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 열릴 예정이던 X-재팬의 내한공연이 또 연기됐습니다. 지난해 8월15일, 11월에 이어 세번째 바뀐 날짜가 또 연기라니, 정말 팬들의 입장에선 화가 날만도 합니다. 일본에서 흘러 들어 온 얘기로는 한국 공연만 그렇게 된 게 아니라니 어쩔 수 없는 일 같기도 하고.
이번 연기(사실상 취소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는 멤버간의 불화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베이시스트 히스의 소속사와의 문제라는 얘기도 있어서 확실치는 않습니다. 물론 지난해 3월 도쿄돔에서 열린 10년만의 재결합 콘서트에서도 요시키가 중간에 실신하는 등 그룹의 핵인 요시키의 건강 문제는 항상 돌발 변수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국과의 인연이 계속 꼬이는 것은 아무래도 뭔가 악연이 존재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X-재팬의 열렬한 팬은 절대 아니었지만, 아쉬움 때문에 쓴 글입니다.
제목:엑스 재팬
서태지라는 예명이 무슨 뜻인지 사람들이 궁금해 하던 시절, 그 이름이 일본 록 밴드 엑스 재팬의 베이시스트 타이지(Taiji)에게서 따 온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 적이 있었다.
서태지도 한때 록 그룹 시나위에서 베이스 기타를 쳤으므로 꽤 그럴싸한 얘기였지만 팬들은 엑스 재팬이라는 상징적인 이름 탓인지 "서태지를 일본 음악의 주구로 매도하려는 흠집내기"라며 격분했다. 결국 서태지 본인이 "그렇지 않다"고 공식 해명하면서 없던 일이 됐다.
그 엑스 재팬의 첫 내한공연이 또 연기됐다. 당초 3월21, 22일 양일간 서울에서 공연할 예정이던 이들은 돌연 13일 아침 자신들의 홈페이지에 일방적으로 공연 연기를 선언했다. 5월로 잡혔던 일본 공연까지도 환불에 들어갔다니 언제 다시 열릴지 모를 일이다.
한국에서 일본 음악을 들을 수 없던 시절, 1985년 결성된 엑스 재팬은 '일본 음악을 개방하는 순간 한국 대중음악은 고사해 버릴 것'이라는 주장의 근거처럼 보였다.
그만치 당시 이들이 보여준 음악적 성과는 국내 음악과 수준차가 있었다. 이들의 히트곡 '엔들리스 레인'이나 '세이 애니싱'은 처음 듣는 사람에게도 왠지 익숙한 느낌을 준다. 1990년대 초반, 수많은 한국의 작곡가와 가수들이 이들의 노래를 번안하다시피 그냥 베껴 불렀기 때문이다.
정식 수입은 꿈도 꿀 수 없던 무렵에도 서울 남대문 지하상가에선 이들의 베스트 앨범인 '베스트 오브 엑스(B.O.X)'를 구할 수 있었다. 보따리 장사들이 한국에 들여 온 양만 20만장 정도는 될 거란 추측이 나돌았다. 세월이 흘러 1998년부터 일본 대중음악이 순차 개방됐을 때 가장 먼저 발매된 음반도 바로 저 B.O.X 앨범의 연주곡 버전이었다.
개방에도 불구하고 한국 대중음악은 전혀 타격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한류라는 이름으로 한국 가수들이 일본에 진출해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하지만 엑스 재팬의 모습을 한국에서 볼 수는 없었다. 이들은 1997년 해체를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지난해 3월 재결성 선언과 함께 8월15일 잠실 주경기장 공연이 추진됐지만 "광복절날 서울에서 일본 밴드가 공연한다니 말이 되느냐"는 잡음만 쏟아졌다. 다시 11월로, 3월로 재차 연기된 공연은 멤버간 불화설 속에 또다시 무기 연기됐다. 서울에서 이들의 공연을 보는 일은 참 지난하기만 하다. 잠잠하다가도 한 순간 어디선가 터져나오는 망언으로 꼬여 드는 한일관계처럼. (끝)
1998년 이전 일본 대중음악의 한국 유입을 막은 것은 사실 꽤나 근거 없는 두려움, 무시할 수 없는 적대감, 그리고 한국 가요 제작자들의 장삿속이었다는 걸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을 겁니다.
