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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처럼 나비처럼'을 보면서 중간에 몇번 웃었습니다. 이 영화는 명성황후 민씨와 그 호위무사 사이의 멜로드라마입니다. 또한 무려 90억원의 순 제작비가 투입된 대작 에픽이기도 합니다. 순 제작비가 90억원이라는 것은 홍보와 마케팅 비용을 포함하면 실제 제작비는 그보다 훨씬 올라간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가끔 어떤 영화는 돈을 잔뜩 들이고도 도대체 어디에 제작비가 들었을까 보는 이를 궁금하게 하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90억원이 들어간 영화로 보일까요? 네. 어디에 돈이 들었는지 확실히 보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과연 그 돈이 제대로 쓰일 곳에 쓰였느냐는 질문에는 대답이 좀 궁색해집니다.

다 아시다시피 이 영화의 출발점은 지난 2002년 드라마 '명성황후'의 주제가로 쓰였던 조수미의 '나 가거든' 뮤직비디오입니다. 당시엔 정준호가 훈련대장 홍계훈에서 모티브를 따 온 호위무사로, 이미연이 명성황후 역으로 나왔죠. 불행히도 영화는 그 뮤직비디오 한편만큼의 여운을 남기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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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아버지를 잃은 소녀 자영(수애)은 대원군(천호진)의 간택을 받고 아버지와의 추억이 있는 바닷가를 찾아갑니다. 이때 늪을 헤치고 물길을 타준 사공 무명(조승우)은 수애를 보고 첫눈에 반해버립니다. 그러다 자영은 반대파의 기습을 받고, 무명이 가까스로 자영을 구해내지만 자영은 대원군이 보낸 뇌전(최재영)의 경호를 받으며 사라집니다.

어떻게든 자영의 곁에 있어야겠다고 마음먹은 무명은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 궁을 지키는 무예별감이 되어 호위를 맡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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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이 영화는 실제 시간으로 본다면 1866년 자영이 입궁할때부터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물론 아직 대한제국 선포 전이므로 사망시까지는 그냥 민비입니다)가 살해당할 때까지의 29년간을 커버합니다. 자영은 1851년생이므로 만 15세때부터 44세까지의 세월이죠. 아무 생각 없이 '불꽃처럼 나비처럼' 영화를 보신 분들은 길어야 3-4년 사이의 일이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기의 파란만장한 역사를 대원군과 명성황후의 시각에서 다룬 드라마는 꽤 여러편 있었습니다. 뭐 그렇다고 해도 마지막으로 다뤄진 것이 2002년이었으니 그 내용을 대략 기억하는 분은 많지 않았을 겁니다. 어쨌거나 이 영화를 제대로 즐기시려면 구한말 역사에 대한 지식은 아예 버리고 시작하는게 좋습니다. 아니, 최소한의 '건전한 상식'을 조금이라도 남기면 영화 감상에 아주 막대한 지장이 옵니다.

이후의 내용에는, 저는 전혀 스포일러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역사라고는 20년 전 초등학교때 배운 뒤로는 단 한번도 되새김질 한 적 없는 분들에게는 스포일러일 수도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맨 아래, P.S로 건너 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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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가 유지하고 있는 역사적 발판이라고는 '(1) 대원군은 고종의 아버지고, 자영은 고종의 아내다 (2) 중간에 임오군란(1882)이 일어나고, 그로 인해 자영은 죽을 위기를 넘긴다 (3) 을미년(1895년) 명성황후는 일본 공사 미우라가 보낸 낭인들에게 참살당한다', 이 세가지 정도입니다. 나머지 것들은 모두 무시해도 좋습니다.

그 밖의 설정과 구성은 여러가지로 실소를 자아냅니다. 그 극치는 임오군란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 한 대원군의 경복궁 진공(?)입니다. 대원군이 백주 대낮에 수천명의 군병을 이끌고 광화문을 향해 6조 앞 대로를 진격하고, 광화문과 근정전 앞의 궁내가 수비 병력으로 가득 차 있는 장면은 한국사에서는 존재하지도, 존재할 수도 없는 장면입니다. 한마디로 '황후화'나 '야연' 같은 중국식 에픽의 영향을 받은 기상천외의 유치한 장면일 뿐입니다.

