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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기대작 중 하나였던 마이클 만 감독의 '퍼블릭 에너미'를 보고 왔습니다. 조니 뎁과 크리스천 베일이 주연하는 갱스터 무비라는데 안 보고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었죠. 이름 값으로 놓고 보면 왕년에 만 감독이 '히트'에서 이뤄냈던 로버트 드 니로와 알 파치노의 경연 이후 최강의 진검 승부라고 부를 만 합니다.

이 영화는 1930년대,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Bonnie and Clyde)'로 잘 알려진 남녀 커플 강도 보니 파커와 클라이드 배로와 함께 가장 유명한 범죄자였던 존 딜린저의 일대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1930년대는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대공황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을 때이면서 미국의 FBI가 오늘날의 명성을 차지하기 시작한 시기, 그리고 제임스 캐그니 주연의 오리지널 영화 '퍼블릭 에너미'가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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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강도 존 딜린저(조니 뎁)는 단정한 용모와 세련된 옷차림, 그리고 여자에겐 손을 대지 않고 은행을 털 때에도 저금하러 온 일반 고객의 지갑은 건드리지 않는 독특한 스타일로 팝스타 못잖은 명성을 누립니다. 그런 그는 어느날 클럽에서 미모의 빌리(마리옹 꼬띠야르)를 보고 한눈에 반합니다. 결국 딜린저와 빌리는 연인이 됩니다.

한편 쉴새없는 딜린저의 발호로 곤경에 몰린 FBI 국장 후버(존 크루덥)는 딜린저 못잖게 유명한 갱인 프리티보이를 사살한 명수사관 퍼기스(크리스찬 베일)를 FBI 시카고 지부장으로 임명하고 딜린저 체포의 전권을 맡깁니다. 일반 경찰이 해내지 못하는 일을 해 낼 때 FBI라는 조직의 앞날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던 후버의 승부수였던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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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렌 비티와 페이 더너웨이라는 새로운 스타를 내놓으며 70년대 젊은 관객들을 사로잡았던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를 예로 들었지만 딜린저를 소재로 한 영화도 한두편이 아닙니다. 한국에 비디오로 나왔던 영화만도 '델린저'와 '전설의 대도 딜린저' 등이 있습니다. 두 편 모두 딜린저와 퍼기스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도 너무나 유명한 얘기지만, 혹시라도 이걸 스포일러라고 생각하실 분도 있을테니 그 얘기는 다루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마이클 만은 1930년대 매스컴에 의해 '로빈 후드'로 묘사됐던 독특한 성격의 은행 강도를 다루는 데 있어, 역시 평소의 그답게, 다소 혼란스러운 시각으로 접근합니다. 개인적으로 마이클 만은 참 희한한, 극단에서 극단을 오가는 감독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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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 뉴스 프로그램 PD 출신답게 냉정하면서도 관찰자의 시점에 남아 있는 연출을 즐기는 듯 하지만 어느 한 순간 격렬한 신파에 휘말리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결말은 산으로 가 있는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오스카 노미네이트작인 '인사이더'가 그의 작품 중 최고라고 생각합니다만,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로버트 드 니로와 알 파치노의 공연'이라는 간판이 달린 '히트'일 겁니다.

그가 다큐멘터리 작가로서의 열정을 보여줄 때 '인사이더'나 윌 스미스 주연의 '알리'같은 영화가 나옵니다(단 '알리'는 너무 지루하기 때문에 비추). 하지만 그가 오우삼 못잖은 닭살 느와르 감독의 본색을 드러낼 때에는 '히트'나 '콜래트럴', 그리고 이번 '퍼블릭 에너미'같은 영화가 나오죠. 감독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최초의 작품인 '킵'이나 '라스트 모히칸' 같은 영화들은 갱들이 나오는 작품은 아니지만 후자의 성격을 보여줍니다.

한때 그는 '마이애미 바이스'에서 그가 갖고 있는 두 가지 세계의 화해를 꾀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이때문에 차기작에는 더욱 관심이 쏠렸지만 '퍼블릭 에너미'는 형식면에서의 높은 완성도에 비해 유난히 돋보이는 세계관의 부재 덕분에 불균형이 더욱 눈에 뜨는 영화가 되어 버렸습니다. (단어가 좀 어렵다고 생각하실 분들을 위해 좀 편안한 말로 풀어 설명하자면, 때깔과 만듦새는 매우 그럴 듯 하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만들었는지 좀 의아한 영화라는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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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블릭 에너미'가 그럴 듯하게 '있어 보이는' 것은 마이클 만이 깔아 놓은 알리바이가 꽤 그럴싸하기 때문입니다. 만은 딜린저를 시대를 잘못 태어난 낭만주의자이며, 그를 '퍼블릭 에너미'로 만든 것은 FBI 국장 에드가 후버라는 식의 서술 말입니다. 만은 영화 곳곳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인기 없는 인물인 에드가 후버가 진짜 악역이라는 식의 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조차도 그리 성공적이지는 않은 듯 합니다.

게다가 관객들은 '퍼블릭 에너미'를 볼 때 '1930년대 미국 갱의 역사'를 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이 영화 속의 사건들은 그냥 만 감독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대로 재배치되어 있습니다. '퍼블릭 에너미'는 존 딜린저를 애인인 아나 프리셰트의 구출을 위해 목숨을 거는 순정남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많은 기록들은 영화의 라스트 신에서 그와 함께 있었던 폴리 해밀턴과도 연인 관계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딜린저와 동시대의 갱들인 프리티보이 플로이드와 베이비페이스 넬슨은 모두 딜린저보다 오래 살았습니다.

그런 사소한 변동이 중요하다는 게 아니라, 이 영화는 겉으로 포장된 것 만큼 '담담하고 감정을 배제한 채 묘사된 진짜 느와르의 시대'를 담고 있지 않다는 얘깁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겉멋에 치중해 알맹이는 하나 없는 화려한 한 폭의 그림에 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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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 영화에서 남는 것은 상황 판단을 못하는 과대망상증 환자인 은행강도 존 딜린저와 한때 그의 치명적인 매력(...그런데 그것은 딜린저의 매력이라기보단 조니 뎁의 매력으로 보입니다)에 빠져 인생을 망친 아나 프레셰트의 덧없는 사랑 이야기 뿐입니다. 크리스찬 베일에겐 미안하지만 이 영화에서 '때로 자기 환멸에 빠지는 고독한 법의 집행자' 이미지는 그냥 겉돌다 사라질 뿐입니다.

너무나 캐스팅이 화려한 탓에 늘 실망하면서도 꼭 보게 되는 마이클 만 감독의 영화들. 그에게 후한 점수를 주게 되는 영화는 '인사이더'와 '마이애미 바이스' 정도입니다. 다음번에는 반드시 부동심을 지켜 그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길 기도해 봅니다. 아무튼 제 의견을 묻는다면, 보러 가시라고 추천하기 힘든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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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딜린저의 실제 얼굴과 영화 속 조니 뎁입니다. 뭐 그리 닮은 편은 아닌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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