지금도 남아 있는 적대감에 대해서는 사실 한국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 토를 달고 싶지 않습니다. 저 자신도 1980년대 학교를 다니면서, 안전지대나 튜브의 노래를 듣는 친구들에게 침을 뱉고 싶었으니 말입니다. 그 노래들이 엇비슷한 한국 가요로 개편되어 나온다는 건 굳이 외면하고 싶었습니다.
이런 적대감을 해소시켜 준 것이 카시오페아와 T-스퀘어였고, 은근히 그 음악 잘 한다는 X-재팬에도 관심이 쏠렸습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의 음악 구하기는 하늘의 별따기였죠. 그래도 90년대라 일본에 다녀온 사람들은 대개 X-재팬의 싱글들이나 'Blue Blood', 'Jealousy' 앨범을 사 들여 오곤 했습니다. 물론 유입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고 국내에서 X-재팬의 붐이 절정을 이룬 건 1996년, 위에서 말한 B.O.X 앨범의 발매 이후로 기억합니다.
하지만 이들이 국내에서 인정받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죠. 일본 출신의 록 밴드 라우드니스가 80년대 중반 영어 가사의 노래들만 부른다는 조건으로 내한 공연에 성공한 적도 있었기 때문에 90년대의 젊은이들 사이에는 X-재팬의 내한공연이 언제쯤 열릴 지도 모른다는 루머가 수시로 등장했지만, 실제 가능성은 별로 없는 얘기였습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죠.
이들이 영어로만 노래를 했대도 아마 마찬가지였을겁니다. 뭣보다 X-재팬이라는 이름, 요상한 화장과 요란한 머리 모양이 당시의 '어르신'들에겐 끔찍하게 여겨졌을 것이기 때문이죠. 서태지도 '복장과 두발 상태 불량'을 이유로 방송 출연 금지를 당하던 게 90년대의 한국이었습니다.
근거없는 두려움이나 장삿속에 대해선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듯 합니다. 결과를 볼 때 개방은 한국 대중음악의 수준 향상을 가져왔고, 시장의 확대 측면에서도 일본보다는 한국 쪽에 훨씬 큰 득이 됐습니다. 표절 사태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전처럼 '표절 아닌게 없다'는 수준에서는 크게 벗어났습니다.
1998년부터 2004년까지 개방은 천천히 이뤄졌습니다. 그중 관심 가질만 한건 2000년 초, 1998년 2000명 이하의 공연장에서만 가능했던 일본 가수의 국내 공연 관객 제한이 없어진 조치였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국 땅을 처음으로 밟은 빅 스타는 차게&아스카였습니다. 이들의 인기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상징적인 면을 감안하면 역시 이 때 왔어야 하는 건 X-재팬이 아니었나 싶지만, 그건 불가능했습니다. 1997년 라스트 라이브 이후 해체된 상태였기 때문이죠.
그 뒤로 11년, 2008년 8월 15일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열릴 뻔 했던' 공연은 '광복절에 쪽바리들이...'라는 여론과 함께 사라졌고, 이후 요시키의 건강이 다시 악화됐습니다. 이제는 정말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공연이 되어 버린 셈입니다.
이들이 한국 무대에 한번 서야 그 길고 길었던 상호 불신과 고집을 나날에 한번 쉼표가 찍힌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만, 재주의 부족으로 저 짧은 글에는 여운만 남겼습니다. 그리고 '요상한 화장을 한 일본 딴따라들'을 병균 취급하던 시대에 대한 추억도 잠깐 짚어 보고 싶었습니다.
1992년 1월 도쿄돔에서 열린 'On the Verge of Destruction 1992.1.7 Tokyo Dome Live'를 다시 봤습니다. 아무래도 이들의 전성기는 타이지가 함께 했던, 'Jealousy' 앨범이 나왔던 90년대 초 까지라는 생각입니다.
92년 라이브는 유튜브에서 잘 보이지 않는군요. 많이 알려진 1997년 라스트 라이브 때의 'Endless Rain'입니다. 라이브에서의 이 노래는 정말 endless하게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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