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종영한 드라마 '천명'은 마지막에 악인 문정왕후가 참회하고 인종이 왕으로서의 귄위를 회복하는 해피엔딩을 맞았습니다.
뭐 드라마야 시청자들이 행복한 결말에 만족했다면 그걸로 끝이겠습니다. 사실 사극이건 현대물이건, 실제 사건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만들어질 때 반드시 현실 그대로 끝을 내야 하는 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천명'이 다루고 있는 공간은 실제 역사에서는 그냥 도입부 정도라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인 듯 합니다. 드라마는 문정왕후의 뉘우침으로 마무리됐지만, 진정한 '문정왕후의 시대'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셈이기 때문입니다.
문정왕후 윤씨(1501.10.22~1565.4.6, 음력)
조선 중종의 두 번째 아내이자 명종의 어머니. 조선 왕조를 통틀어 손꼽히는 독부(毒婦)로 꼽힌다. 그가 죽은 날 조선왕조실록에는 ‘서경에 이르기를 암탉이 새벽에 울면 집안이 망한다 했으니, 바로 윤씨 같은 이를 가리킨 것이다(牝雞之晨, 惟家之索, 尹氏之謂也)’라는 극언이 등장한다. 물론 생전에는 감히 아무도 할 수 없었던 말이다.
중종의 첫 왕비(엄밀히 말하면 왕위에 오르기 전 진성대군일 때 혼인을 한 적이 있으니 아내로는 '두번째 아내'입니다) 장경왕후가 1515년 세자 호(峼, 뒷날의 인종)를 낳고 죽은지 2년 뒤, 문정왕후 윤씨는 만 16세의 나이로 왕비의 자리에 오른다. 당시 궁의 최강자는 중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던 경빈 박씨. 출생 연대는 분명치 않지만 흥청(興淸, 연산군이 즐기기 위해 선발한 미녀들) 출신이라는 점, 1509년 아들 복성군을 낳았다는 점 등으로 미뤄 볼 때 윤씨보다 열 살은 연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2인자 희빈 홍씨도 아들을 다섯이나 낳을 정도로 총애가 두터웠다.
중종이 연산군을 내쫓고 왕위에 오른 것이 1506년. 이때 이미 경빈 박씨는 연산군이 고른 미녀들 중 하나였으니 대략 1500~1501년 전후에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물론 연산군의 승은을 입지는 않았으니 중종에게도 차례(?)가 돌아왔을텐데, 1517년 문정왕후가 간택을 통해 궁에 들어올 즈음 경빈 박씨는 이미 궁 생활 10년을 넘긴 마녀 중의 마녀가 되어 있었을 겁니다.
경빈을 지원하던 쪽은 남곤 심정 등 훈구파의 구신들. 또 희빈 홍씨도 홍경주의 딸이었으니 아무리 문정왕후가 명문 파평윤씨가의 딸이라 해도 상대들이 그리 만만치 않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중종은 경빈을 아예 계비로 삼으려 했으나 조정 대신들이 미천한 집안 출신이라며 격렬하게 반대해 뜻을 접었다. 세자만 없다면 복성군이 왕위에 오른다 해도 놀랍지 않을 상황이었다.
문정왕후의 최선책은 아들을 낳는 것이었지만 그건 인력으로 어쩔 수 없는 일. 1521년 의혜공주부터 딸만 내리 셋을 낳았다. 살기 위해선 ‘내가 세자의 어머니’라고 주장하며 경빈 세력과 맞서야 했다. 이 파란의 시기를 그린 작품이 월탄 박종화 대하소설 ‘여인천하’다. 2001년 SBS TV에서 장장 150회에 걸쳐 방송되며 공전의 인기를 누린 사극 ‘여인천하’의 원작이다.
당시 ‘여인천하’를 열심히 본 시청자들에겐 요즘 KBS 2TV ‘천명’의 문정왕후(박지영)가 영 낯설다. ‘여인천하’의 문정왕후(전인화)는 악녀 경빈(도지원)의 세력으로부터 어린 세자를 보호하는 지혜롭고 따뜻한 여인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명’에서는 그 문정왕후가 인종(바로 그 세자)을 죽이지 못해 안달이다. 좀 이상하지만 둘 다 실제 문정왕후의 모습이다.
1527년, 이른바 ‘작서(灼鼠)의 변’으로 경빈이 몰락한다. 누군가 세자의 생일에 맞춰 불에 지진 쥐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놓은 사건이다. 당연히 경빈 모자가 범인으로 지목돼 귀양길에 오른다.
중종은 어떻게든 복성군만은 살려 보려 했으나 윤임, 김안로 등 세자 보위 세력과 문정왕후의 동맹군은 집요했다. 6년 뒤인 1533년, 사약이 내려졌다. 사실 경빈이 주범이라는 확증은 없었다. 오히려 이종익 같은 이는 “김안로의 아들 김희의 짓”이라고 상소를 올리기도 했던 만큼 자작극일 가능성도 충분했다.
'여인천하' 방송 당시 장안의 화제였던 천재 소년 세자 역의 아역 스타 권오민. 이 친구에 대해서도 전에 뭔가 쓴 적이 있습니다. 1997년생. 한창 폭풍의 나날을 보내고 있겠군요.
아역스타, 그 성장의 위기 http://fivecard.joins.com/121
물론 권오민 군이 위기라는 뜻은 아닙니다.^^
1534년, 문정왕후가 마침내 아들 경원대군(뒷날의 명종)을 낳으며 동맹이 깨졌다. 세자는 더 이상 ‘내 아들’이 아니었다. 1543년에는 동궁 처소에 원인 모를 화재가 일어나 세자 부부가 죽을 뻔 했으나 유야무야 됐다.
