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우삼의 영화 '적벽대전 2'가 실망스럽다는 글을 올렸더니 예상대로 불쾌하다는 반응이 제법 있더군요. 물론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보신 분도 꽤 있을 겁니다. 1편은 국내에서 150만 정도의 관객을 동원한 걸로 알려졌습니다.
뭐 영화 한편에 대한 호오가 갈리는 거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대부'보다 '트와일라잇'이 훨씬 더 감동적인 사람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물론 영화라고 해서 뭐든 민주주의가 통하지는 않습니다. CG를 많이 쓴게 공통점이라고 해서 '반지의 제왕'과 '디 워'가 비슷하게 평가받는다면 그 또한 서운해 할 사람이 많을 겁니다.
그런데 문득 '적벽대전'과 '트로이'가 겹쳐지면서 영화가 원작을 제대로 살렸네, 원작을 망쳤네 하는 논쟁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원작을 읽는다는 것'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래서 나온 글입니다.
제목: 적벽대전
미모를 재는 단위가 있을까. 참 할 일도 없었다 싶지만 어느 시대인가 서양 지식인들은 헬렌(Helen)이란 단위를 만들었다. '일리아드'에 나오는 스파르타의 왕비 헬렌이 트로이의 파리스와 함께 사라지자 그리스 전역에서 1000척의 대함대가 동원되어 구출에 나섰다는 데서 착안한 것이다. 만약 한 미녀가 1척의 배를 동원했다면 1밀리헬렌급의 미모로 인정된다. 즉, 1헬렌=1000밀리헬렌이다.
미녀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다는 구상은 동양인에게도 그리 낯설지 않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은 주유를 흥분시키기 위해 조조가 강동의 유명한 미녀인 교씨 자매를 얻으려 동오를 공격하는 것이라고 속인다. 교씨 자매의 언니인 대교는 동오의 군주 손권의 형수요, 동생인 소교는 주유의 아내였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는 이 구상이 제갈량의 계략이었지만 오우삼(吳宇森) 감독은 아예 이 이야기를 토대로 영화 '적벽대전' 1, 2편을 만들었다. '영웅본색'으로 유명한 오감독은 방대한 적벽대전 이야기를 2편의 영화로 나눠 1편은 지난해 여름, 그리고 2편은 지난 22일 공개했다.
아킬레스와 헥토르가 헬렌을 두고 격돌하듯 영화 '적벽대전'에서는 소교를 두고 조조와 주유가 대립한다. 소설에서는 대사 한마디 없는 소교가 영화에선 양측의 진영을 오가며 전쟁의 승부를 좌우하고, 영웅들의 피와 땀은 멜로드라마 속으로 슬쩍 가려진다.
애당초 삼국지라는 원작에 무지할 전 세계 관객들을 대상으로 삼았다니 오히려 서구인들에게는 이런 설정이 이해가 더 빠를 법도 하다. 하지만 대다수가 10대 이후 삼국지의 문화적 영향 속에서 성장하는 동아시아 남성 관객들에게는 원작의 향취가 아쉬울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비판은 유명한 원작을 둔 영화라면 반드시 거치는 원죄에 해당한다. 1956년 오드리 헵번 주연의 '전쟁과 평화'가 개봉됐을 때에도 미국 평론가들은 일제히 “제작진을 통틀어 소설을 읽어본 사람은 헨리 폰다뿐인 것 같다”며 비난했다. 사실 이런 논란은 독자들의 관심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책과 영화 양쪽에 모두 고무적이다.
