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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퍼]라는 제목은 아무래도 '무한 루프'라는 말을 느끼게 합니다. 끝없는 순환의 고리를 가리키는 말이죠. 타임 머신을 다룬 SF 팬들에게는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 말이기도 합니다.

 

라이언 존슨 감독의 '루퍼'는 그동안 '터미네이터' 이후 수백편 쯤 등장했던 '미래에서 온 킬러'에 대한 영화입니다. 이런 영화의 성패는 당연히 얼마나 참신한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그런 면에서 '루퍼'는 근래 나왔던 몇몇 영화들 가운데서 단연 첫손에 꼽힐 만한 매력적인 요소들을 갖고 있습니다.

 

혹시 라이언 존슨 감독의 데뷔작 '브릭'을 보신 분이라면 이 감독의 기발함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금주법 시대의 시카고나 1950년대 LA 암흑가를 배경으로 할 만한 이야기를  한 고등학교를 무대로 바꿔놓았던 희한한 영화였죠. 그리고 그 주인공이 바로 10대를 갓 지난 조셉 고든 래빗이었습니다.

 

 

("대체 누가 고든 래빗이라는 거야?"라고 말해도 이상하지 않을 특수분장의 힘.^^)

 

먼저 '루퍼'의 기본 설정.

 

근미래인 2044년. 이 시기에는 30년 뒤인 2074년의 악당들과 손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태깅 기술(?)의 발달로 시체의 완벽한 처리가 힘들어진 2074년의 범죄조직은 그들의 죽여야 하는 사람들을 타임 머신 기술을 이용해 2044년으로 보내고, 2044년의 악당들은 미래에서 전달되는 살해 대상들을 죽이고 시체를 정리하는 일을 맡습니다. 그 댓가로 은괴를 받죠. 이 일을 해서 먹고 사는 자들을 루퍼(looper)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미래의 조직이 이 루퍼들과의 관계를 부담스러워 하고, 2074년의 루퍼들을 2044년의 그 자신에게 보내게 됩니다. 이걸 '해고'라고 부르죠. 얼굴을 가린 채 미래에서 날아오는 살해 대상에게 샷건을 날린 뒤, 평소 '동봉되어' 오던 은괴 대신에 금괴 뭉치를 발견하면 그건 죽은 사람이 그 자신이라는 뜻입니다.

 

영화의 앞부분은 이 설정을 관객에게 가르쳐 주는데 소요됩니다. 사실 이런 설정이라면 그 다음에 진행될 과정은 뻔한 셈이죠. 루퍼로 살아가고 있는 주인공 조(조셉 골든 레빗) 앞에 미래의 자신(브루스 윌리스)이 나타나고, 순간 당황한 조가 미래의 자신을 제거하는 데 실패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루는 영화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다음은 그리 뻔하지 않습니다.^^

 

 

 

 

타임머신을 다루는 영화 가운데 몇몇은 평행우주론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대부분은 단선적인 시간 개념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대개 과거를 바꿔 놓으면 바로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는 쪽이 스토리를 만들어내기기 때문일텐데, '루퍼'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조의 친구 세스(폴 데이노)가 미래의 세스를 죽이는 데 실패했을 때, 조직은 미래의 세스를 굳이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현재의 세스를 죽이면 미래의 세스는 아무리 멀리 도망가도 바로 소멸되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2044년의 시공간에 '현재의 조(젊은 조)'와 '미래의 조(늙은 조)'가 동시에 존재하는데, 현재의 조는 미래의 조에 대해 모르지만 미래의 조는 현재의 조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건 현재의 조가 미래의 조에게 있어 '기억'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30년 전의 기억이라 약간 희미할 수도 있겠지만.

 

이 기본 설정에서 더 나아가 '루퍼' 속 세계에서는, 현재의 조가 그때 그때 하는 행동이 모두 미래의 조의 기억에 영향을 미칩니다. 심지어 젊은 조가 어디 가서 무슨 행동을 하고 있든, 늙은 조는 거의 실시간(약간의 시간이 걸리는 것으로 나옵니다)으로 젊은 조가 보고 느끼는 것을 바로 알게 됩니다. 젊은 조의 모든 행동은 늙은 조의 '기억'이기 때문이 그렇다는 얘기죠.

 

두 사람이 같은 시공간에서 살아 움직이는데도 그 '기억'의 매커니즘이 작동한다는 게 어찌 보면 말이 안 되기도 하지만, 물리학자들에 따르면 과거로의 시간 여행 자체가 모순이라고 하니, 까짓 '어차피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인데 받아들이자'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 '기억의 작용'은 '루퍼'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루퍼'를 매력있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라고나 할까요.

