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개월간 가장 열심히 본 TV 프로그램은 단연 '팬텀싱어'였습니다.
이 프로그램의 제작진과 같은 회사를 다니고 있기 때문에 뭔가 좀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JTBC의 히트작 '히든싱어'를 만들었던 조승욱 CP에게 언젠가 "다음엔 뭘 할 거냐"고 물은 적이 있고, "한국의 일 디보 같은 팀을 만드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해볼까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전부입니다. 그 뒤로는 방송이 시작될 때까지 아무 사전 정보도 들은 게 없었습니다. (방송이 끝나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저 역시 그냥 시청자 중 한 사람의 입장일 뿐입니다.)
아무튼 첫 방송. 다소 싱겁게 시작했습니다. 무슨 거창한 세레모니도, 의미 부여도 없이 곧바로 출연자들이 한 사람 한 사람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그 노래의 수준이 지금까지 수없이 보아 왔던 오디션 프로그램 출연자들과는 한 차원 다른 것이었다는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개인 오디션을 지나가 2인 오디션의 시기가 왔습니다. 그리고 이 노래를 듣게 됐습니다.
'퀴도베리마레루치!'로 시작하는 이 노래(알고 보니 Qui dove il mare luccica... 입니다^^)의 도입부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노래 자체도 유명하지만 엄청나게 많은 예능/코미디 프로그램에서 패러디로도 활용된 덕분일 겁니다. 아무튼 루치오 달라의 노래보다 파바로티가 불러 훨씬 더 유명해진 이 노래, 이 노래가 한국에서 임자를 만난 느낌입니다.
아울러 '히든싱어'의 스타였던 - 혹시 아직도 모르는 분이 있다면 김경호의 모창자로 나와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던 - 원킬 곽동현의 화려한 변신이 빛났습니다. 이 노래 한 곡으로 곽동현은 '팬텀싱어' 최고의 흥행 카드 중 하나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물론 이 노래에서 산왕고 역할을 했던 테너 이동신 역시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은 이후의 '팬텀싱어'를 통해 밝혀집니다. 대하드라마 팬텀싱어의 시작을 알리는 한편이었습니다.
한쪽에서 피를 튀기는 혈투가 벌어지고 있는 사이, 다른 한 쪽에서는 꿀성대의 대결이 펼쳐집니다. 리리코 테너의 모범 같은 김현수의 목소리가 손태진을 만나면서 촉촉하고 부드러운 최강의 하모니가 만들어집니다. 강렬함과 달콤함, 치열함과 섬세함 중 어느 쪽이 더 청중을 사로잡느냐. '팬텀싱어' 시즌 1의 주제(아마도 앞으로도 계속될)가 만들어지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이 노래를 통해 손태진은 시즌1의 베이스/바리톤 주자들 중 스타성으로는 최강임을 굳히고 갑니다.
사실 음악적으로는 큰 임팩트가 없던 무대일 수도 있습니다. 이 노래를 부른 프레디 머큐리나 엘튼 존이 워낙 뛰어난 퍼포먼스를 보인 탓에, 너무나 잘 알려진 원곡에 두 사람이 별로 보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노래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은 장차 한국을 대표하게 될 뮤지컬계의 두 젊은 스타, 고은성과 고훈정의 에너지 대결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즌1에 등장한 여러 뮤지컬 스타들 가운데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마지막까지 갈 수 있을 거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뮤지컬 배우로서 최고의 자질을 갖고 있다는 확신도.
사실 프로그램 초반에 몇몇 출연자들은 '한글 노래' 때문에 불이익을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프로그램이 추구하는 노래의 스타일 자체가 근본적으로 한글 가사와 맞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많은 경우 '한글 가사'의 문제는 번역 가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뮤지컬이라는 서구 문물이 수입될 때 한글화는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집니다(한때는 국내에서 공연되던 오페라들도 모두 한글 가사로 불린 적이 있었죠). 하지만 어떤 노래는 훌륭한 작사가를 만나 대단한 성원을 얻는 반면 - '지금 이 순간'의 가사는 영문 원곡 가사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 어떤 노래들은 원곡의 아름다움에 오히려 폐를 끼치곤 합니다. 이 영향은 생각보다 큰 편이어서, 처음에 한국어 가사로 접했던 노래를 영어 원 가사로 들은 다음 "아, 이 노래가 이렇게 좋은 노래였어?"하고 깜짝 놀라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물론 '팬텀싱어' 출연자 중 대부분이 추구하는 보컬의 스타일에 최적화(?)된 언어가 이탈리아어라는 것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조쉬 그로번이나 일 디보가 굳이 영어로 가사가 붙어 있는 노래들에 이탈리아어 가사를 붙여 부를 때에는 괜히 그러는 건 절대 아니겠지요.
하지만 처음부터 한국인에 의해 만들어지고, 그 곡을 고려해 한글 가사가 붙어 있는 노래들의 경우에는 처음에 언급했던 어색함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팬텀싱어'에서도 불려졌던 윤종신의 '배웅'이나 조용필의 '슬픈 베아트리체' 같은 경우들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이 프로그램에 등장했던 한국어 가사 노래들 중 압권은 이 노래였다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팬텀싱어'에서 펼쳐졌던 공연들 가운데 '감동'이라는 차원에서 평하자면 이 무대를 넘어 설 공연은 없었습니다.
아울러 '팬텀싱어' 시즌2가 만들어진다면, '한국어 가사로 된 노래'에 대한 적극적인 배려가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준결승, 결승을 거치며 너무나 이탈리아어 가사에 대한 출연진의 편애(?)가 좀 거슬리기도 했기 때문에...
