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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아시다시피 사상 첫 남북 동시 월드컵 진출이라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사실 우리가 지난 1986년 이후 단 한번의 실패도 없이(물론 2002년은 개최국이라 예선을 거치지 않았지만) 매번 월드컵에 진출하느라고 이걸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서 그렇지, 월드컵 본선 진출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일각에서는 나라 수에 비해 실력이 떨어지는 아시아에 너무 많은 티켓을 주는게 아니냐(현재 4매)고 하기도 합니다만, 아무튼 북한이 새로 본선 진출국 명단에 이름을 올린 건 꽤 대단한 일이라고 할 만 합니다.

북한이 마지막으로 출전한 월드컵은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축구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박두익이라는 북한의 축구 영웅과 8강 진출이라는 위업을 기억할 것입니다. 이 무렵, 한국 축구는 북한을 엄청나게 두려워했습니다. 물론 실제로 붙었다면 어떻게든 우열이 가려졌겠지만, 70년대까지의 남북축구사는 기를 쓰고 북한과의 대결을 피해 온 과정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간략하게 그 세월을 정리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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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남북축구 잔혹사

1970년대까지 축구인들에게 남북 대결은 한·일전보다 두려운 경기였다. 자존심을 넘어 ‘죽어도 질 수 없는’ 경기였기 때문이다.

65년. 북한이 잉글랜드 월드컵 예선 참가를 선언하자 한국은 불참을 선택했다. 혹시 질지도 모르니 아예 안 붙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예선을 통과한 북한은 이듬해 본선에서도 강호 이탈리아를 1-0으로 꺾으며 8강에 진출해 세계 축구에 파란을 일으켰다. 충격을 받은 한국은 전열을 정비해 70년 멕시코 월드컵에 도전했지만 이번엔 북한이 발을 뺐다.

박두익과 북한 축구의 사다리 전법(공을 잡은 선수의 상-중-하 세 방향을 세 선수가 동시에 마크하는 것)은 익히 알려진 터이니 따로 설명을 달지 않습니다. 아무튼 한국은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 사상 처음 출전했고, 58년과 62년에는 석연찮은 이유로 예선에 참가하지 못했습니다. 두 해 중 한번은 서류 접수 실수로 참가하지 못했다는 설도 있죠.

아무튼 1965년, FIFA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 예선을 캄보디아에서 치르겠다고 발표했는데, 이 예선에 북한이 참가한다는 이유로 한국은 발을 뺍니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의 한국은 북한에게 경제 면에서도 절대 우위를 장담하기 힘들던 시절입니다. 지금은 '축구 쯤이야...'지만 당시엔 '축구까지 지면'이란 시각이 있었던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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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것이 바로 전설의 사다리 전법. 근데 대체 저게 실전에서 가능할까 하는 생각도...

결국 한국은 제재를 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대회를 보이코트했고, 북한은 한국이 빠진 예선을 쉽게 통과해 본선에서 파란을 일으킵니다. 아, 참고로 당시엔 본선 진출국이 16개국이었으므로 예선만 통과하면 8강이었습니다. 8강전에선 에우제비오가 이끄는 포르투갈에게 패해 탈락했죠.

북한 축구의 선전 때문에 중앙정보부가 국내 최고 스타들을 한 팀에 모아 '양지팀'을 관리했다는 것 또한 유명한 얘깁니다. 양지팀 덕분에 자신감에 찬 한국은 1970년 예선에 참가하지만 북한이 이번엔 불참합니다.

북한 축구가 처음 아시안게임에 등장한 74년 테헤란. 대회 개막을 2주 앞두고 광복절 경축식장에서 대통령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저격으로 서거한 뒤끝이었다. 굳이 북한과 위험천만한 대결을 벌일 이유가 없다는 의견이 대세였고, 한국은 대회 내내 북한과의 대진에만 신경 쓰다가 석연찮은 연패로 수상권에서 멀어졌다.

이때까지도 '만약 이런 정치상황에서 북한에게 혹시 지기라도 한다면'이란 생각이 굉장히 심각하게 받아들여졌다는군요. 그러다 보니 한국은 조별 예선 마지막 경기인 쿠웨이트 전에서, 객관적 전력에서 앞서 있다는 평에도 불구하고 0대4로 대패하고 맙니다. 만약 이 경기를 이기면 다른 조에서 올라올 북한과 2차 예선에서 같은 조가 될 상황이었죠. 하지만 한번 북한을 패한 뒤 두번째 대결도 피하기 위해 맥빠진 경기를 벌이다 결국 2차 예선에서 탈락해버립니다.

4년 뒤 78년 방콕 아시안게임. 수퍼스타 차범근을 앞세운 한국은 대결을 피할 이유가 없었다. 양팀은 승승장구 끝에 결승에서 맞붙었고 접전 끝에 0-0으로 비겨 공동 우승이 결정됐다.

