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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입소문 최강인 영화 '건축학개론'. 명성대로 잘 만들어진 멜로드라마입니다. 이용주 감독의 '불신지옥'을 보고 '이야, 이렇게 뻔할 듯한 이야기를 갖고 이만치 재미있는 영화를 만들어 내다니!' 하고 재능에 감동한 게 엊그제같은데 어느새 새로운 영화, 특히 전작과는 전혀 다른 장르의 영화를 가지고 이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게 감개무량합니다.

소문대로 이 영화는 Y대 건축공학과를 나온 감독이 90년대초 Y대 건축공학과 학생을 주인공으로, Y대 건축공학과 출신인 가수 김동률의 노래 '기억의 습작'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 낸 영화입니다. 시대의 디테일이 살아 있는 것은 물론이고, 영화를 보는 사람이 30대 이상의 성인이라면 누구라도 자신의 '바보같은 스무살 시절'을 떠올릴 수 있는 촉촉한 작품입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이 정도. "날이 더 더워지기 전에 얼른 보세요."



현재. 건축사무소에서 일하고 있는 승민(엄태웅)에게 어느날 갑자기 잊고 살던 15년 전의 첫사랑 서연(한가인)이 찾아옵니다. 처음에는 서현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승민. 그런 승민에게 서현은 의사 남편과 함께 살고 있다며 제주도에 지을 집을 설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15년 전(1997년?). 건축공학과 신입생 승민(이제훈)은 1학년 2학기 건축학개론 시간에 음대생 서연(배수지)을 보고 가슴이 설렙니다. 알고 보니 한 동네에 살고 있는 서연. 제훈과 서연은 갑작스레 가까워지고, 건축학개론 과제를 위해 꽤 멀리까지 함께 나다니는 사이가 됩니다.

하지만 워낙 경험이 없는 탓에 이 감정을 어떻게 주체해야 할지 모르는 승민. 갓 스무살의 신입생에게 사랑이란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처음 이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들은 '크로니클'에서 갑작스런 초능력을 갖게 된 10대들이나 마찬가집니다.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가장 에너지로 충만해 있는 시기죠(감정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모두 그렇습니다). 문제는 첫사랑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 때, 이 에너지는 어느 방향으로든 건드리기만 하면 폭발하려는, 상온에서의 니트로글리세린같은 상태가 된다는 겁니다.

감정은 느끼되 그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이성과 경험이 현저하게 부족하기 때문이죠. 에리히 프롬이 젊음에 대해 '사랑은 충만해 있으되 그 사랑을 어디로 쓸 줄 모르는 상태'라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사소한 오해, 별 것 아닌 힌트, 아무 일도 아닌 위기감, 그리고 질투, 선망, 동경 등등 미세한 감정의 흐름에 의해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치닫곤 합니다.

'건축학개론'은 제목대로(?) 바로 이런 '첫사랑에 대한 개론' 역할을 톡톡히 합니다. 첫사랑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온갖 낭만적인 병리적 증상을 남김없이, 그리고 매우 뛰어나게 보여주고 있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첫사랑에 대한 잘 만든 영화가 어디 한두편일까마는,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주제의 영화가 흥행하기 위해서는 상당 기간 - 한 영화가 우려먹고 지나가고, 그 세대가 흘러가 다음 세대가 비슷한 주제를 찾을 때까지 - 이 소요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1986년의 '겨울나그네', 2000년의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적절한 거리를 두고 있다는 점이 매우 고무적입니다. 이제 '첫사랑'이라는 단어를 2012년의 '건축학개론'으로 자연스럽게 연결짓는 세대가 나타나겠죠.)



개인적으로 - 뭐 다른 많은 분들도 비슷한 분들이 많겠지만 -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뭐니뭐니해도 신입생 시절의 승민과 서연이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김동률의 노래를 듣는 장면입니다. 

