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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아시는 바와 같이 가수 인순이가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 무대를 왜 열어주지 않느냐고 강력한 항의에 들어갔습니다.

역시 다 아시는 바와 같이 한국 사회는 대중 가수나 대중 가요를 좀 우습게 아는 경향이 짙습니다. 특히 클래식 연주자나 성악가들은 대단한 예술가 취급을 하지만 대중 가수들은 딴따라로 치부해 버리는 사람들이 많죠. 이런 편견을 생각하면, 인순이의 항변은 심정적으로 강력하게 끌리는 데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그런 편견 외에도 많은 부분을 고려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리고 저는 본질적으로, 수준 있는 공연장의 절대 부족이 문제의 중심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화 형식으로 이번 인순이 파문을 둘러싼 다양한 입장을 정리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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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인순이는 데뷔 후 30년간 국민의 사랑을 받은 대형 가수다. 이미 '열린음악회'를 통해 전 국민에게 대형 무대에서의 가창력을 인정받은 가수이며, 세종문화회관 무대에도 섰다. 그런 가수가 왜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는 공연할 수 없다는 것인가. 도대체 이해할 수 없다.

B: 왜 하필 오페라하우스인가? 역시 이해할 수 없다. 오페라하우스는 글자 그대로 오페라를 위한 공간이다. 극장의 용도가 정해진 공간이다. 세계 유수의 오페라 홀을 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의 경우, 콘서트 홀은 다양하게 개방하지만 오페라 극장은 오페라와 발레를 위한 전용관으로 활용하고 있다.
뉴욕의 메트 오페라, 런던의 코벤트 가든도 마찬가지다. 세계 어디를 가나 오페라 극장은 대단히 제한된 공간이다. 함부로 개방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A: 말 잘 했다. 지금 예로 든 극장 중에서 뮤지컬이나 개인 독창회를 위해 개방하는 곳이 있나?

B: ...없는 걸로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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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하지만 예술의 전당 오페라하우스는 '명성황후'를 비롯해 이미 수없이 많이 뮤지컬을 위해서도 개방됐다. 극장의 순수성이라면 말할 자격이 없다고 본다. 게다가 조용필이라는 대중가수를 위해 개방한 선례가 있지 않나.

B: 아니 어따 감히 조용필 선생과 인순이를! 대한민국에 조용필은 단 한 사람 뿐이다.

A: 인순이도 한 사람 뿐인데?

B: 그렇다 해도 두 사람을 비교하는 건 무리다. 가수로서 전성기의 위치, 히트 곡의 수, 범 국민적인 인기 등등을 고려할 때 조용필은 인순이에 비교할 수 없는 가수다. 대체 인순이의 오리지널 히트곡이 뭐가 있나. '밤이면 밤마다'? 그 밖에 뭐가 있나. '친구여'나 '거위의 꿈' 역시 자기 노래도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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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대체 언제부터 오페라극장이 대한민국 가수의 경력 판단기관이 됐나? 그럼 대체 히트곡 몇곡 이상, 앨범 판매량 얼마 이상, 해외 공연 몇회 이상이면 오페라극장 공연 가능 가수인가?

B: 그동안 운영 방침이 약간 정상 궤도에서 어긋난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부터라도, 순도 높은 클래식 이벤트만을 위한 공간으로 남겨두고자 한다.

A: 사실 전통이며 품위며 얘기하는 것도 우습다. 한국에 유럽처럼 클래식 음악의 전통이 있나? 팝이건 클래식이건, 한국 사람이 보기엔 모두 외국에서 들어온 문화의 일부일 뿐이다. 그런데 어떤 것은 고급 문화 취급을 받고, 어떤 것은 싸구려 취급이다. 허위의식이 낳은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B: 그 말을 뒤집으면, 인순이가 반드시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하겠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허위의식의 소산이라는 비판을 받을 만 하다. 대중가수라면 어떤 무대든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굳이 일반 가수들이 서지 못하는 무대에 서서 자신의 훌륭함을 입증하겠다는 식의 사고가 아닌가 의심스럽다.

A: 인정한다. 사실 자신의 위치에 대한 자신감이 있다면 무대를 가릴 이유가 없다. 12월에 오는 플라치도 도밍고도 체육관에서 공연하던데...
여담이지만 한국 가수들이 예술의 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을 탐내는 것은 일정 규격 이상이 되면 좀 제대로 시설이 갖춰진 공연장이 사실상 전무하다는 데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늘 일본같은 선진국과 비교해서 그렇지만, 한국에서 2, 3천석 이상 되면서 좌석이나 무대가 세종문화회관 수준인 곳이 도대체 몇 군데나 있나. 인순이의 주장 가운데에는 아주 단순하게 말하면 '왜 좋은 공연장은 전부 클래식용이냐. 우리도 좀 좋은 공연장 쓰면 안되냐'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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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그렇긴 하다. 공연 문화의 수준과 공연장 수는 정확하게 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 강남이건 강북이건, 으리으리한 대형 건물들이 올라갈 때마다, 저 건물들에 제대로 된 공연장 하나씩만 들어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두산 연강홀도 좋은 예지만, 다른 회사들도 이런 식으로 자기 이름 붙은 공연장 하나 갖기 운동을 하는게 어떨까.

A: 그렇게 따지면 없는게 한둘인가. 20년째 투덜대고 있는 야구 팬도 있다. 프로야구 20년인데 서울 부산 수원 인천 빼면 여전히 수용인원이 만명 수준이다. 우리도 돔 구장 하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도대체 남아도는 거라곤, 2002년 월드컵 치르고 남은 초대형 축구전용구장들 뿐이다. K리그 경기때마다 텅텅 비어서 차마 중계 카메라가 관중석을 비치지 못하는 구장들 말이다.

B: 정말 한국 가수들 안됐군.

A: 그렇지? 그러니까 이번에 어떻게 인순이 좀 잘...

B: 아니, 글쎄, 여태 얘길 했지만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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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백날 얘기해봐야 매일 똑같은 얘기라는게 우울해질 뿐입니다.

내한공연은 소리가 컹컹 울리는 올림픽공원 체조경기장 하나, 사무-전시용 공간인 코엑스에서 공연을 해야 하는 가수들. 그나마 12월에는 대관이 안 되는 현실. 대체 언제쯤 좋아질까요. 대중 가수라고 해서 노래방 마이크 들고 공연하는 줄 아는 사람들도 반성해야 합니다.

호텔 디너쇼, 호텔이 음향 좋고 공연하기 좋아서 마이크 잡고 노래하는 가수 없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다들 하는 거죠. 예술의 전당 아니라도 가수들은 갈 곳 많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강남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에게 왜 다른 곳에도 살 데가 많은데 굳이 강남에 살려고 하느냐고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인순이가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을 하건 안 하건, 대중가수들이 '나도 빨리 저 무대에 서야지'라고 꿈을 키울만한 무대는 따로 있어야 합니다. 일본의 부도칸이든, 미국의 슈라인 오디토리엄이든, 영국의 로열 알버트 홀이든 말입니다. 그래야 '클래식 공연만 하는 무대에서 공연했으니 나도 A급 가수'라는 생각도 없어지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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