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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의 식탁에서 고추를 제외한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아마 살 맛을 잃어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일겁니다. 매운 떡볶이 생각에 자다가도 깬다는 유학생들의 얘기를 들어 봐도 당연한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최근 눈길을 잡아 끄는 기사가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세종대왕때에도 고추가 있었다' 등등 일련의 기사였죠. 똑같은 자료에서 나온 기사이기 때문에 내용은 대동소이했을 겁니다.

먹거리에 조금만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한국에 고추가 들어온 것은 임진왜란 전후라고 알고 계셨을 겁니다. 멕시코에서 태어난 고추가 콜럼버스에 의해 유럽으로 전파되고, 그것이 다시 유럽인들에 의해 일본으로, 일본에서 다시 조선으로 전해졌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이죠. 그래서 약 18세기 이전까지 한국인들이 먹어온 김치는 백김치였다고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최근 연구 결과는 이런 정설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렇다면 두번째 궁금증이 절로 떠오릅니다. 대체 한국인들은 언제부터 매운 음식을 먹은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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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치 미스터리

 우리는 언제부터 매운 고추를 먹었을까. 오래전 할머니들은 말씀하셨다. “왜놈들이 처음에 고추를 먹어 보니 이게 독(毒)인 거야. 그래서 조선 사람들을 죽이려고 임진란 때 고추 종자를 뿌렸지. 그런데 조선 사람들한테는 독은커녕 입맛에 잘 맞아 널리 퍼진 거야.”

고추가 16세기 말 일본에서 전해졌다는 것은 학계에서도 정설이었다. 하지만 한국식품연구원 권대영 박사팀이 반론을 제기했다. '시경'이나 3세기 문헌인 '삼국지 위지동이전' 이후 초(椒)라는 식물이 수많은 문헌에 등장하며, 최세진의 『훈몽자회』(1527)에도 이 글자의 뜻이 '고쵸 초'라고 기록돼 있는 등 본래부터 한국에는 고유종의 고추가 있어 널리 식용으로 사용됐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고추의 도입 시기를 기록한 가장 중요한 문건은 이수광의 『지봉유설』(1614)에 나오는 '남만초(南蠻椒)는 독이 있으며 왜국을 통해 들어와 왜개자(倭芥子)라고도 불린다'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권 박사는 남만초와 왜개자는 모두 우리가 먹는 고추(椒)와 다른 식물이라고 주장했다. 기존 연구자들이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발견한 고추와 한국산 고추는 전혀 다른 품종일 가능성을 배제하는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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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입맛을 감안할 때 16세기 이전에도 고추가 있었다 해서 놀랄 일은 아니다. 다만 이어지는 궁금증은 각종 음식, 특히 김치에 사용한 기록은 왜 별로 보이지 않으냐는 점이다. 1670년 발간된 한글 요리 책자인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수많은 김치 가운데서도 고추를 사용한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19세기의 문헌 『규합총서』(1809)에 나오는 김치 중에도 대부분의 종류에는 고춧가루 아닌 실고추가 들어갈 뿐이다.

『한국 음식, 그 맛있는 탄생』의 저자 김찬별은 1933년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우리는 모두 고추 중독자다'라는 기사를 인용해 새빨간 음식의 유행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기사는 '하루 세 끼의 반찬이 모두 고추로 양념돼 음식 맛까지도 모두 고추 맛으로 변해 버렸다'며 당시의 풍조를 개탄하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권대영 박사는 “고추는 소금 못잖게 김치의 장기 보존에 절대적인 조건”이라며 “김치에 고추가 사용된 것이 현재 알려진 것보다 훨씬 빨랐다는 것을 증명해 내겠다”고 의지를 보이고 있다. 과연 한국인의 매운맛 사랑은 반만년 역사에 비춰 볼 때 최근 100년 안팎의 유행일까, 아니면 면면한 전통의 결과일까. 연구 결과가 정말 기대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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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다시 한번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저는 호기심을 가진 사람일 뿐, 역사 분야에도 식품 분야에도 전문가가 아닙니다(먹는 쪽이라면 비교적 전문가에 가까울 수도...^^). 다만 우리가 먹는 음식의 기원에 궁금증을 느낀 사람일 뿐입니다.

