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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낚시라고 생각할 분들도 꽤 있을 겁니다. 영국 날짜로 1월2일 암으로 서거한 피트 포슬스웨이트(Pete Postlethwaite, 향년 64세)가 세계 최고의 연기자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누구?" 하고 반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변명을 하자면, 그를 가리켜 '세계 최고의 배우(the best actor in the world)'라고 부른 사람이 스티븐 스필버그라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사는 원래 그렇게 기억되는 겁니다. 아이쉬와라 라이 역시 '세계 최고의 미녀'라고 불리게 된 건 줄리아 로버츠가 그렇게 불렀기 때문인 것이죠.

그리고 그의 이름(네. 매우 발음하기 힘들고, 매우 깁니다) 때문에 이름을 모르는 분들은 꽤 있겠지만, 그가 출연한 영화를 본다면 아주 작은 역이라도 그의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 영화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그것이 세계 최고 배우의 위력이겠죠.


그가 어떻게 젊은 날을 보냈는지 등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어쨌든 젊어서 청춘 스타로 이름을 날릴 외모는 절대 아니었고, 40대 후반에 들어서야 세계적인 명성을 갖기 시작한 배우입니다.

그의 모습을 처음 본 것이 당연히 짐 셰리단 감독의 '아버지의 이름으로(1993)' 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에일리언3(1992)'가 1년 정도 빠릅니다. '에일리언3'에서도 그는 죄수들의 행성에서 브레인 역할을 맡은 죄수 데이비드로 출연했습니다.

이후 그가 출연한 작품들 내내 비슷한 이미지가 형성됩니다. 약간의 예외는 있지만 대개 머리가 좋고 인간미가 넘치는 남자 역이죠. 험상궂은듯 하면서도 따스한 눈매를 가진 덕분입니다.



어쨌든 47세때 '아버지의 이름으로'로 오스카 남우조연상에 노미네이트 된 이후 포슬스웨이트는 승승장구합니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굳이 별 설명을 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다니엘 데이 루이스와 함께 아일랜드 분쟁의 격동에 휘말린 부자를 연기한 포슬스웨이트는 오히려 주인공인 루이스를 능가하는 존재감을 과시했죠. 사실은 11년 차이밖에 안 나는 부자간이었지만(당시 포슬스웨이트는 47세, 루이스는 36세), 타고난 노안 덕분에(?) 실감나는 연기가 펼쳐졌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는 작품, 감독, 남우주연 등 아카데미 핵심 7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됐지만 결과는 참담합니다. 단 한 부문도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이 해는 '쉰들러 리스트'의 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남우조연상은 좀 아리까리합니다.




이 정도 후보라면 '쉰들러 리스트'에서 눈부신 이상성격 연기를 펼친 레이프 파인즈와 포슬스웨이트가 경합을 펼쳐야 정상일 듯 한데 갑자기 웬 토미 리 존스...

'도망자'도 물론 재미있는 영화였지만 전혀 오스카 타입의 영화가 아니었던 터라 이건 뭥미 하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존 말코비치('사선에서')가 같이 후보에 오른 걸 보면 이 해의 트렌드가 좀 희한했구나 하는 느낌도 듭니다.




이후 포슬스웨이트의 앞날은 탄탄대로처럼 펼쳐집니다. 1994년은 미리 계약해 놓은 드라마에 주력했다면(아마도 '아버지의 이름으로'가 대박이 날 줄은 몰랐겠죠^^), 1995년부터 세계적인 감독들과 작품 활동이 이어집니다.

1995년의 대표작은 바로 '유주얼 서스펙트'. 여기서 포슬스웨이트는 커피잔 역으로 나오죠(영화를 안 보신 분들은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하실수 없을 겁니다 ㅋ). 전혀 일본 사람같이 생기지는 않았습니다만, 서구인들이 보기엔 동양인처럼 보이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변호사 고바야시라니...


현명하고 선의로 가득한 중년 남자 역이 어울리는 배우지만 이 영화에서 변호사 고바야시는 말만 공손한 악역입니다. 머리에 총이 겨눠진 상황에서 "미스터 키튼, 지금 저를 쏘시면 심각한 실수를 하시게 됩니다"라고 조금도 흥분하지 않고 항변하는 장면은 퍽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영화의 그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인물인 거죠.^^)




그 다음은 1996년작 '로미오+줄리엣'. 디카프리오와 클레어 데인즈를 이어 주는 로렌스 신부 역입니다. 물론 전형적인 포슬스웨이트 타입의 연기지만 이 신부는 좀 괴짜죠. 등에 있는 거대한 십자가 모양의 문신(아래 사진)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의 온갖 인기 스타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정통 셰익스피어극 배우의 연기를 보여줬다"는 평도 받았죠.




이해 '브래스드 오프'같은 작은 영화에도 관심을 보인 그는 1997년 스필버그와 두 편의 프로젝트를 함께 합니다. 바로 '아미스타드'와 '주라기공원 2, 잃어버린 세계'죠. 특히 후자에서는 냉혹한 전문 사냥꾼으로 변신, 또 한번 새로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1993년에서 1997년 사이 이런 쟁쟁한 경력과 탄탄한 실력을 보여준 포슬스웨이트는 희한하게도 할리우드에서 실종됩니다. 은둔형 배우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미디어 노출을 꺼렸던 그인 터라 갑작스런 세계적인 주목은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혹은 매니저와 싸우고 업계에서 매장됐는지도...^^).

그 뒤의 경력은 거의 TV 수준에 머물고, 유명 감독들과도 '작은 영화'에 주력한 경향이 짙습니다. 세계 수준의 주목을 받은 영화는 거의 없다고 봐도 좋을 정도입니다.




지난해의 '인셉션'은 그러던 그가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작품이라 반갑기도 했는데, 어쩌면 그의 운명을 예견한 영화가 아닌가 하는 느낌도 줍니다. 병상에 누워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는 모리스 피셔 회장 역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향년 64세, 요즘 기준으로는 너무 이른 나이입니다. 그만한 배우는 세상에 많다고 말할 사람도 많겠지만, 그가 짧은 할리우드 나들이 기간 동안 보여준 연기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고 해도 좋을 듯 합니다. 한마디로 세계 최고라는 말이 무리가 아닌 배우였죠. 짧은 글로 고인을 추억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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