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옥정] 사실 장옥정이라는 이름이 널리 쓰이기 시작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조선 숙종 때의 유명한 희빈 장씨의 이름이 옥정이라는 것은 물론 새로운 일이 아니지만, 꽤 긴 시간 동안 이 여인은 그냥 '장희빈'이라는 이름으로 불려 왔습니다.
그리고 흔히 사람들은 조선 명종 때의 정난정, 연산군 때의 장녹수와 함께 '조선 3대 악녀'라는 이름으로 이 여인을 불러 왔습니다. 들으면 바로 아시겠지만 모두 TV 사극이 사랑해 온 여인들입니다. 이 뒤를 이어 광해군 때의 개시 김상궁, 인조 때의 소용 조씨 등이 '3대 악녀'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인물들이죠.
하지만 이런 인물들에게도 다 이유가 있는 법. 특히 장희빈 장옥정의 경우는 역사적 환경을 살펴보면 볼수록 그냥 '악녀'로 불리기에는 억울한 부분이 꽤 있어 보입니다. 물론 이번에 시작하는 '장옥정, 사랑에 살다'는 이런 역사적 환경을 훌쩍 넘어서, 아예 새로운 판타지적 해석을 해 냅니다만...
어쨌든 장옥정이라는 여인의 삶을 한번 살펴 봤습니다. 그래도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자면 이런 구도입니다.
장희빈(1659?~1701)
사극이 시청률을 올리는 방법 중에 ‘사약 신’이 있다. 같은 사약이라도 남자보다는 여자가 먹고 피를 토하는 게 훨씬 강력한 효과를 발휘한다. 실제 사약의 성분상 피를 토하고 죽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아무튼 그렇다.
사약 신이라면 아무래도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씨와 장희빈을 떠올리게 된다. 폐비 윤씨의 경우엔 비단 섶에 피를 토하며(물론 기록엔 그냥 피눈물이다) “내 아들이 왕이 되면 이것을 전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강렬하다. 그리고 장희빈의 경우에는 ‘조선 왕조 최고의 독부’답게 약사발을 비운 뒤 그대로 쓰러지지 않고 한참 동안 몸부림을 치다가 죽음을 맞는 것이 보통이다. 장희빈을 연기한 수많은 여배우 중에서도 사약 신으로는 이미숙이 첫 손에 꼽힌다. 1981년 MBC TV 드라마 ‘여인열전’에서 돌계단을 구르며 신음하던 이미숙표 장희빈의 모습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이문정의 ‘수문록(隨聞錄)’ 에는 더 지독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야사에 따르면 장희빈은 죽기 전, 마지막으로 아들(뒷날의 경종)의 얼굴을 보기를 청한다. 허락을 받은 세자가 통곡을 하며 나타나자 장희빈은 “내가 너희의 후손을 이어 줄 줄 알았더냐!”하는 악담을 퍼부으며 최후의 기력을 다해 왕자의 사타구니를 강타하고(反出不忍說之惡言肆其毒手侵及下部), 세자는 혼절한다. 장희빈은 그제야 깔깔 웃으며 사약을 들이킨다. 경종의 후사가 없었던 탓에 뒷날 만들어진 이야기일 가능성도 있지만, 이런 이야기가 널리 퍼졌다는 것만으로도 당시 사람들이 장희빈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충분히 알 수 있다.
(사진을 구할 수 없어 '동이'에서 이소연의 사약 신으로 대체했지만 당시 이미숙의 사약 연기는 그야말로 장안의 화제였습니다. 댓돌 위로 오르락 내리락 하는 단말마의 모습... 아무튼 '수문록'의 기록에 따르면 어머니가 아들을 성불구로 만들었다는 말인데, 사실이라면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악의 경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튼 경종은 병약했고, 후사를 두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숙빈 최씨-'동이'-가 낳은 연잉군이 왕위에 올라 영조가 되죠.)
1990년대 이전까지 장희빈에 대한 영화나 드라마는 이런 세평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정숙하고 현명한 인현왕후 민씨와 아름다운 악녀 희빈 장씨가 숙종을 놓고 삼각관계를 펼치고, 장희빈에게 빠진 숙종이 한때 총기를 잃어 어진 아내와 충신들을 멀리 하지만, 결국엔 제 정신을 차리고 악인들을 단죄한다는 교훈담이다. 이른바 김만중의 ‘사씨남정기’나 고대 소설 ‘인현왕후전’의 충실한 재현이다. 당연히 장희빈 역은 당대의 섹시 아이콘들이 돌아가며 맡았고, 인현왕후 역에는 청순미 넘치는 전통적인 미인들이 들어섰다. 팀 장희빈의 김지미 남정임 윤여정 정선경 김혜수 등과 팀 인현왕후의 이혜숙 박순애 박선영 박하선 등을 보면 그 특징이 확연하다.
하지만 김혜수가 타이틀 롤을 맡은 2003년작 ‘장희빈(KBS)’ 이후 장옥정을 당쟁의 희생자로 보는 시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장희빈 이전의 여자 ‘장옥정’은 여러 모로 역사적 의미를 갖는 인물이다. 중인 가문의 딸로 태어나 일개 궁녀에서 출발해 왕의 정실인 왕비의 자리에 오른 사람은 그 하나뿐이다. 비록 다시 희빈으로 강등된 뒤 사약을 받아 끝내 ‘장희빈’이란 이름으로 기억되지만 말이다.