이번 '팬텀싱어'에서 가장 이색적인 무기는 곽동현과 이준환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특히 곽동현은 강력한 고음을 무기로 하고 있어 눈길을 끌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지간한 테너의 최고음보다 더 위의 음역에서 소름끼치는 샤우팅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레제로 테너의 현역 최고봉인 후안 도밍고 플로레스나 일 디보의 멤버들 중 미국 출신 데이비드 밀러 같은 고공 플레이어들의 역할인 셈이죠. 혹자는 스티브 발사모와 비교하기도 합니다만 4인조 중창 팀이라고 가정하면 데이비드 밀러의 역할 쪽이 더 실용적입니다.
즉 다른 팀이 테너 2인을 동원해 소리를 쌓는다고 할 때 곽동현을 동원하면 베이스에서 곽동현까지 4층의 음역을 구축하고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강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막상 이 무기를 쥐었을 때, 각 팀이 어떻게 활용할지가 개인적으로는 가장 큰 흥미로운 관전 포인트였습니다.
그런데 가장 본래의 목적(?)에 맞게 활용한 것이 이 다음에 들을 'I Surrender'였다면, 이 'Halo'는 '팬텀싱어' 시즌1 전체 무대 중에서 가장 이색적인 무대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역 뿐만 아니라 소리의 종류에서도 매우 이질적인 네 명의 보컬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던 무대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팬텀싱어' 시즌1이 배출해 낸 가장 유니크한 무대는 바로 이 곡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아울러 이런 조합을 리드한 손태진의 능력치도 다시 보게 만든 곡입니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개인적으로 가장 듣고 싶었던 무대는 이런 무대였습니다. 박상돈에서 시작해 백인태-유슬기라는 탄탄한 좌, 우 날개가 크로스를 올리고, 이걸 고공폭격기 곽동현이 찍어내리는 4인 체제의 무대, 바로 이런 것이 4인조 남성 보컬 팀이 구사할 수 있는 가장 드라마틱하고 강렬한 무대가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실력으로 보나, 구성으로 보나, 이 네 명의 조합은 상업적으로도 완성도가 뛰어납니다. 그냥 이 모습 그대로 나가 4인조로 음반을 내고 활동하는 데 가장 무리가 없을 것 같은 팀입니다.
그런데 이 노래를 들은 김문정 심사위원은 "너무 쉬운 길을 갔다"고 했습니다. 충분히 이해할 만한 대답입니다. 이 네 명의 남자들이 팀을 꾸렸을 때 가장 쉽게 상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I Surrender 같은 무대이기 때문입니다. 백인태-유슬기-곽동현이 3단 고음을 뿜어내며 청중의 정수리를 찍어내릴 때 헉 하지 않을 수 있는 청중은 별로 없겠죠.
그런데 어쩌면 이런 똑같은 패턴을 지나치게 끝까지 고집한 것이 이 '인기현상'팀이 2위에 머문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약간의 스타일 변화나 강-온을 오가는 변화구가 필요했을 지도 모를 시점에, 그냥 '우리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상대방이 납득할 때까지 정면 돌파하겠다'는, 지나치게 우직한 면모를 보인 것이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최고의 팀이라고 생각했던 인기현상이 2위에 머문 게 심히 아쉽습니다. 일 디보가 부른 I believe in You 같은 무대를 실현할 수 있는 팀은 이번 '팬텀싱어' 시즌1의 팀들 가운데선 인기현상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노래는 본래 셀린 디온과 일 디보가 같이 부른 것이 원곡입니다만, 모든 공연에 셀린 디온이 동행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일 디보 멤버들 끼리만 부른 버전도 많이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전혀 무리가 없게 하는 것이 바로 앞서 언급한 멤버 데이비드 밀러의 위력입니다. 아마 들어 보시면 무슨 뜻인지 바로 아실 듯.
네. 드디어 우승팀의 무대입니다. 개인적인 취향이 인기현상 쪽이었다는 것이지, 이 팀의 퍼포먼스가 가진 아릉다움은 감히 부정할 수 없습니다. 앞서 대결을 펼쳤던 김현수와 손태진은 부드러움으로, 고훈정과 이벼리는 약간의 드라마틱한 음색으로 균형을 맞췄습니다. 그렇게 해서 전체적으로는 로맨틱하면서도 장대한 원곡의 이상을 제대로 실현시켰습니다.
좋은 팀이란 노래 실력만으로 완성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선곡과 파트 배정, 그렇게 해서 팀을 이끌어 가는 리더의 역량이 매우 중요할 것이 당연한데, 이 팀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손태진과 고훈정이라는 두 명의 훌륭한 팀 플레이어가 소리나지 않게 빛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감히 말하면 마르첼로 알바레스와 이미 고인이 된 살바토레 리치트라, 21세기 초반 최고 테너를 거론하면 빠지지 않고 꼽히던 두 사람의 노래보다 포르테 디 콰트로의 무대가 완성도 면에서는 더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무튼 이런 수준의 경연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어디까지 제작진의 의욕과 추진력 덕분입니다. 다만 마지막 순간, 최고의 무대가 펼쳐져야 했을 최종 생방송 무대에서 현장음을 방송으로 걸러 내는 과정이 다소 불완전했던 것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제작진의 경험 부족을 탓하기 전에, 국내 방송에서 한번이라도 생방송으로 이런 무대가 펼쳐진 일이 있었나 생각해 보면, 약간의 부실함은 첫 길을 가는 사람이 감내해야 할 시련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부분적인 아쉬움이 쌓여 제2, 제3의 팬텀 싱어 때에는 누가 또 시즌1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무대들을 만들어 낼 지, 벌써부터 가슴이 설렙니다. 지난 3개월 동안, '팬텀싱어' 덕분에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시즌2가 나오긴 나오는 거겠죠? 마지막에 COMING SOON 이라는 자막이 나왔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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