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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2TV '박중훈 쇼'의 게스트로 최양락이 나와 좋았던 옛 시절 얘기를 나눴습니다. 이때 박중훈이 최양락의 알려지지 않은 영화배우 경력을 폭로(?)했죠. 최양락은 87년 이후 총 6편의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박중훈이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건 뭣보다 두 사람이 한 작품에서 공연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규형 감독의 1987년작,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입니다. 흔히 '청춘스케치'라면 이 영화였는데 뒤늦게 위노나 라이더 주연의 1994년작 'Reality Bites'가 '청춘스케치'라는 제목으로 비디오가 출시되면서,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라는 긴 원제를 다 얘기해야 통하는 영화가 돼 버렸습니다.

지금이라면 우스운 숫자지만 1987년 7월 개봉한 이 영화는 26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그해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시대적으로 보면 6월 항쟁 때 깔린 종로 거리의 최루탄 가루가 아직 다 흩어지기 전인 정치의 시대였지만 오히려 그런 분위기 때문에 갑갑한 청춘들에게는 피난처 역할을 한 영화라고 할 수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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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기억하는 분들이 꽤 있겠지만 한국 대중문화는 1985년 스포츠서울이 창간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습니다. 88년 올림픽에 대비한다는 명분으로 컬러 1면과 가로쓰기 체제의 스포츠 신문이 새로 나온 건 정말 획기적인 일이었죠.

이 신문은 급속도로 젊은 층 독자를 빨아들였는데, 당시의 제작1선에 섰던 분들은 여러가지 새로운 시도를 했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규형이라는 새로운 인물의 주간 연재 소설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였죠. 감각있는 필체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던 글쟁이 이규형 감독은 턱없이 순수하지만 현실에서는 별볼일없는 남자 대학생 철수와 역시 그저 그런 여대생이지만 장래에 대한 꿈 만큼은 원대한 미미 커플을 등장시켜 젊은이들을 사로잡았습니다. '웃기는 짜장면' '슬픈 울면' 같은 표현도 이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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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소심하고 빌빌한 철수와, 술 - 주먹 - 미모(책에는 나중에 미미가 영화배우로 캐스팅되는 사연까지 나오죠)만큼은 탁월한 미미 커플은 대단한 인기였습니다. 영화 데뷔작인 '청 블루 스케치(천호진과 허준호의 데뷔작)'로 감각을 인정받은 영화감독이었지만, 아무래도 당시의 이규형 감독은 글쟁이로서의 재능을 한층 높이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1986년 연말, 소설 '청춘스케치'가 미미와 철수의 결혼생활로 접어들어 아직 연재되는 상황에서 태원영화사의 이태원 사장은 '청춘스케치'의 영화화를 결정합니다. 뒷날 '서편제'를 만든 한국 영화계의 거목이지만 당시까지는 소장파 제작자에 속했던 분이죠.

영화판의 주인공은 세 사람. 철수, 미미와 철수의 친구 보물섬이었습니다. 철수 역은 '깜보'로 가능성을 인정받은 박중훈, 보물섬 역은 '가슴을 펴라'라는 영화로 주목받은 김세준으로 일찌감치 결정됐습니다. 미미는 '엽기적인 그녀'의 원형을 이루는 말괄량이로 워낙 선명한 캐릭터였기 때문에 수많은 배우들이 거론됐지만 결정은 쉽게 되지 않았죠.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강수연이 이 역할을 맡게 되면서 다른 주장은 쑥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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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베니스 영화제 여우주연상의 신화는 이뤄지기 몇달 전(물론 '씨받이'는 1986년 개봉됐었죠)이었지만 강수연은 다른 두 배우와는 격이 다른 스타였습니다. 1970년대 아역 시절부터 지존의 미모로 신화적인 인기를 누렸고, '고교생일기'나 기타 다른 드라마로도 익히 잘 알려져 있었던 배우였기 때문입니다.

이밖에 조연급으로 '최 아랑드롱'이라는 역할이 있었습니다. 이 역할은 본래 소설에선 철수를 당시 가장 잘 나가던 이태원으로 데리고 가 프로의 위력을 보여주는 초절정 미남이었지만 영화에선 말만 앞세우는 속빈 강정 캐릭터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이 역할은 당시 이규형 감독과 친분이 두터웠던 개그맨 최양락의 차지가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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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형 감독은 최양락을 캐스팅할 때 '강수연과 러브신이 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강수연과 단 한 신도 함께 출연하지 않아 뒷날 '속았다'며 투덜댔습니다. 최양락은 15일 방송에서 "그래서 시사 이벤트 때 콩트를 짜 실컷 껴안아 봤다"고 뒷얘기를 하기도 했죠. 최양락은 이후 이규형 감독의 영화 '어른들은 몰라요'와 '난 뭔가 깜짝 놀랄 일을 할거야'에 잇달아 출연해 인연을 이어 갔습니다.

이 영화가 개봉될 당시 이규형 감독은 흥행을 위한 영화 홍보에도 그때까지 볼 수 없던 신기법을 활용해 주목을 끌었습니다. 대대적인 엑스트라 모집 광고도 그중 하나였죠. '철수 뒤에서 짜장면먹는 남자 역, 미미 뒤에서 짬뽕 먹는 여자 역, 지하철에서 조는 남자 역' 등의 조역들을 일반인들로부터 공모를 받아 채우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또 의대생 역에는 진짜 의대생, 법대생 역에는 진짜 법대생을 캐스팅하겠다는 공고도 있었죠(절반 정도 성공했습니다).

사실 이런 아이디어를 내놓기 위해 이규형 감독은 오래 전부터 혹독한 브레인스토밍을 거쳤습니다. 7-8명으로 구성된 팀이 늘 아이디어를 내놓고, 이감독과 김영남 조감독(뒷날 최진실의 데뷔작인 '꼭지딴' 감독)이 판정위원이 되는 식의 회의였죠. 이때 회의를 거친 사람들 중 상당수가 90년대에서 현재까지 한국 예능 방송계를 이끌어가고 있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음악도 꽤 주목을 끌었습니다. 일단 1986년 발매된 산울림 11집 수록곡 중 2곡이 메인 테마로 쓰였습니다. '그대 떠나는 날 비가 오는가'와 '안녕'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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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두 곡 외에도 가수 최성수가 프로듀서 역할을 맡은 O.S.T에는 당시 꽤 주목받던 노래들이 들어 있었습니다. 오프닝에 흐르던 손현희의 '오늘은 어떤 일이'에서, 미미의 나이트클럽 신에 나왔던 벗님들의 '우리의 젊음', 그리고 최성수의 '내사랑 미미'까지 꽤 짭짤한 히트를 기록했습니다. 참 22년전, 어제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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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저는 왜 이렇게 이 영화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일까요?^

산울림의 '안녕'입니다.



p.s. '박중훈 쇼'가 날로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아 흐뭇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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