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이 태곳적부터 있었던 거라고 쉽게 생각해버리곤 한다. 물론 조선시대에도 냉장고나 스마트폰을 사용했을 거라고 믿는 사람은 당연히 없겠지만 그보다는 좀 덜 선명한 요소들, 예를 들어 고려시대에도 솥뚜껑에 삼겹살을 구워 먹었을 거라든가, 조선시대에도 "역시 한우가 맛있네" 같은 말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흔히 볼 수 있다. 그런 분들은 <양식의 양식>을 보시길 권장한다.
2. 또 그 얘기냐고 하실 분들을 위해 신속하게 주제 전환. 오늘 얘기는 프로 스포츠의 기원에 대한 거다. 축구의 발상지 영국에서 FA컵이라는게 있는 시절이라면 당연히 밥먹고 축구만 하는 선수, 그러니까 프로 선수가 있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 19세기 말까지 오히려 '돈을 받고 축구하는 선수'가 있는 팀은 출전정지를 먹는 게 룰이었다.
3. 이유는 당연히 '스포츠맨십을 해치는 부도덕한 행위이기 때문'이라는 것. 스포츠란 건강과 여가를 위한 것이니 돈에 팔린 선수는 그 순수함을 해치는 존재라는 논리다. 직장인 야구적인 사고방식.
4. 이런 논리는 축구라는 스포츠가 어떻게 정립된 것인지를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아무렇게나 모이면 공을 차던 시절, 그러니까 축구나 팩차기나 별 차이 없던 시절에 이튼과 해로우 등 영국의 유명 보딩 스쿨 축구인들이 모여 공식 룰을 만들었다. 대주분 귀족 출신인 동호인들이 축구를 '소유' 했기때문에 엄격한 아마추어리즘이 축구의 본질이 된 것이다.
5. 그런 시대, <더 잉글리시 게임>에서 최초의 프로 축구선수가 된 퍼거스 수터(블랙번 로버스)는 말한다. "만약 그 규정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우리같은 노동 계급 선수는 당신들처럼 먹고 살 걱정이 없는 사람들을 영원히 축구로 이길 수 없을 겁니다. 우리 노동자들은 따로 연습할 시간도 체력도 없습니다."
(정말 똑똑한 자본가들은 이 대목에서 '아, 축구라도 져 주는게 장기적으로 더 좋은 전략이 될 수 있겠구나! 입장료 수입이 얼마지?'라고 느꼈을 터.)
6. 그런 면에서 이 드라마는 당시의 사회상에서 축구라는 것이 어떻게 귀족들의 여가에서 노동계급의 엔터테인먼트로 변해가는지를 이해하게 해 주는 너무나 훌륭한 교과서 역할을 한다. 이것은 축구판 <양식의 양식> 아닌가!
'뭘 좀 하다가 > 드라마를 보다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취로 뽑아본 2022년 10편의 드라마 (2) | 2023.01.04 |
---|---|
히바로 Jibaro, 21세기 인류 문명의 정수 (0) | 2023.01.04 |
플레이크드, 좀 심하게 적나라한 중년남의 실체 (0) | 2022.01.02 |
2021년 개취로 뽑은 10편의 드라마 (0) | 2022.01.02 |
지니 앤 조지아, 가족 드라마의 미래일까. (0) | 2021.12.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