 말한 '겨울이 끝났다'는 말은, 그런 고생보다 더욱 자신을 힘들게 한 것이 짝사랑이었다는 것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겨울이 끝났다'는 말(네, 3월이니 확실히 겨울이 끝나긴 했습니다)은 이제 지훈에 대한 짝사랑으로 가슴아프던 시절은 과거일 뿐이라는 걸 분명하게 해 주고 있습니다. 굳이 일부러 겨울로 자신이 돌아가지 않는 한 말입니다.

지난주 많은 시청자들이 '가지 말라'는 지훈의 말을 보고 새삼스레 지훈과 세경(흔히 '지세'라고 하죠)의 관계 부활을 우려(?)하기도 했지만 세경의 태도로 보아 그럴 가능성은 없을 듯 합니다. 스스로 그 시절이 겨울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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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지붕킥'의 세경에게 남은 문제는 그동안 긴 겨울 내내 따뜻한 아랫목 역할을 했던 준혁(윤시윤)에 대한 문제입니다. 지금 세경과 신애가 떠나면 가장 혼란을 겪을 사람은 준혁과 해리 남매일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출산을 앞둔 현경에게도 세경이 필요할 듯 하지만 자옥이 한 집으로 들어왔으니 오히려 세경을 내보낼 생각을 해야 할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세경이 떠나고, 남은 준혁은 언젠가 어른이 되어 그 섬으로 찾아갈 것을 다짐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결말은 어찌 보면 '거침없이 하이킥'의 유미(박민영)과 민호(김혜성) 커플, 혹은 윤호(정일우)와 민정(서민정) 커플의 처리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주기 때문에 살짝 불안하기도 합니다(워낙 반복을 싫어하는 스텐레스 김 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더 성장하고, 그보다 살짝 연상인 소녀도 인생을 더 배워야 합니다. 첫사랑은 이뤄지기 힘들고, 그 기억은 남자를 어른으로 만드는 법이죠.

이런 식의 결말은 언젠가도 얘기한 적 있지만 흑백영화 시대, 줄리앙 뒤비비에 감독의 역작 '나의 청춘 마리안느(Marianne de ma jeunesse)'의 엔딩을 연상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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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유럽. 규율이 엄격한 기숙학교 주변에 호수가 있고, 호수 한복판에는 음침한 고성이 있습니다. 어느날 소년은 우연한 모험 끝에 성에 사는 미녀 마리안느와 연인이 됩니다. 하지만 마리안느 곁에는 음침한 백작과 괴력을 가진 거구의 하인이 붙어 있습니다.

어느날  마리안느는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알고 있던 소년과 마리안느의 사랑이 현실이 아닌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소년은 마리안느가 있는 곳을 찾아 기숙학교를 떠납니다. 마리안느가 말한 단서인 "세 나라의 국경이 만나는 곳에 있는 성"을 향해서. 소년의 친구인 작중화자는 말합니다. '그의 눈에 차 있는 확신을 본 순간, 그건 단순한 환상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고. 영화는 소년의 출발로 끝납니다. 소년이 마리안느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그건 이미 영화 밖에 있을 뿐입니다. (김병욱 감독님에게도 이 영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만, 이 영화를 보신 적은 없다고 합니다.)

준혁과 세경이 '지붕킥'이 끝난 뒤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나머지 네 번의 방송에서 이들의 재회가 이뤄질지, 아닐지도 알 수 없습니다. 세경이 가야 할 나라가 남태평양의 어느 섬나라라는 것과, '겨울이 다 가서'라는 말은 묘한 울림을 남깁니다. 물론 간다고 해서 윤택한 생활이 보장될 리는 만무합니다. 과연 세경의 겨울은 끝났을까요. 끝났다면 그건 3월이 왔거나, 아버지의 초청장이 와서가 아니라 준혁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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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문득 준혁에게 있어 가장 끔찍한 결말은, 순재와 자옥 커플이 세경과 신애 자매를 입양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물론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게 아니라, '최악의 결말은 뭘까'를 상상해 본 결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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