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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후반의 어느 날, 그렇게 온 반 아이들(특히 남자 아이들)의 화제가 한 곳에 집중되는 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날따라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보셨는데, 절반 이상이 '공군 전투기 조종사가 되겠다'고 했던 걸로 기억납니다.

그렇습니다. 그 전날이 바로 <원더우먼>의 첫회, 트레버 소령(라일 와고너)이 버뮤다 삼각지대에 떨어져 원더우먼 린다 카터를 처음 만나 인간 세계로 데려오는 에피소드가 한국에서 방송된 날이었거든요.

전 세계인에게 원더우먼=린다 카터라는 등식은 깨진 적이 없습니다. 심지어 이 시리즈를 한번도 본 적 없는 사람도 이 사진을 보면 "원더우먼!"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린다 카터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원더우먼'이라고 말하면 '아하'하고 알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캐릭터인데다, 린다 카터는 그 역할을 위해 태어났다는 말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얼굴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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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여배우들의 기준으로 볼 때 분명히 빠지는 얼굴은 아닙니다. 5피트 7인치(1m68 정도 되는군요)의 키에 35-23-34의 몸매, 윔블던 본선에도 올라간 적이 있는 전직 프로 테니스 선수에 저 정도의 외모라면 충분한 경쟁력을 갖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1974년, 미국 방송이 린다 카터보다 2년 전에 원더우먼 역할을 할 여배우를 찾았을 때 선택된 것은 캐시 리 크로스비였습니다. 크로스비라는 성을 갖고 있긴 하지만 빙 크로스비와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습니다.

이 <원더우먼>은 코믹스 판 <원더우먼>에서 다이애나 프린스와 트레버 소령이라는 주인공들의 이름을 갖고 오긴 했지만 코믹스의 세계와는 사실 거의 관계가 없었습니다. 이 원더우먼의 능력도 뛰어나긴 했지만 린다 카터의 원더우먼에 비하면 정상적인 인간의 능력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총알을 막는 팔찌 따위도 없었고, 대신 정교한 폭발물과 기계 장비가 임무 수행을 도왔을 뿐입니다. 의상도 독특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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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 <원더우먼>은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고, 그저 파일럿으로 끝나 버렸습니다. 많은 분들이 기억하지 못하지만 사실 이 1974년판 <원더우먼>은 한국에서도 방송된 적이 있습니다.

린다 카터의 <원더우먼>이 한창 방송되던 도중-아마도 TBC의 구매 담당자와 미국 프로그램 판매사 사이에 뭔가 차질이 빚어진게 아닌가 추측해보지만- 아무런 예고 없이 캐시 리 크로스비의 <원더우먼>이 방송된 것이죠. 물론 성우까지도 다른 성우들을 썼기 때문에 혼동의 여지는 전혀 없었습니다. 단지 방송이 나간 뒤에 시청자들로부터 상당한 항의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대체 '우리의 린다'는 어디다 갖다 버리고 저렇게 못생긴 여자를 대역으로 데리고 왔느냐"는게 항의의 주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크로스비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동일선상에서 경쟁을 벌였다 해도 그가 린다 카터를 이기기는 어려웠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누가 저런 '국제 표준 미녀'에게 감히 대항할 수 있었을까요.

린다 카터에게 극장판 원더우먼 역할은 누가 했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을 하자 "캐서린 제타 존스... 글쎄...?"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하는데, 지금도 "차라리 린다 카터가 그냥 하라"는 약간 정신나간 팬들도 상당수 있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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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얘기 나오는 산드라 블록요? 그냥 영화 예산을 현찰로 바꿔서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르는게 나을 것 같습니다.

린다 카터는 <원더우먼> 외에는 배우로 성공하지 못했지만 갑부 변호사 로버트 알트만(BCCI 스캔들이라는 아랍 테러리스트들이 관련된 엄청난 금융 스캔들의 주범으로 주목받고 있기도 합니다. 그만큼 돈과 권력도 장난 아니란 얘기죠)과 결혼해 떵떵거리고 잘 살고 있습니다. 반면 크로스비는 근육에서 힘이 빠지는 희귀병으로 불행한 만년을 보내고 있다고 합니다. 어찌 보면 운명이 그에겐 지나치게 가혹했다고나 할까요.


캐시 리 크로스비판 원더우먼의 오프닝입니다.




그중 한 장면. 함정에 빠진 원더우먼입니다.




비슷한 상황에 놓인 린다 카터 원더우먼. 위기 돌파가 훨씬 쉽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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