차범근을 앞세운 한국 축구는 아시아 최정상의 자리에 올라섰지만 1974년과 78년 월드컵 예선에서 두번 모두 호주에게 결정적인 순간 역전을 허용하며 월드컵 출전권을 빼앗깁니다. 북한은 74년 예선에 참가하지만 최종 예선까지 도달하지 못해 한국과 맞붙을 기회는 없었습니다.

자신감이 가득한 한국은 마침내 1978년, 북한과의 대결을 두려워하지 않고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노립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결승전에서 만나게 된 겁니다. 양쪽 모두 너무나 부담스러운 경기였으므로, 답답할 정도로 수비 위주의 경기를 펼칩니다. 결국 결과는 누이 좋고 매부 좋은 0대0 공동 우승.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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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대에서도 신경전은 계속됐다. ‘한국축구 100년사’에서 당시 대표팀 주장이었던 김호곤(현 울산 현대 감독)은 “북한 주장에게 먼저 올라가라고 양보했지만 그는 내가 올라설 자리를 주지 않았다. 오히려 북한 골키퍼는 나를 밀어 떨어뜨리기도 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시상대에 오른 김호곤은 “우리 손 잡읍시다”고 제의, 두 사람은 웃는 얼굴로 어깨동무를 하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렇게 해서 사상 첫 남북대결은 해피엔딩이 됩니다. 그리고 별 상관 없는 얘기지만 바로 저 경기 직후 차범근은 분데스리가에 진출, 한국 축구를 세계에 알리죠.

그 뒤로 남북 대결은 흔한 일이 됐고 긴장은 사라졌다. 오히려 93년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월드컵 예선 최종전에서 북한은 한국에 0-3으로 대패, 한국이 기적적으로 일본을 제치고 미국 월드컵에 진출하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지난해 열린 남아공 월드컵 1차 예선에서 북한은 평양에 태극기와 애국가를 들일 수 없다며 남한과의 홈 경기를 거부, 물의를 빚기도 했다.

일본이 '도하의 참극'이라고 부르는 사건입니다. 일본의 첫 월드컵 본선 진출과 한국의 탈락이 유력한 상황, 한국은 1승2무1패로 승점 4(당시에는 승이 2점, 무가 1점), 일본은 2승1무1패로 승점 5점으로 각각 한경기씩을 남겨 두고 있었습니다. 한국은 북한과의 최종전을 무조건 큰 점수차로 이겨야 했고, 설혹 한국이 이긴다 해도 일본이 이라크와의 최종전을 이기면 일본이 올라가는 상황입니다. 총 6개국 중 탈락이 확정된 것은 북한 뿐.

한국-북한전. 전반을 0-0으로 비기고 하프 타임이 되자 "점잖기로 소문난 김호 감독이 발길질로 머리를 걷어차더라"고 홍명보가 뒷날 회고할 정도로 한국 라커는 "지면 죽는다"는 분위기가 감돌았다고 합니다. 북한이 과연 의도적으로 봐주려고 한 것인지 아닌지는 아직까지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 없지만, 아무튼 한국은 후반전에 대분발, 세 골을 넣어 3대0으로 경기를 마무리합니다.

하지만 같은 시간에 열리고 있는 일본-이라크전도 일본이 2-1로 이기고 있는 상황. 결국 3대0으로 이기고도 쓸쓸히 그라운드를 빠져 나오던 한국 선수들은 벤치의 후보 선수들이 벌떡 일어나는 것을 보고 함께 고함을 지릅니다. 종료 30초를 남기고 이라크의 자파르가 기적같은 동점골을 터뜨린 것이죠. 이렇게 해서 한국과 일본은 승점 6으로 동점이 되지만 북한전에서 넣은 세 골 덕분에 한국이 득실차로 94년 월드컵에 진출합니다. 아마도 해방후 남한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 가장 고마운 마음을 가진 것이 이때가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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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지난 반세기 간의 남북 축구 대결사는 양자 간의 파란만장한 사연을 압축해 보여 주는 듯하다. 곡절 끝에 남북한은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 사상 최초로 동반 진출하게 됐다. 그저 본선에서도 양측 모두 선전을 거듭해 78년의 어깨동무가 재현되길 바랄 뿐이다. 

2010년 대회 예선에선 한국이 마지막까지 이란 전에서 무승부를 이끌어 낸 것이 북한과의 동반 진출을 일궈냈습니다. 제발 이게 조금이라도 경색 국면을 푸는데 도움이 됐으면 하는 것은 국민 모두의 바람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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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남북한이 다시 본선에서 대결을 벌이려면 둘 다 16강 이상의 성적을 내야 하는데 그건 좀 쉽지 않겠군요. '어깨동무'는 경기장 밖에서 하는 것도 괜찮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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