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장 드라마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당연히 '막장성을 갖춘 드라마', 혹은 '막장스러운 드라마'라고 규정해야 할 겁니다. 막장성이란 스토리상의 막장성(이른바 작가가 원하는 것은 뭐든 이뤄지는 비비디 바비디 부 스토리), 연기의 막장성(소리만 지르고 막말로 싸늘하게 쏘아붙이기만 하면 '탁월한 감정 연기'냐), 연출이나 설정의 막장성(정말 점만 붙이면 아무도 못 알아볼 거라고 생각해?) 등등 여러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이 모두를 갖춘 막강 드라마도 있겠죠.
그런데 요즘 이 막장성 풍부한 드라마들 가운데 희한한 공통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제목만 보고 눈치채신 분들도 있겠지만, 드라마에서 죽는 사람이 없다는 겁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모두 살아 돌아오고 있다는 거죠. 이게 바로 공포영화와의 공통점입니다. '13일의 금요일'이나 '할로윈', '나이트메어' 시리즈를 보신 분이라면 무슨 말인지 금방 아시겠죠.
그런 공포영화들을 보면 많은 주인공들이 범인의 생사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보는 관객들을 짜증나게 합니다. 목을 조른다든가, 몸에 불을 지른다든가, 쇠몽둥이로 머리를 때린다든가 하는 방식은 도대체 소용이 없습니다. 심지어 총에 맞는 것도 불충분합니다. 사지가 붙어 있기만 하면 괴물은 무조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공포영화의 원칙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가장 확실한 건 '13일의 금요일' 1편 이후로 머리를 날리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 버리면 제작자들이 속편을 만들지 못하죠. 그래서 항상 제작자들은 눈물을 머금고 공포영화 출연자들을 바보로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대략 어정쩡하게 죽여서 꼭 다시 살아나게 만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막장드라마 출연자들도 마찬가집니다. 요즘 드라마들 속에서 죽은 사람들은 죄다 살아 돌아옵니다. 막장계의 선두주자인 '아내의 유혹'에 나오는 장서희와 채영인은 모두 죽음에도 돌아온 사람들입니다. 여기다 하나 더 추가한다면 이 드라마의 세계에선 아무리 아이를 막 놓아 기르다 잃어버려도 아무 걱정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아이들은 모두 무럭무럭 잘 자라나서 어느새 부모의 주변으로 돌아와 있곤 합니다. (참 편하죠.)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 아버지가 쓰러져 있어도 시청자들은 아무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비탄에 젖은 출연자들이 지겨울 뿐입니다. 깔끔한 연출과 중년 연기자들의 호연에 가려져 있지만 사실은 '미워도 다시한번'의 막장성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 드라마에서도 최명길의 옛 애인 선우재덕은 '당연히' 살아 있습니다. 하긴 도입부에서부터 냄새를 적잖이 풍겼죠.
'카인과 아벨'에 나오는 소지섭의 죽음 연출에 이르면 짜증이 날 뿐입니다. 대체 이 드라마에서 소지섭이 정말로 죽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과연 몇명이나 있을까요. 이렇게 뻔하다 못해 뻔뻔한 진행에도 시청률이 오르고 있다는게 참 안습입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후손들이 아무 고민없이 브라운관을 누비고 다니고 있을까요. 좀 전에 썼던 글입니다.
제목: 막장 드라마
남편이 정부와 작당해 아내를 죽이려 하는데 그 아내는 살아 돌아와 다른 인물로 변신해 복수를 노린다. 그런데 그 변신이란 게 얄궂어서 얼굴에 점 하나 찍었을 뿐인데 남편은 물론 부모와 친오빠조차도 알아보지 못한다. 6개월 만에 4개 국어와 골프, 수영을 마스터하는 것 정도는 기본이다.
SBS TV 일일드라마 ‘아내의 유혹’.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울고 갈 황당무계한 이야기지만 요즘 이 드라마를 모르면 주부들 사이에선 대화가 힘들다.
