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제목을 들었을 때부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뭐라구, 영화 제목이 '아버지와 마리화나'란 말야?" 그런데 실제로 그런 내용이라는 걸 알고 또 한번 놀랐습니다. (물론 진짜 제목은 '아버지와 마리와 나' 입니다.)
왕년에 잘 나갔던 록가수 태수(김상중)은 교도소 생활을 마치고 혼자 살던 고교생 아들 건성(김흥수)에게 돌아옵니다. 밤낮 대마초에 취해 교도소를 들날락거리던 아버지를 거의 친구 대하듯 하는 건성 앞에 유모차에 아기를 실은 마리(유인영)이 나타납니다.
어찌어찌하다가 두 부자만 사는 집에 들어와 살게 된 마리와 아기. 하지만 아버지는 여전히 철이 없고, 식구는 늘었지만 먹고 살기는 빠듯합니다. 이런 와중에 건성은 학교에서 1진과 시비가 붙죠. 참 복잡한 확대 가족입니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묘한 부자간입니다. 아버지는 1960년대생, 아들은 1990년대생 정도로 보이지만 사실 아버지의 차림새나 스타일은 1950년대생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아버지나 아버지의 친구들의 모습을 봐선 1960년대에서 70년대에 걸친 히피 컬처의 수혜자들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또 젊은 시절의 아버지가 어린 건성을 두고 잡혀 갈 때의 패션은 누가 봐도 1970년대 풍입니다. 80년대의 로커라면 좀 더 머리가 길었어야죠.
어쨌든 아버지는 미국 영화에 가끔 등장하는, '젊어서 히피 시절을 보낸 철없는 중년' 캐릭터를 닮았습니다. 나이도 먹고 자식이 있지만 여전히 낙천적이고, 책임감도 전혀 없습니다. 당장 하루 하루를 즐기는게 최선인 사람입니다.
반면 아들 건성은 비록 아버지의 영향으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타워팰리스에 살아 보겠다'는 야심도 갖고 있죠. 또 한편으로는 아버지에 대한 반발로 절대 '약쟁이'가 되어 교도소에 들락거리지는 않겠다는 올곧은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건성은 출소한 아버지를 위해 두부를 준비해가며 맞이하지만 아버지는 두부의 유효기간이 지났다며 투덜대는, 사이가 괜찮아 보이지만 결국은 언젠가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그런 사이입니다.
한번 상상해보시죠. 한국에서 '길들여질 수 없는 로커' 스타일의 노장들이 누가 있을지. 일단 한대수가 떠오르고, 전인권이 뒤이어 떠오릅니다.
지금은 여배우 아무개양 때문에서 스타일도 좀 구겼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전인권은 대마초 피울 만큼 피우더라도 노래하게 안 잡아갔으면 좋겠다"는 골수 팬들이 즐비했습니다. 한번 이런 분들이 10대 아들과 한 집에서 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보시죠. 그게 바로 이 영화의 출발점입니다.
이 관계의 긴장을 바짝 당기는 것이 마리 역의 유인영입니다. 갑작스레 나타난 미모의 미혼모 여고생. 사실 이 부분에서 이 영화의 리얼리티는 심하게 떨어집니다.^^ 아무리 집에 먹을 게 없다 한들 혈기방장한 고교생이 비슷한 또래의 유인영을 보고 눈에 하트가 그려지지 않는다든가, 함부로 내쫓으려고 한다든가 하는 건 말이 안 되죠. 아무튼 이 영화에서 '아무 생각 없는 천사' 역을 맡은 유인영은 한껏 매력을 뿜어냅니다.
물론 염두에 두어야 할 건 이 영화가 2년 전에 이미 완성된 작품이라는 겁니다. 2년 전에는 거의 경력 없는 신인이던 유인영도 이제는 일일드라마를 통해 어느 정도 알려진 얼굴이 됐죠.
그런데 현재의 모습에 비해 이 영화에서의 모습이 훨씬 자연스럽고 생기있어 보입니다. 신인 연기자에게 연출자의 애정이나 정확한 디렉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기회이기도 하죠.
김흥수도 이 역할에서 자기 몫을 다 합니다. 꽃미남이라고 부르긴 살짝 간지럽지만 연기력 면에선 이제 인정해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 특히 세 차례나 나오는 익스트림 클로즈업을 버텨내는 건 장하다고 등을 두드려주고 싶더군요.
다만 김흥수가 지금까지 인정받았던 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와 이 영화에 이르기까지 너무 이미지가 하나로 굳어지는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있습니다.
약간 얼띤 친구 역으로 나오는 이기찬도 칭찬할 만 합니다.
아쉬움이 있다면 김상중 쪽입니다. 뭘 해도 좋고 즐거운, 철없는 중년의 록스타라는 생소한 캐릭터를 맡고 보면, 스스로 인물을 창조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긴 했을 겁니다. 하지만 평생 남의 절제를 받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 과연 그렇게 허허 웃는 무골호인이기만 했을까 하는 데에는 의문이 갑니다. 대본 단계에서의 문제일 지도 모르지만 어느 정도는 '더러운 성질'이 드러나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김상중과 김흥수의 진짜 노력은 이 영화에 나오는 연주와 노래를 모두 직접 했다는 점입니다. 특히 김상중의 기타 연주와 노래는 프로 수준이라고 불러 아쉬움이 없습니다. 그가 이 역할을 맡아야만 하는 진짜 이유는 이쪽에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경쾌하고 발랄한 초반에 비해 후반이 어이없이 신파로 흘러간다는 주장도 있지만, 영화 전체의 흐름 속에서 볼 때 후반이 처진다거나 하는 느낌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결말도,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이미 필연적으로 이런 결말이 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는 정도로 복선이 깔려 있죠. 전혀 생뚱맞지 않습니다.