 

(사실 이 부분 외에도 '루퍼'의 시간 여행 설정에는 상당히 허점이 많지만,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진행하는 데에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인 상황이죠. 그리고 따지자니 우리가 시간여행을 해본 것도 아니고...^^)

 

 

 

라이언 존슨의 영화 두 편('브릭'과 '루퍼')을 보고 나면, 그는 좋은 시나리오 작가이긴 하지만 아직 좋은 감독으로는 부족한 면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하자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지만 구변은 좀 모자란 친구'와 같다고나 할까요. 화면 속 사건들은 재기넘치고 흥미롭지만 이야기를 끌고 가는 감독으로서의 스킬은 아직 더 갈고 닦아야 할 듯 합니다.

 

간혹 '루퍼'를 지루하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이야기에 완급 조절이 없기 때문입니다. 존슨의 이야기는 그냥 고저장단 없이 계속 일정한 톤으로 관객에게 전달됩니다. (이게 '그만의 스타일'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스타일이라면 좀 곤란한 스타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퍼'를 칭찬할 수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독특한 방식으로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젊은 내가 30년 뒤의 세게에서 날아온 '내일의 나'를 죽여야 하는 상황. 그러니까 이 영화는 관객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에게 꽤 많은 돈을 주면서, '이 돈은 30년 뒤에 당신이 죽는다는 것을 전제로 한 퇴직금'이라고 말하는 상대가 있다면 과연 당신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이런 질문이죠.

 

'30년 뒤에 죽는 대신 거금을 받을래, 아니면 그냥 목돈 없이 살래?'라는 선택이 주어진다면 더 좋았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인생에서 일어나는 큰 사건의 대부분은 개개인의 선택 밖에서 결정되곤 합니다. 그리고 '루퍼'의 경우에는, 그 자신이 현재의 세계에서 루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이 하나의 선택인 셈이죠.

 

그 일을 해서 현재의 세계에서 먹고 사는 이상 딱 30년이든, 그보다 약간 긴 시간이든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끝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대략은 짐작하게 되니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루퍼들은 '언제든 남이 아닌 바로 자신의 미래를 향해 총을 쏘게 될 사람들'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뭇 상징적입니다.

 

어찌 보면 오늘 벌어 내일을 사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미래를 향해 총질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개개인을 봐도 그렇고, 인류 전체를 봐도 역시 마찬가지. (물론 어찌 보면 직장생활에 대한 우화로 읽히기도 합니다.^^)

 

 

 

'루퍼'의 세계관에서 또 한가지 매력적인 점은 모든 인물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상황에서의 대립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각자의 인물에게 분명한 명분이 있고, 그 명분의 성취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주인공과 상대역(악역?)이 경쟁할 때, 싸울 이유가 한 쪽에만 있거나, 승부가 어느 한 쪽의 태만이나 무능으로 결정된다면 참 그보다 맥빠지는 일도 없죠.

 

하지만 '루퍼'의 주역들은 모두 마음 한 구석에서 '내가 정말 이래도 될까. 나 하나 잘 되자고 이렇게 남을 희생시켜도 되는 걸까'라는 의구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이건 나 자신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일'이라며 전력을 다합니다. 자연스럽게 설득력이 솟아납니다.

 

 

 

 

물론 '루퍼'의 성취는 좋은 배우들의 가세 덕분이라는 점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브루스 윌리스와 닮아 보이기 위한 특수분장으로 아예 인상을 바꿔 버린 조셉 고든 래빗은 다소 나약해 보이는 평소 이미지를 벗고 또 한번 연기 폭을 넓혔습니다.

 

 

 

 

에밀리 블런트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때만 생각해선 큰일 날 변화를 보여줍니다.

 

 

'루퍼', 아무튼 자신있게 권할만한 작품입니다. 상영관이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지만.

 

라이언 존슨의 전작 '브릭'도 은근히 볼만한 작품입니다. 특히 '밀러스 크로싱'이나 '말타의 매' 같은 작품들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빠져들 법 합니다. 꽤 오래 전에 썼던 리뷰입니다.

 

'브릭'을 보면 '말타의 매'가 보인다 http://blog.joinsmsn.com/fivecard/9125446

 

P.S. 브루스 윌리스의 아내 역으로 나온 중국 여배우는 허청(許晴, Xu Qing)입니다. 진개가의 왕년 역작 '현위의 인생' 등에 나왔다는데 그 뒤로는 TV 활동에 더 주력한 모양이군요.

 

아, '코요테 어글리'로 깜짝 스타가 될 줄 알았던 파이퍼 페라보는 갈수록 역할이 작아지고 있습니다. 이번 영화에선 젊은 조가 은근히 좋아하는 애 딸린 스트리퍼 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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