그밖에도 헤아리자면 사흘 밤낮이 모자랄 정도지만 그냥 이 정도로만 해 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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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얘기하면 이 영화가 역사적 사실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제가 살짝 비꼬고 있는 것 같지만, 솔직히 말해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이 영화가 조선의 명성황후가 아니라 오로라제국의 별나라 여왕과 호위대장의 이야기래도 좋습니다. 문제는 이 영화의 내러티브 수준입니다.

전반부의 스토리는 요약하자면 '스토커 조승우와 인기를 즐기는 수애여왕'입니다. 낮에는 뱃사공, 밤에는 살인청부업자의 이중생활을 하고 있던 무명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자유분방하고 씩씩한 미녀 자영에게 반나절만에 홀딱 빠져버립니다.

생전 연애라는 것을 해보지 않은 무명은 자기 페이스대로 스토킹에다 납치까지, 정상적인 연애 감정에서는 있어선 안될 행위들을 마구 저지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를 따끔하게 혼내고 잘라 버려야 할 자영양은 은근히 그의 마음 속 불꽃에 땔감을 던지기 시작합니다. 정작 제목대로라면 자영이 불꽃이고, 그 불꽃에 너무 겁없이 다가간 무명이 나비겠지만 이 전개 과정을 보면 누가 불꽃이고 누가 나비인지 불분명합니다. 둘 다 너무나 무모하고 무책임합니다. (아, 사랑이란 원래 그런 거라구요? 그렇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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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남편에 대한 애정 따위는 없지만 나라를 구할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왕비 생활을 계속해야 한다'는 자영과 '난 그런 건 모르니 그냥 어디로 둘이 훌훌 떠나면 안되겠니'의 무명 사이는 끝없이 그냥 평행선을 탑니다. 여기에 '그냥 똑똑한 것 같아서 호감이 갔는데 알고 보니 내 마누라였고, 다른 놈이 좋아하는 듯 하니 기분나빠서 내거라는 걸 분명히 해야겠다'는 고종까지 합세해 초등학교 2학년 수준의 멜로드라마에서 한몫을 합니다.

결국 도를 넘어선 무명은 주제를 잊고 엄한 남편과 아내의 잠자리까지 질투하기 시작합니다(뭐 따지자는 건 아니지만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 시기에 고종과 자영은 이미 다섯 자녀(모두 어려서 잃고 뒷날 순종이 되는 세자만 생존)를 낳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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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략하게 설명해서 그렇지만, 문제는 영화를 봐도 이런 황당무계한 전개를 뒷받침해 주는 감정의 디테일은 어디서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납득이 가는 전개'의 실종입니다. 조승우나 수애 급의 배우들이 거기에 불만이 없었던 걸 보면 아마도 찍어 놓기는 한 7시간 분량을 찍어 둔 듯 하지만 7시간짜리 영화를 개봉할 수 있는 공간은 어디에도 없죠.

아예 처음부터 대본이 이 수준이었다면 조승우가 이 역할을 맡았을지도 궁금하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조승우가 출연한 작품들 중 이 정도로 극중 인물의 감정이 제멋대로에다 요령부득인 작품은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좋은 작품이 있고 좋은 배우가 있지, 배우는 잘했는데 작품은 엉망이라는게 말이 되느냐'는 얘기를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아무리 무능한 연출가도 - 혹은 연출가가 무능할수록 - 초절정 명배우가 한달 고민해서 한 연기를 학예회 수준으로 추락시킬 수 있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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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흥행 성과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등급을 보니 15세 이상 관람가더군요. 과연 15세가 넘은 분들 중에도 이 영화를 즐기실 수 있는 분이 얼마나 되느냐가 관건일 듯 합니다. 물론 제 주변 분들 중에도 '나쁘지 않다'는 분들이 몇분 있긴 했습니다. 제 경우엔 그냥 뮤직비디오는 뮤직비디오로 감상할 때가 제일 좋았던 것 같습니다.


P.S. 맨 처음으로 돌아가서 - 이 영화의 미술이며 복식은 대단히 훌륭합니다. 한마디로 화면은 참 화려하다는 데 토를 달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네. 90억원 쓴 태가 확실히 납니다. 특히 수애의 광팬이라면, '수애에게 한복이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는 충분히 즐길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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