정말 우려되는 것은 언젠가 원작의 훼손과 관련된 논란이 아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상상이다. 2004년 트로이 전쟁을 다룬 영화 '트로이'가 개봉됐을 때, 아킬레스의 죽음이 거론된 영화평을 두고 네티즌들로부터 “왜 결말을 공개하느냐”는 항의가 줄을 이은 적이 있었다. 고전이 사라진 시대는 이미 시작된 것 같다. (끝)
사실 저 헬렌과 밀리헬렌 이야기는 2년 전쯤 다른 글을 쓸 때 써먹은 적이 있어서 약간 찔리지만, '분수대'에는 어차피 처음 나오는 이야기일 것 같아 다시 울궈 먹었습니다. 아무튼 저런 것까지 단위를 만들어 재고 싶어 했다는 데서 서구 합리주의의 한 단면을 보는 듯 합니다. 적벽대전에 동원된 조조의 배가 몇 척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오우삼의 해석대로라면 소교는 한 0.3 헬렌 정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원작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았다'고 욕하는 바보는 없습니다. 어떤 원작도 화면으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재현되지는 않습니다. 단지 '좋은 재현'과 '나쁜 재현'이 있을 뿐이죠.
그렇다면 어떤 것이 좋은 재현일까요. 당연히 이 판단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지만, 최소한 각자가 생각하는 '원작의 맛'을 제대로 살린 것이 좋은 재현일 겁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겁니다. 짜장면에는 짜장과 돼지고기, 양파와 국수가 들어갑니다. 그리고 아무리 짜장면을 창조적으로 재해석 한다 해도, 어쨌든 짜장과 국수는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가끔은 짜장과 밥을 버무려 놓고 이것이 새로운 짜장면이라고 우기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식의 주장은 본래 객관화되기 힘든 것인 터라, 유명한 원작을 갖고 만든 드라마나 영화는 어쨌든 원작을 훼손했다(즉 망쳤다)는 주장에 거의 항상 맞닥뜨리게 됩니다. '반지의 제왕' 처럼 호평받는 각색이라도 "왜 봄바딜이 안 나와!" 수준의 교조적인 애독자도 항상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나마 이런 논란이 있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그래도 이런 논란이 있다는 것은 원작을 읽는 사람들이 아직 꽤 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급속도로 이런 추세가 무너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도대체 원작이라는 걸 왜 읽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꽤 늘고 있죠.
윗글에서는 영화 '트로이' 때의 코믹한 사건을 예로 들었지만 디즈니 시대 이후에 성장한 세대 가운데에는 '인어공주'가 본래 해피엔딩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뭐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영화 '발퀴레'에서 톰 크루즈가 실패한다는 것도 스포일러요(네. 히틀러는 암살당한게 아니라 자살했다는 걸 모르셨군요),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진다는 것도 스포일러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절대 다수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날들을 생각하면 참 암담합니다.^
다른 얘기지만 소교를 이용한 적벽대전의 전개 자체는 나쁜 아이디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칫 퍽퍽해 질 수 있는 적벽대전 이야기에 양념으로는 매우 좋은 선택이죠. 특히 소교 역할을 임지령 같은 미녀가 맡는 한은 말입니다.
1974년생. 생각보다는 꽤 나이가 있는 편입니다. 물론 잘 늙지 않는 중국 미녀들의 전통을 이어 영화에서는 아직 흠잡을 데 없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왕년의 헬렌(헬레네)들과 비교해볼까요.
사상 최악의 헬레네로 거론됐던 다이안 크루거부터
TV판 '헬렌 오브 트로이'의 시에나 길로이까지.
물론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헬렌은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1955년작 영화 '헬렌 오브 트로이'의 로사나 포데스타(Rossana Podesta)입니다. '율리시즈' 등 그리스 신화를 주제로 한 영화에 자주 얼굴이 나왔던 배우죠.
한국에서는 1980년대, 난데없이 '원 플러스 식스'라는 희한한 이탈리아제 섹스 코미디로 나이든 모습을 보여 기억하는 사람들을 놀라게도 했던 배우죠.
임지령도 부디 '적벽대전'을 통해 월드 스타로 거듭나길 바랍니다.
p.s. 이런 대작 사극을 볼때마다 가장 아쉬운 것은 '전쟁에 대한 개념이 있는 전쟁신'입니다. 이 부분에서 '적벽대전 2'는 초실망작입니다. 언제쯤 제대로 된 전쟁신을 다시 보게 될까요. 이 이야기는 따로 하겠습니다.
'적벽대전2'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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