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라고 되어 있는 것은 아시다시피 한 편으로 끝나지 않는 시리즈 영상물을 말합니다. 요즘 TV는 그냥 단말기일 뿐, 네트워크의 기능을 거의 상실해가고 있기 때문에 연속극이냐, 8부작이냐, 30부작이냐, 매주 연속공개냐, 한방에 다 공개냐 따위의 다양한 형태로 제공되는 시리즈를 그냥 '드라마'라고 부르기로 합니다.
이제 영화와 드라마의 차이는 3시간 이내의 단편이냐, 아니면 1시간~1시간30분 이내를 한 편으로 하고 내용의 동일성이 유지되는, 대략 3편 이상의 시리즈이냐 정도로밖에 구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국 네트워크의 대표적인 특징인 '16부작 미니시리즈', 일본 드라마의 특징인 '연 4분기에 따라 공개되는 10~11부작', 미국 드라마의 특징인 '인물과 배경을 유지하고 시즌1이 성공하면 무한시즌 연속제작' 등이 다 OTT라는 거대한 늪에서 뒤섞이는 분위기라고나 할까요.
늘 그렇듯 '볼게 없어....'하다가 연말이 되면 '아, 올해도 꽤 많이 봤구나' 하게 되는 드라마 결산.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숫자는 아무 의미 없습니다. 그냥 갯수를 세기 위한 도구일 뿐. 그리고 2022년이라는 것은 제가 해당 드라마를 본 게 2022년이라는 것이지 이 드라마들이 모두 2022년작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1.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자폐스펙트럼을 가진 변호사 우영우(그러나 서울대 로스쿨 수석 졸업에 빛나는)가 현실 법조계에 뛰어들어 다양한 사건을 자신만의 독특한 관점으로 풀어나가는 이야기. 단언컨대 한국에서 지금까지 나온 장애에 대한 드라마 가운데 가장 유니크한 시선을 보여준 작품. 물론 '실제 장애인들에 비해 너무나 뛰어난' 우영우가 오히려 장애인에 대한 다른 편견을 일으킨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원래 드라마란 매우 특이한 인물들을 보여주는 장르라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 비판이라고 생각합니다.
P.S. 한 법조인은 "지금까지 본 한국 법정 드라마 중에서 가장 재판 장면이 리얼하다"고 평가하기도.
2. 재벌집 막내아들
최초는 아니지만 한국 드라마의 세계에 본격적인 회빙환(회귀,빙의,환생)의 장을 연 드라마로 기록될 역사적인 작품. 평생 재벌 그룹에서 일했다기보다 재벌 일가의 집사처럼 일했던 한 직장인이, 심각한 배신을 경험한 뒤 그 일가의 잊혀진 막내로 빙의, 거대한 성공과 복수의 인생 2회차를 살아가는 이야기. 도준이가 대체 언제 비트코인을 사나 궁금했는데...
1회와 16회 vs 나머지 2~15회를 별도의 작품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등의 온갖 이야기가 쏟아졌지만, 이런 논란이 생산적인 논의로 이어지려면, 과연 21세기 한국의 시청자들이 '정말 보고 싶어 하는' 이야기와 작가가 시청자들에게 '들려 주고 싶었던' 이야기 사이에는 어떤 간극이 있었는가, 그리고 그 차이는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한 논의로 이어져야 했을텐데, 그렇지 못한 한국의 드라마 평단(?)이 좀 답답했습니다.
3. 나의 해방일지
<재벌집 막내아들>이 '지분'을 남겼다면 이 드라마는 '추앙'을 남겼다고나 할까. 개인적으로 통학은 30분, 통근은 1시간 이상 걸리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삶을 살아온 탓에 이 드라마의 깊은 상징성에 대해 뭐라 말할 처지는 못되고, 그저 2022년의 가장 달달했던 드라마 중 하나로 기억합니다. ("나 안 되는데." "왜?" "살쪄서" "한시간 내로 살 빼고 나와")
그리고 한편으로 이 드라마의 진정한 가치는, 21세기 초의 한국이라는 나라의 한 단면 - 인구의 50%가 '수도권'이란 곳에 모여 살고, 그 안에서도 안쪽에 사는 절반과 바깥쪽에 사는 절반이 어떤 다른 생각을 하고 살고 있었는지에 대해, 어떤 사회학 서적보다 훌륭한 이해를 가능해게 해 줬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을 듯 합니다.
4. 모닝쇼 (애플)
10년 이상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아침 프로그램 <모닝쇼>에서 어느날 남자 MC의 성희롱에 대한 고발이 발생하고, 그로 인해 방송국 사장, 이사, 담당 CP, PD, 그리고 혼자 남은 여성 MC(제니퍼 애니스톤)는 각자의 판단에 따라 치열한 눈치보기에 돌입합니다. 목적은 단 하나 '남들이야 어찌 되건 나에게는 그 불똥이 튀지 않도록'. 이런 생존을 위한 아귀다툼에 갑자기 등장한 시골 방송국의 무명 기자 리즈 위더스푼. 예측 불허의 다이내믹한 전개가 엄지를 절로 들게 하는 걸작.
....그러나 시즌2로 숫자가 바뀌는 순간, 거짓말처럼 드라마는 쓰레기로 바뀝니다. 주의.