일단 숙종 시대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해가 필수다. 남인과 서인의 대립이 치열했던 시기. 장옥정의 아버지인 역관 장경은 일찍 세상을 떠나지만 역시 역관 출신인 백부 장현은 당대 조선 최고의 갑부였다. 당시 역관들은 사신단의 일원으로 허가받은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할 수 있었고, 특히 장현은 소현세자와 효종이 청에 인질로 갔을 때 호종한 공로로 위세도 등등했다.
그런 장현이 남인 세력의 재정적 후원자였으니 장옥정 또한 남인과 운명을 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인현왕후 민씨는 그야말로 노론 핵심 가문의 딸이었다. 큰아버지 민정중과 아버지 민유중은 당대 서인의 영수였고, 친정 오빠들인 민진후, 진원 형제 역시 당쟁을 주도했던 인물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만만찮은 왕, 숙종이 있다. 1674년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숙종은 세 차례의 환국(換局)을 통해 왕권을 강화했다. 초기에는 남인이 다소 우세했지만 집권 6년째인 19세 때 경신환국(1680)으로 서인에게 권력을 넘겼고, 28세때엔 다시 기사환국(1689)으로 남인들의 세상이 왔다. 그리고 33세 때, 갑술환국(1694)으로 다시 서인들이 집권하게 된다.
이렇게 신하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사이 숙종은 할아버지 효종의 고굉지신(股肱之臣)이며 송자(宋子)라고 불릴 정도로 서인들의 추앙을 받던 송시열에게까지 사약을 내리는 냉혹함을 보였다. 숙종 이후 어떤 왕도 이 정도로 강대한 권력을 갖지는 못했다. 아무리 봐도 여색에 혹해 정치적 오판을 할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그런 숙종이었기에 인현왕후를 내치고 장옥정을 중전으로 삼은 것이나(남인의 손을 들어 줌), 다시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장옥정에게 사약을 내린 것(서인의 손을 들어 줌) 모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에겐 사랑도 정치의 연장선상이었던 것이 아닐까. 이런 삭막한 이야기를 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을 듯 하니 김태희가 제9대 장희빈으로 나서는 SBS TV ‘장옥정, 사랑에 살다’는 패션에 뛰어났던 궁녀 장옥정과 청년 왕 숙종의 낭만적인 사랑 이야기를 그려낸다고 한다. 그렇다면 장옥정의 죽음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궁금하다. (끝)
** 뒤늦게 보게 된 시놉시스에 따르면 '사랑하는 여인을 권력을 위해 결국 죽음으로 밀어 넣는 비운의 왕'으로 그려진다는군요. 그럴듯합니다.^^
이렇습니다. 벙자호란 이후 조선 정치사를 살펴보면, 그중 가장 강력한 왕권을 발휘한 왕은 성군으로 알려진 영조나 정조가 아니라 숙종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영/정조 시대만 해도 신하들의 세력을 무시한 왕정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던 반면 숙종은 당쟁을 이용해 어느 한 파벌도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하게 왕권을 구축하는 노련함을 과시합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정치적 격변에 따라 후궁이 요동을 칩니다. 결과적으로 숙종이 서인들의 손을 들었기에 장희빈은 악역, 인현왕후는 선인 역을 맡게 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당시 남인에게 최종 우승기가 돌아갔다면 우리는 또 다른 사극을 보고 있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대중 일반에게 전해진 장희빈 이야기는 사실 역사의 승자였던 인현왕후의 친정 쪽, 즉 서인 쪽(그중에서도 노론)의 입장에서 다분히 강조된 이야기일 가능성이 꽤 높아 보입니다.
어쨌든 장옥정이 그렇게 악인이 아니었다고 해도, 드라마 '장옥정, 사랑에 살다'의 스토리는 역사적인 배경과는 꽤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물론 이 드라마는 아예 시작부터 팩션이고, 판타지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역사적인 무게는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아예 종류가 다른 이야기니까요.
그러니 이 드라마에서는 전통적인 사극의 인기 캐릭터인 악녀의 모습을 보기 쉽지 않을 듯 합니다. 시놉시스상으로는 한승연이 연기하는 최무수리(숙빈 최씨, 즉 '동이'의 한효주)가 오히려 악녀로 묘사될 것 같기도 한데, 어찌 될 지는 두고 볼 일.
아울러 김태희가 이번 작품을 통해 그동안 수없이 약점으로 지목됐던 연기력 논란을 떨쳐 버릴 수 있을지. 그 또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혹시 악녀 캐릭터가 아쉬운 분은 주말드라마 '궁중잔혹사-꽃들의 전쟁' 쪽을 보시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인조 때의 요부 소용 조씨(사실 궁녀로는 귀인의 자리까지 올라갑니다만, 이상하게도 소용 조씨로 불리는 경우가 더 많은 듯 합니다) 역을 맡은 김현주의 연기가 한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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