이 작품의 성공에 힘입어 소위 ‘막장 드라마’들이 안방극장을 장악하고 있다. 채널을 돌려도 소용이 없다. 등장인물의 내면묘사나 정교한 내러티브는 모두 뒷전, 비정상적인 인물과 개연성을 무시한 사건 진행이 드라마마다 넘쳐난다.
국어사전에서 ‘막장’을 찾아보면 ‘갱도의 막다른 곳’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인생 막장’이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더 이상 갈 데가 없을 정도로 원색적이고 노골적인 선정성이 ‘막장 드라마’의 특징이다.
비판이 쏟아지지만 방송사는 아랑곳없다. 시청률 40%를 넘나들며 광고를 앞뒤로 꽉꽉 붙여주는 효자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셰익스피어 극에도 소위 ‘막장성 요소’는 있다”며 이 계열의 드라마들을 옹호하는 논리까지 등장했다.
어찌 보면 맞는 말이다. ‘리처드 3세’의 주인공 리처드는 자신의 손에 남편을 잃은 여인에게 뻔뻔스레 청혼하는가 하면 어머니와 형수의 저주를 받으면서 조카딸에게 청혼한다. 이 밖에도 남녀 쌍둥이를 구별하지 못하는 이야기(‘십이야’), 죽은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신비의 약 때문에 벌어지는 비극(‘로미오와 줄리엣’) 정도는 쉽게 발견된다.
물론 대문호의 작품에서도 이런 요소가 보이는데 한낱 TV 드라마에서 그 이상 무엇을 기대하겠느냐는 말을 하자는 건 아니다. 다른 논의를 다 미뤄 두고, 셰익스피어가 활동하던 시대가 언제인지만 살펴보자.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 우리나라로 치면 ‘홍길동전’과 비슷한 연대다. 한마디로 막장 드라마들은 시청자를 400년 전의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이 생각 없이 즐길 수 있는 막장성에 의존하는 것은 아무래도 불황의 영향일 듯하다. 뉴욕 브로드웨이에서도 경기침체 탓으로 대형 뮤지컬들이 잇따라 막을 내리고, 스트립쇼 위주의 오락 공연 벌레스크(burlesque)가 거의 100년 만에 다시 전성기를 맞고 있다는 소식이다. 한국도 세계의 첨단 조류인 ‘대중문화 퇴행’에 동참하고 있다는 걸 위안으로 삼아야 할까. (끝)
윗글에 나오는 벌레스크란 뮤지컬의 초기 시대에 등장했던, 노래와 춤이 있는 극장용의 버라이어티 쇼, 유흥거리입니다. 이렇게만 쓰면 보더빌(vaudeville)과 차이가 없게 보이지만, 대략 벌레스크는 여자의 나체나 나체에 가까운 모습을 전면에 내세운 성인용 오락거리인 반면 보더빌은 줄거리와 노래, 춤에다 마술 등의 볼거리까지 결합해 보다 수용층이 넓은 형태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아무튼 세상이 어려워지면서 사람들이 생각없이 볼 수 있는 막장성에 의존하고 있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보는 사람들이 생각이 없어진다고 해서 만드는 사람들까지 생각이 없어서는 안되겠죠.
p.s. 어찌어찌 하다 보니 이 글은 이쪽으로 옮겨 오는데 시간이 살짝 걸렸습니다. 그 사이에 어떤 공공기관장께서 '막장이란 광부들의 땀과 노력이 담긴 장소'라며 '막장드라마라는 표현을 자제해 달라'고 말씀하셨더군요. 하지만 그냥 이 말은 영어의 dead-end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말이라고 생각하는게 좋을 듯 할 뿐, 저런 식의 확대 해석은 오히려 좀 과민반응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이러다간 '개판', '개고생' '개수작' 등의 말이 '충성스럽고 사랑스러운 동물인 개에 대한 몰이해에서 온 표현이니 자제하자'는 말이 나오지 말란 법이 없을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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