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얼마 전 두 작가 중 하나인 박상연 작가가 한 인터뷰에서 '선덕여왕'이 너무 기록된 역사를 무시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 "가능하면 사람들이 이를 계기로 더 많이 이야기하고, 더 많이 역사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대답했더군요.

솔직히 참 무책임한 얘기입니다. 사극도 드라마이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자유로운 역사 해석을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신라시대를 조명한 사실상 두번째 사극(그리고 첫번째는 많은 사람들이 아예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삼국기'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좀 더 역사의 '의미'에 충실한 드라마가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요즘 춘추의 역할이 드라마의 활력소가 되고 있긴 합니다만, 이 드라마의 춘추 해석은 좀 무리한 구석이 많아 보입니다. 드라마 속의 춘추는 스스로 '왕이 되겠다'며 나서고 있지만 진평왕 치하의 춘추는 그렇게 마음 편한 상태였을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영조 후기의 세손 이산과 비슷한 처지였다고 보는게 좋을 듯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태종무열왕 김춘추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太宗武烈王立. 諱春秋, 眞智王子伊龍春之子也.母, 天明夫人, 眞平王女

태종무열왕이 즉위했다. 이름은 춘추. 진지왕의 아들인 용춘의 아들이다. 어머니 천명부인은 진평왕의 딸이다. (드라마만 보시던 분은 용춘은 숙부인데 무슨소린가 하시겠지만 '삼국사기'는 용수와 용춘을 동일인물로 보고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신라 26대 왕인 진평왕이 아들이 없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이로써 남자 성골이 사라졌고,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 등장합니다. 여왕 등극에 반대하는 반란이 일어났을 정도로 여자가 왕이 되는 것은 누구에게도 쉽게 환영받지는 못하는 사건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만약 이때 27대 왕인 덕만공주=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지 않았다면 과연 누가 왕이 됐어야 했을까요. 남자 중에서 왕위에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춘추입니다. 폐위당한 진지왕의 손자이며, 어머니 또한 진평왕의 딸이므로 사실상 성골입니다.

그렇다면 왜 춘추가 있는데도 덕만공주가 왕위에 올랐을까요?



 진흥왕(24대왕) -   동륜태자           -   진평왕(26대왕)      -   덕만(27대왕)
                           진지왕(25대왕)   -   용수(용춘)           -   춘추(29대왕)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모계에만 주목했기 때문에 덕만공주가 춘추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저 따뜻하기만 합니다. '비명에 간 언니 천명공주의 아들'이라는 시선만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계에 따라 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이들은 6촌 남매의 같은 항렬인 왕위 경쟁자입니다. 덕만공주 대신 춘추가 왕위에 올라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 왜 춘추는 바로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까요.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진평왕과 당시의 지배 세력들이 춘추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그 정도로 - 여자를 왕위에 올려 놓을 정도로 - 꺼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춘추와 춘추의 아버지 용수(혹은 용춘)는 진지왕이 폐위당하지 않았다면 적통으로 왕위에 올랐을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용수의 장인인 진평왕은 진지왕과 그 후손들인 용수(용춘)의 왕 자리를 빼앗은 인물인 것이죠. 아울러 진평왕을 왕으로 만든 사람들은 모두 용수-춘추 부자의 적들인 셈입니다.

진평왕은 숙부인 진지왕을 내쫓은 대신 그 아들이며 자신의 사촌인 용수를 사위로 삼아 포용하는 정책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왕위를 물려 줄 정도로 믿지는 않았습니다. 설사 진평왕이 믿었다 해도 진지왕을 내쫓고 진평왕을 옹립한 세력들은 용수를 왕위에 올려놓는 것은 자신들의 목을 용수의 정치적 보복 앞에 내놓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래서 춘추는 감히 덕만의 경쟁자가 될 수 없었던 겁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대목에서 용수-춘추는 한 다리 건너 조선시대 정조의 위치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왕위에 올랐으나 이내 빼앗긴 아버지의 정치적 유산을 갖고 있는 신세였기 때문입니다.

비록 진평왕이 용수를 사위로 삼으며 감싸긴 했지만, 폐위된 왕의 자손이라는 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 죽음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존재들입니다. 또 진평왕을 왕위에 올려놓은 사람들은 춘추가 왕위에 오르면 정치 보복이 시작될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이라는 면에서, 영조때의 노론 벽파와 다를 게 없습니다.

결국 용수, 용춘, 춘추가 살아남는 길은 '왕위에는 아무런 욕심이 없음을 강조'하는 길 뿐입니다. 다른 마음이 없음을 증명하고 진평왕-선덕여왕에게 적극 협조하는 길 뿐이죠. 이 대목에서 '나도 왕위계승권이 있다'고 설치는 길은 '나를 죽여주세요'하는 거나 마찬가지일겁니다. 똑똑하기로 유명했던 춘추가 안 그래도 주목을 받는 처지에서 이런 자살행위를 할리는 없겠죠.

오히려 춘추는 대외적으로 신라의 위치를 높이는 외교 활동으로 큰 공을 세우고, 안으로는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신라 무장 세력의 핵심인 유신과 연합합니다. 이 연합은 자신이 유신의 여동생과 결혼하고 거기서 태어난 조카를 다시 유신에게 시집보내는 겹사둔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런 연합은 선덕여왕 사망 직전에 발발한 비담-염종의 난의 성격을 보여줍니다. 대체 선덕여왕의 치세에 반대한 세력이라면 왜 여왕이 죽기 직전에 난을 일으켰을까요. 이것은 난의 상대가 여왕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비담-염종은 이미 신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춘추-유신의 세력에 대항해 난을 일으킨 것입니다. 즉 비담과 염종의 난은 춘추의 등극을 원하지 않고 있던, 진지왕 폐위 세력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던 것이죠.

비담과 염종의 난을 진압하기에 앞서 춘추-유신은 진덕여왕을 옹립, 자신들이 '왕위에 사심이 없음'을 천명하고 반대세력을 제거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7년 동안 이 겹사둔 콤비는 신라 안팎을 다져 춘추의 등극을 위한 준비를 마칩니다. 결국 이런 오랜 준비의 결과로 춘추, 즉 태종무열왕 이후 약 100년간 이 가문에 도전할 사람은 없어지고 맙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니깐 이런 식의 희화화도 좋고, 촌장의 목을 한방에 날리는 결단력있는 여왕 덕만의 모습도 좋습니다. 다 좋지만, 역사가 가야 할 방향을 너무 엉뚱하게 돌려 놓는 시도는 좀 곤란하다고 하겠습니다.

물론 '천추태후'와 비교하면 양반이지만 말입니다.


방문의 완성은 한방의 추천!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