결국 1544년,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보위에 오르지만 즉위 8개월만에 사망한다. 문정왕후에 의한 독살설이 파다한 가운데 열한살의 명종이 왕위를 이었다.
그러니까 드라마와 역사가 갈리는 부분이 바로 이 지점입니다. 드라마 '천명'에선 '모든것이 정리되고 다들 행복하게 살았어요'라는 식의 마무리가 있었지만, 인종이 왕위에 머문 기간은 다 합해 8개월 뿐이기 때문입니다.
최원(이동욱)이 "밖에서 잘 살겠습니다"라고 했지만, 과연 인종이 죽고 문정왕후가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뒤 그가 잘 살 수 있었을까요.^^
'여인천하' 보시던 분들에겐 참 아쉬운 일이지만 바로 이 대목에서 이런 현명하고 냉철한 전인화 문정왕후는 사라지고,
아들과 윤씨 일족, 그것도 윤원형 일족의 안녕을 위해 모든 장애물을 몸소 제거하기로 마음 먹은 독한 박지영 문정왕후의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당시 권력 주변엔 윤씨 외척이 너무 많았다. 세조비 정희왕후, 중종의 어머니 정현왕후, 중종의 정궁인 장경왕후와 문정왕후가 모두 파평 윤씨였기 때문이다. 대동단결했다면 조선말의 안동 김씨가 부럽지 않았겠지만 윤씨들은 내부 경쟁을 선택했다. 특히 인종의 외숙 윤임을 중심으로 한 대윤(大尹)과 명종의 외숙 윤원형의 소윤(小尹)은 마침내 명종 1년(1545) 을사사화로 충돌, 수백명의 피를 흘렸다. 여기서 승리한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묵인 아래 친형인 윤원로까지 죽이고 권력을 독점했다.
문정왕후가 사관들에게 치열한 공격을 받은 것은 불교를 숭상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그보다는 윤원형의 독재를 비호한 잘못이 가장 컸다. 명종도 윤원형을 견제하려 했으나 어머니가 “네가 누구 덕에 왕이 됐는지 아느냐”고 윽박지르는 데에는 당할 수가 없었다.
20년 세도 끝에 문정왕후가 세상을 뜨자(1565) 곧바로 윤원형을 처단하라는 상소가 쏟아졌고, 궁지에 몰린 윤원형도 자결했다. 그의 부패와 만행이 얼마나 심했는지 실록은 “오래도록 천벌을 면하다가 마침내 죽으니 조야가 모두 기쁘게 여겼다. (중략) 극형을 받지 않고 스스로 죽은 것이 안타깝다”고 했을 정도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거론할 때 빠질 수 없는 사람이 정난정(위 사진은 '여인천하' 때의 윤원형-정난정 커플)입니다. 천민 출신으로 윤원형의 소실이었던 난정은 문정왕후의 인정을 받으며 마침내 윤원형의 정실이 되어 정경부인의 칭호를 허락받습니다. 대단한 신분 상승인 셈이죠.
하지만 뒤를 봐 주던 문정왕후가 죽자 윤원형의 만행을 조장했다는 이유로 황해도로 귀양가는 몸이 되었습니다. 다가올 미래를 예감한 정난정은 지니고 있던 독약으로 바로 목숨을 끊었고, 난정의 죽음을 안 윤원형 역시 통곡하다가 따라 자살했습니다.
(이런 사연을 보면 비록 악인들이라고는 하지만, 정난정에 대한 윤원형의 마음은 참 진실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 남매는 사후까지 악영향을 미쳤다. 다음 임금인 선조 때 사림은 심의겸의 서인과 김효원의 동인으로 갈라졌다. 동인은 심의겸이 외척(명종의 처남)이란 이유로, 서인은 김효원이 한때 윤원형의 식객이었다며 날을 세웠다. 서로 상대방을 ‘타락한 구세력의 잔재’로 규정하고 명분 싸움을 벌였으니, 당쟁의 기원이 바로 문정왕후의 정치적 유산이었던 셈이다.
윤원형은 본래 사림의 언관 출신이라 지식인들을 어떻게 억누르는지에 대한 노하우가 풍부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문관들의 인사권을 좌우하는 이조전랑직을 관리하면서 젊은 신진 관료들이 자신 앞에 스스로 줄을 서도록 한 것이죠. 유학 하는 선비로서 관직에 나가기 위해서는 윤원형에게 잘 보이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고 나니 윤원형의 시대를 정리한 뒤에도 조정에 윤원형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웠던 사람이 별로 남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조차도 윤원형의 세도가 시퍼렇던 시절에 벼슬을 하고 과거에 장원을 했다는 이유로 '세상에 아부했다'는 비판을 받았을 정도입니다.
윤원형도 죽고, 명종도 죽으면서 사림의 정치가 시작됐지만 이제 사림은 그 내부에서 파가 갈리며 권력 독점을 위해 경쟁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상대편을 비방하기 위한 가장 좋은 도구는 바로 '윤원형의 개' 혹은 '구시대의 잔류'라는 것이 되죠.
P.S. ‘여인천하’나 ‘천명’ 만큼 중요한 역할은 아니지만 한류 드라마의 대표작 ‘대장금’에도 문정왕후가 등장했다. 박정숙이 연기한 이 문정왕후는 장금의 후원자로 그려졌으니 당연히 좋은 이미지.
실존인물인 의녀 장금은 ‘천명’에도 등장하는데, 이 장금(김미경)은 궁에서 홀몸으로 늙은 것으로 묘사된다. 그럼 민정호(지진희)와의 러브스토리는?
여담이지만 영화 '후궁'에서 박지영이 연기했던 대비 역시 문정왕후를 모델로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래도 그 이미지 때문에 '천명'에도 이어 출연하게 된 것으로 보이구요. 그런 의미에서 '후궁'에서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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