5. 테드 라소 (애플)
별 성적을 내지 못하던 EPL 구단에서 어느날 미국 대학 농구 감독을 데려다 감독 자리에 앉힙니다. 미국인이 축구를 잘 알 리가...의 수준이 아니고, 오프 사이드 룰이 뭔지 설명하지 못하는 수준. 하지만 그는 타고난 친화력, 낙천성, 강한 의지로 팀을 벌떡 일으켜 세우고 온갖 난관을 돌파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위대한 미국인이니까!
드라마 전체가 하나의 농담이지만 매우 강력합니다. 그리고 감동적입니다. 최고.
6. 아파트 주민들이 수상해 (디즈니)
디즈니플러스를 탈탈 털어도 <만달로리안>과 이 <아파트 주민들이 수상해> 만한 작품은 다시 없다는게 제 생각. 뉴욕의 유서깊은 고급 아파트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어찌 어찌 하다가 엮인 세 주민은 힘을 합쳐 실시간으로 범죄를 추적하는 팟캐스트를 운영합니다. 한물 간 배우와 한물 간 브로드웨이 프로듀서, 그리고 신인 화가의 케미가 의외로 찰떡.
시즌2도 재미있습니다.
7. 페리패럴 (아마존)
한국에선 마이너 OTT에 불과하지만 세계 2위 OTT인 아마존은 사실 매우 강합니다. 비록 <더 보이즈> 같은 작품이 시즌2에서 쓰레기로 불타오르긴 했지만, 여전히 <페리페럴> 같은 걸작을 내놓고 있습니다. 클로이 모레츠가 드디어 성인 역할에서 제대로 한 작품을 뽑아냈다는 생각.
근미래. 흔한 미국 시골 마을에 병으로 눈이 멀어가는 어머니, 술이나 축내는 제대 군인 오빠와 살고 있는 클로이 모레츠는 알고 보면 보기 드문 게임 천재. 뭔가 실생활에서도 직업을 찾으려 하지만 실제 수입은 부자들의 게임 레벨 올려주기 알바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너무나 실감 넘치는 게임에서 뭔가 미션을 해결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옵니다. 와. 정말로 실제같은 게임. 그런데....
8. 업로드 (아마존)
사실 신작은 아니고, 몇해 전 시작을 했지만 사정에 의해 못 보게 되었다가 올해 다시 정주행한 작품입니다. 배경은 인간의 뇌를 하드 디스크에 저장해 육신의 생사와 무관하게 인간의 의식을 살아 있는 상태로 뇌에 저장할 수 있게 된 근미래 시대. 그렇게 해서 인간들은 죽음을 거부하고, 자아를 인간이 만든 메타버스 세계에 저장해 생전보다 훨씬 더 꿈같은, 그야말로 인간이 만들어 낸 천국에서 영생을 즐길 수 있게 됩니다.
바로 그 천국에 가게 된 남자 주인공이 겪는 이야기. 설정만 봐도 흥미진진!
9. 애나 만들기 (넷플릭스)
엄청난 물량에도 불구하고 넷플릭스의 올해 대다수 시리즈는 실망의 연속. 그러나 <애나 만들기>는 강추할만 합니다. 사기꾼이란 어떻게 행동하는가. 그리고 왜 사람들은 그 사기꾼에게 놀아나는가. 정확한 분석과 정교한 묘사. 이것은 다큐인가, 드라마인가(사실 넷플릭스에는 이 사건에 대한 다큐도 있고, 이 드라마에서 언급되는 파이어 아일랜드 페스티발에 대한 다큐도 있습니다. 후자 강추). 흥미진진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애나 아버지가 독일에서 어린 애나를 만나 레스토랑에서 페트루스를 주문하는 장면.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이 드라마를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0. 웬즈데이 (넷플릭스)
아담스 패밀리를 봤건 안 봤건, 좋아했건 안 좋아했건, 이 독특한 청소년 드라마에 빠져들지 않기는 쉽지 않을 듯. 이 드라마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담스 패밀리>보다 <해리 포터>를 예로 드는 것이 훨씬 좋을 듯 합니다. 한마디로 <어둠의 세계의 해리 포터>라고 해야 어울릴 듯한 작품. 캐서린 제타 존스의 모습이 좀 슬프긴 하지만, 드라마는 참 재미지죠.
아주 이상한 아담스 패밀리의 딸 웬즈데이가 집안 내력에 따라 기숙학교를 가는데, 그 기숙학교에는 뱀파이어, 인어, 늑대인간, 마법사 등이 드글드글. 한마디로 별 초능력 없는 웬즈데이가 평범해 보일 지경. 하지만 곧 모두들 알아차립니다. 과연 누가 제일 이상한 아이인지.
그리고 10대 드라마에는 꼽지 못했지만 올해의 기념할 만한 작품들로는:
* 수리남: 한 4.5회 분량으로만 줄였어도 10대 드라마에 당연히 꼽았을.
* 슈룹: 유니크해서 재미있었는데, 가짜 역사를 너무 진짜처럼 포장해서 살짝 마음에 안 든.
* 사내맞선 : 뭐라 욕해도 좋지만 한 장면 한 장면이 재미있었던.
아, 그리고 어디다 끼워 넣어야 할까.... 영화도 아니고, 드라마도 아니고, 했던 것 중 하나.
러브, 데스 + 로봇 시즌3의 마지막 편, <히바로 Jibaro>야말로 2022년을 대표하는 영상 작품 중 하나였죠. 알베르토 미엘고라는 이름을 기억하고 앞날을 기대하게 만든 엄청난 작품.
히바로 Jibaro, 21세기 인류 문명의 정수 (joins.com)
이렇게 2022년의 드라마들을 보내고, 이제 <더 글로리>를 열심히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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