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2번'이라는 말은 드라마 관계자들이 흔히 쓰는 말입니다. 언젠가부터 한국 드라마에서는 남-녀 각 2명의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것이 기본 구조가 되어 있습니다. 가끔 남자 투톱, 여자 투톱의 드라마 같은 변형이 있지만, 현재 만들어지는 드라마의 80% 이상은 이 구도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 구도에서 '진짜 주인공'은 각각 '남자1번'과 '여자1번'으로 불립니다. 그리고 '남자2번'과 '여자2번'은 주연급이면서 각각 남자1번과 여자1번의 삼각관계 파트너인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전형적인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재벌가의 반항적인 후계자(남자1번)와 가난한 집 출신이지만 당찬 또순이(여자1번)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라면 여자 2번은 역시 유력가의 딸이며 남자1번의 약혼자로, 남자2번은 어린시절부터 여자2번을 지켜봐 온 동네 오빠라는 식으로 구도가 짜여지곤 했죠.
어떤 경우든 '2번이 1번의 영역을 넘볼수는 없다'는 것 역시 드라마 업계의 상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최근 두 편의 대박 드라마에서 모두 2번이 1번을 누르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는 것도 특이한 모습입니다.
물론 고현정의 미실이 일반적인 의미에서 여자2번 캐릭터이냐는 질문에는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애당초 미실의 비중이 통상적인 여자2번에 머물러 있었다면 고현정 같은 빅 스타가 캐스팅에 응했을 리도 없죠.
하지만 드라마의 제목이 '악녀 미실'이 아니라 '선덕여왕'인 이상, 어쨌든 이 드라마를 끌고 나갈 책임은 덕만공주-선덕여왕의 몫입니다. 드라마의 전반을 미실이 이끈 것도 사실이지만 전편을 꿰뚫어 볼 때 이 드라마는 누가 봐도 덕만의 드라마입니다. 덕만이란 인물의 일생을 통해 작가는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전달하게 되어 있습니다.
미실은 그 과정에서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가 더욱 선명해지게 하는 역할일 뿐, 그 스스로 이야기의 방향을 돌릴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강렬하고 선명하다 해도 그 선명함은 덕만의 보색처럼 덕만이 어떤 캐릭터인지를 선명하게 그려내는 역할을 하는 것이 당초의 설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선덕여왕'은 과연 '선덕여왕'인지, '악녀 미실'인지 보는 사람이 혼동할 때도 있습니다. 이건 기본적으로 연기 역량이 원인입니다. 고현정의 호연 때문에 미실은 잠시라도 2선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이러다 보면 제작진도 당초의 의도를 망각(?)하고 미실이 드라마를 이끌어가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미실은 곧 퇴장해야 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덕만에게도 기회가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지만 말입니다.
'아이리스'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누가 뭐래도 이 드라마의 축은 이병헌-김태희이고, 지금도 제작진은 이 커플을 고수하려 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의 우려대로 이 커플은 제작진이 처음 기대했던 위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신 이 드라마에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것이 선화 역의 김소연입니다. 어찌 보면 그동안 미모나 연기력에 비해 지나치게 저평가받아온 김소연이 이제서야 개화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고, 상대적으로 연기력이 뒤지는 김태희가 김소연이 빛을 발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고 봐도 좋을 듯 합니다.
물론 김태희가 빛을 내지 못하는 것이 김태희 혼자만의 책임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맞는 말이긴 합니다. 대본 단계에서 캐릭터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고, 연출진이 김태희의 능력을 온전하게 뽑아내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똑같은 요소가 김소연에게도 적용되고 있다는 걸 간과해선 안됩니다. 바로 위 사진 같은 부분이 애매하게 배우만 욕먹게 하는 연출의 좋은 예입니다. 김소연이 사격 때에는 개머리판을 어깨에 밀착해야 한다는 걸-무슨 말인지 모르는 분은 옆의 남자 배우와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어떻게 알겠습니까.
게다가 김태희 캐릭터 못잖게 김소연의 캐릭터도 보다 보면 어지럽습니다. 갑자기 이병헌에게 사로잡혀 이병헌을 좋아하게된 이후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행동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연기력, 혹은 배우의 능력이 드러나는 것은 이런 부분입니다. 좋은 배우에게는 아무리 얼토당토 않은 캐릭터라도 보는 이로 하여금 '...어쩐지 그럴듯 한데?'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힘이 있는 법입니다. 반면 애당초 약점이 있는 캐릭터라면, 신통찮은 배우일수록 그 약점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네. 보는 이로 하여금 '대체 쟤 저기서 뭐하니?'라는 평이 나오게 하는 연기죠.
그런 면에서 김소연은 확실히 이번 '아이리스'에서 전자 쪽의 연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눈빛이나 숨결, 목소리, 신체의 모든 요소들이 캐릭터를 소화하고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물론 김소연이 아무리 이 드라마에서 여자2번의 역할을 120% 소화한다 해도 결말이 바뀌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끝나고 다음 작품을 준비할 때에는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궁금합니다.
당연히 1번급의 배우인데 2번의 역할을 맡아 1번의 임무를 수행한 고현정과 최근 줄곧 2번의 역할을 맡으며 에너지를 비축하다가 이번에 1번을 압도하는 2번으로 존재감을 부각시킨 김소연의 입장은 매우 다릅니다. 따라서 한 방에 이 둘을 묶어 얘기하는 건 좀 무리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한번 당겨 봤습니다. 이런 글들이 혹시라도 현재 2번들에게 다소간 밀리고 있는 1번들에게 자극이 되어 불꽃튀는 1번과 2번의 연기 대결이 펼쳐진다면 그건 시청자들에겐 매우 좋은 일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