승민은 서연이 건네 주는 이어폰의 한쪽 끝을 귀에 꽂습니다. CD 플레이어가 작동되기까지 약 2,3초간의 정적이 흐르고(물론 이 정적이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아무 것도 들리지 않는 이 순간은 서연에 대한 승민의 마음을 0의 상태, 즉 컴퓨터로 말하자면 초기화시키는 시간인 셈입니다), 김동률의 익숙한 첫 가사, '이젠/ 버틸수 없다고...'가 흘러나옵니다.

아마도 승민은 먼 훗날 누군가로부터 '언제 서연에게 처음 사랑을 느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이 순간을 기억할 겁니다. 관객도 마찬가지일테죠. 이렇게 이용주 감독은 필요한 부분마다 적시타를 날려 주는 강타자의 면모를 보입니다.




표면상 주인공은 엄태웅/한가인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 이 성인 부분은 그냥 간판 역할입니다. 진짜 영화의 핵심은 이제훈/배수지에게 가 있죠. 이 사실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캐스팅은 매우 절묘했습니다.

이제훈은 갓 명문대에 입학한, 다소 어려운 집안의 젊은이로서 완벽합니다. 잘생겼으면서도 어딘가 어두운 듯한 그늘이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한국사회가 본격적인 빈부 양극화로 접어들기 직전, '한국사회에서 강남이 갖는 의미와 강남 문화를 접했을 때 본능적으로 느끼는 위축감'을 완벽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면 (최고의 걸그룹 출신인) 배수지는 그런 부분에서 묘한 존재입니다. 승민이 서울 강북 지역에서 자라났고, '강남/강북'의 구도가 그에겐 너무나 익숙하고 폭력적인 느낌이라면, 아예 서울 사람이 아니었던 서연에게는 그런 구도가 큰 의미가 없다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제주도에서 자라나 '서울 사람'으로의 편입을 꾀하는 서연에게는 '기왕이면 강남이 더 멋지지 않아?'라는 의식이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승민과 서연의 첫사랑이 무참히 사라진 이유 이면에는 이처럼 '강남/강북'이라는 지리적, 문화적 구조에 대한 두 사람의 인식 차이가 큰 역할을 합니다.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이미 서울 지역에서 '강남 문화'에 대한 열등감과 적대감을 느끼고 있던(말하자면 '계급에 대한 인식'인 거죠) 승민은 그 외곽으로부터 진입해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강남 문화에 대한 선망과 편입 의지를 보이는 서연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서연을 사랑할수록 그 불만은 점점 깊어갈 뿐입니다. 

아마도 승민은 서연이 자신의 처지나 시각을 '알아서' 공유해 주기를 바랐겠지만, 불행히도 그런 '강남/강북'에 대한 인식이 없는 서연은 이런 승민이 불안하고 어색해 보일 뿐입니다. 안경 쓴 선배는 그 '강남'을 상징하는 존재지만 '그날밤의 사건'은 사실 둘이 헤어지는 데 부수적인 이유일 뿐입니다. 애당초 이런 인식 차이가 있는 한 승민과 서연은 잘 될 수가 없는 관계였죠. 이용주 감독은 그 부분을 잘 알고 있고, 관객에게도 너무나 선명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마 이해하실...)



승민의 눈에 비치는 서연은 '예측불가능한 요정'입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존재인 것이죠. 이런 대상이 되려면 '너무 예쁘고 세련되어서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존재여서는 안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 속 서연 역을 구현하는 배수지의 스타일과 연기는 완벽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드림하이' 때와는 비교할 수 없는 발전이 엿보입니다.





영화에서 표제곡으로 등장한 노래는 다 아시는 '기억의 습작'이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절로 떠오르는 노래는 '다시 사랑한다 말할까' 입니다. 물론 영화 속에서 직접 들었다면 줄거리의 균형을 깨는 요소로 작용했겠지만. (이렇게 쓰고 보니 이 영화의 포스터 중에 이 카피가 써 있는 버전이 있군요.^^)



P.S.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말은 사실 거짓말입니다. '우리중 인기있는 누군가는 여러 사람의 첫사랑'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중 많은 '나'는 어느 누구의 첫사랑도 아니었을 겁니다. (네. 불편한 진실이죠.^^ 대중은 속고 있습니다.) 


P.S.2. 납뜩이 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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