저 연구에 관심을 가진 분들이라면 신문 기사의 요약(이런 경우 많지만 대개 심각한 오류나 생략이 있기 마련입니다)을 기대하지 마시고, 직접 연구를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www.kfri.re.kr에 가서 '사이버 홍보실 - KFRI 발간자료'로 가시면 원문을 읽어볼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기사는 일단 임란 100여년 전인 1487년 편찬된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 등 임진왜란 이전의 문서들에서 한자 ‘초(椒)’에 한글로 ‘고쵸’라는 설명이 명시돼 있다는 데 주목하고 있습니다. 저도 '훈몽자회'의 예를 들었지만, 이런 단어 분석은 크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문서에 전차(戰車)가 나온다고 해서 그 시대에 오늘날 우리가 전차라고 부르는 탱크가 있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 연구에서 가장 주목할만한 부분은 아무래도 16세기 고추 전래에 대한 의문 제기입니다. "만약 멕시코에서 나온 '아히'라는 고추가 1492년 유럽을 거쳐 한국으로 왔다면 고작 몇백년 사이에 한국 고추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종류로 바뀔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지적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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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 결과가 발표된 뒤 사계의 많은 전문가들이 '낚시다'라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가장 핵심적인 지적은 아무래도 "멕시코 산의 고추와 한국-중국의 고추가 과연 DNA 차원에서 같은 조상을 가진 것인지 검색해 보면 알 수 있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죠. 그리고 몇몇 분들이 멕시코를 원산지로 하는 고추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며, 그중 일부는 한국-중국산 고추와 같은 조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 입증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주장은 http://hosunson.egloos.com/2296323

이런 주장에 따르면 권박사님의 연구에 나오는 '한국의 고추는 콜럼버스가 멕시코에서 가져온 것과 다른 종자일 수 있다'는 가설은 원천봉쇄되는 셈입니다. 하지만 한가지 가능성을 남겨 둔다면, 고추의 도래 시기가 16세기보다는 조금 더 빨라질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단지 가능성일 뿐이지만,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는대로 15세기 초 정화의 원정대가 북미대륙 서해안에 도착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이때 고추가 이동했을 가능성도 있지 않았을까...

(뭐 물론 근거라고는 전혀 없으니까 농담으로 치시는게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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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지금까지의 정설을 따르자면 한국인들은 16세기 후반에 고추를 처음 접했고, 이 식물이 전국에 퍼지는 데에도 최소 100년 정도는 걸렸을테니 17세기 후반이나 18세기 초반에 온 국민이 고추를 식용으로 이용하게 됐을 겁니다. 그리고 그 맛에 익숙해지는 데 다시 100년 정도는 걸렸다는 얘기죠.

또 위에 예로 든 김찬별님의 '한국음식 그 맛있는 탄생' 에 나오는 내용을 보거나, 매운 떡볶이의 등장마저도 해방 이후, 심지어 6.25 이후라는 증언들을 들어 볼 때 한국인들이 매운 음식에 익숙해진 것은 그리 오랜 일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하지만 누구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래도...'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을 겁니다. 매운 음식 없으면 못 사는 한국인들이 고작 100년...? 왠지 서운하다는 마음이 드는 게 인지상정이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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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을 쓰기 위해 권대영 박사님과 통화했을 때에도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사실 내가 이 연구를 시작한 것도, 한국인이 고춧가루와 고추장을 지금처럼 먹은 것이 최근(역사적으로 최근)의 일이라는 걸 납득하기 어려워서였다. 또 소금만으로 야채의 신선도는 유지되기 힘들다. 고추는 소금 못지 않게 김치의 보관에 절대적인 요소였다. 비록 현재까지 문서상으로 확보된 근거가 없어 지금은 뭐라 말할 수가 없지만, 앞으로 연구를 계속해 반드시 한국인의 고추 식습관이 알려진 것보다 훨씬 오래된 일이라는 것을 밝혀내겠다."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존 연구가 뒤집히든, 아니면 더욱 강화되든 고추와 고춧가루의 역사는 좀 더 자세히 밝혀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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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사실 세계적으로 볼 때 한국인의 매운 맛 사랑은 최정상급은 아닙니다. 상위 30% 이내에는 확실히 들겠지만 10% 이내에 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한국산 고추 자체가 그리 맵지 않기 때문이죠. 흔히 '쥐똥고추'라고 불리는 동남아산 고추만 맛본 분들이라도 아마 이 말에 절대 반대하시지 않을 겁니다. 아마도 매운 것을 잘 못 먹는 일본사람이나 앵글로색슨계의 백인(라틴계는 매운 맛에 익숙하죠)들 때문에 한국 사람들은 "매운 거라면 우리가 독보적"이라고 생각하게 됐을 것도 같습니다.

(물론 최근 몇년 사이에도 한국인이 감당할 수 있는 매운 맛의 강도는 나날이 드높아져 가고 있는 듯 합니다. 불닭이라는 음식을 가장한 고문 도구의 등장도 그렇고, 매운 맛의 정수인 수입 캡사이신액이 식당 주방에서 공공연히 쓰인다는 얘기도 들리고...

그렇다면 계속 떠오르는 의문. 대체 왜 하필 20세기에 들어와서 한국인들은 매운 맛에 눈을 뜨고 나름 즐기게 됐을까요? 일제 식민지의 고초를 견디기 위해서? 아니면 와신상담의 심정으로? 역시 연구자들의 분발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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