이 영화를 재미있게 느끼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관객이 갖고 있는 마음의 여유와 관용에 달려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일단 모든 장점과 단점을 막론하고 "대마초 피우는 놈들은 모조리 갖다 쳐 넣어야 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이 영화에 대한 애정이나 재미는 전혀 느낄 수 없을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이 영화가 적극적으로 대마초 옹호론을 펴고 있는 건 아니지만, 어느 정도 대마초가 상징하는 문화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갖고 있는 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무영 감독은 "대마초 허용을 주장하는 영화냐"는 질문을 상당히 두려워하는 것 같긴 합니다만, 취재진의 이어지는 질문에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허용해도 좋지 않겠느냐"는 입장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대마초는 사람에게 환각을 제공하지만 중독성은 없다는 것(물론 심리적 의존성은 크겠지만)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담배나 술보다 건강에 미치는 해악도 적다고 하죠. 물론 대마초 반대자들의 주장도 팽팽합니다. 대마초는 가끔 '마약 입문 과정'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대마초 자체가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반대자들도 인정하지만, 대마초 단계에서 막지 않으면 대마초를 통한 자극이 시들해진 마약 사용자들이 점점 더 상위단계의 '진짜 마약'에 손을 뻗게 되어 있다는 거죠. 아무튼 대한민국 현행법은 대마를 강력하게 통제하고 있습니다.
김상중이 대변하는 것은 대마초라는 약물 자체가 아니라 흔히 미국 사람들이 말하는 '좋았던 60년대', 즉 60년대에서 70년대에 걸쳐 턱없이 순진하고 낭만적인 이상주의가 세계(아무래도 특히 미국) 젊은이들의 머리 속을 점령했던 그 시절의 문화입니다.
머리에 꽃을 꽂고 온 세상 사람이 서로 사랑으로 소통하면 빈곤이나 전쟁, 종교 갈등과 같은 문제들은 저절로 해결될 수 있을 거라는 극도의 평화주의죠. 대마초로 붕 뜬 몽환적인 상태는 빈부의 격차도, 악착같은 물욕도,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모르는 군비 경쟁도 잊게 해 줄 거란 게 이 시기의 생각들입니다. 전설적인 우드스탁 페스티발이나 뮤지컬 '헤어' 등이 이 시기의 대표적인 문화적 산물들이죠.
아버지의 세대는 그런 문화를 동경했지만, 불행히도 당시의 한국은 그런 문화가 꽃필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습니다. 일단 먹고 살아 남는게 가장 시급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죠. 절대 빈곤 속에서는 온 세상이 이런 '착하지만 무기력한 베짱이들'에 대해 손가락질을 해댔고, 간신히 살아남은 아버지는 모든게 풍족해 그 시대의 어려움을 모르는 아들이 좀 야속하기도 합니다.
그런 아버지를 심정적으로는 이해하지만 이미 10대 후반에 현실은 거기서 멀리 떨어져 있음을 알게 된 아들. 그 아들에게는 낭만이나 이상 보다는 부잣집 아이들만 편애하는 학교의 현실에서 겪는 고통,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한심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더욱 큰 문제입니다. 하지만 그 아들이 아버지 못잖게 대책이 없는 마리 모자를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은 분명히 좀 지나친 낙관주의의 산물로 보이지만, 시위를 하면서 노래하고 춤을 출 수 있는 21세기에는 오히려 이런 동화가 더 설득력이 있을 거란 생각도 듭니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는 수백만 수천만의 사람들이 모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울 작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리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분명한 자기 색깔을 갖고 있는 영화를 바라는 분, 지루하거나 눈물 짜는 영화는 딱 질색인 분들이 보시면 충분히 영화의 박자에 몸을 실을 수 있는 그런 작품입니다. 가끔 "이런 얘기는 TV 단막극으로도 충분하지 않아?" 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소재를 어떻게 TV에서 다뤄!"라고 반문할 수 있는 영화니까요.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만족스러웠습니다.
p.s.1. 그동안 이무영 감독의 유머는 '보는 사람을 뻘쭘하게 하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푸하하 웃게 되지만 막상 그 바로 옆에서는 웃는 사람을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는, 그런게 바로 '그분의 유머'였죠. 전작 '휴머니스트'나 이감독이 대본에 참여한 박찬욱 감독의 '복수는 나의 것'을 보신 분들이라면 충분히 이해하실 겁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보통 사람도 충분히 웃을 수 있는 개그 감각이 폭발합니다. 이게 아마 가장 큰 변화가 아니었나 싶군요. (감독 본인은 "나도 먹고 살아야지!"라는 입장입니다.)
p.s.2. 영화 속의 대마초는 모두 인조 화초입니다. 진짜 대마초를 갖다 찍으려 했는데 법적인 문제가 해결이 안 됐다는군요.
p.s.3. 이건 영화 보신 분들이라야 이해하시겠지만 - 과연 마리와 아기에게는 대체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요?
'뭘 좀 하다가 > 영화를 보다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원티드, 총을 든 무협지의 완성 (57) | 2008.06.29 |
---|---|
21, 카드카운팅은 천재만 되나? (30) | 2008.06.26 |
강철중, 과연 몇편까지 나올까? (25) | 2008.06.22 |
쿵푸팬더에 대해 궁금한 몇가지 것들 (2) | 2008.06.20 |
쿵푸팬더, 이것이 엔터테인먼트다 (2) | 2008.06.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