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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 꼬이기 시작하면 드라마가 이렇게 야매로 성형수술한 콧날처럼 무너져 내릴 수도 있군요. 아무개 사극처럼 초반에 제작비를 다 써버리는 바람에 후반에는 종이에 돌을 그려 붙인 성이 나오거나, 30만 대군이 나와야 할 장면에 30명 대군이 소리치며 개싸움을 하던 모 드라마도 아닙니다. '선덕여왕'입니다.

초기의 '선덕여왕'은 미실이라는 새롭고도 강력한 캐릭터, 그리고 그 캐릭터를 멋지게 소화해 낸 고현정이라는 배우의 열연과 함께 2009년 한국 드라마의 빛으로 떠올랐습니다. 명대사와 명장면이 이어졌고, 몇몇 캐릭터가 좀 삐끗했지만 다양한 화랑 군상들이 나타나면서 위기를 탈출해냈습니다.

하지만 '미실의 난' 이후로 드라마는 총체적 난국입니다. 무슨 얘기를 감춰놓고 있는 것인지, 당초 48회에서 최후를 맞았어야 할 미실이 50회까지 살아가게 되는 바람에 줄거리를 질질 끌어야 할 필요가 생긴 것인지, 스토리도 요령부득이고 등장인물들 중 납득이 가는 행동을 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주인공 덕만공주는 과연 지금 몇살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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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미실의 난'이라는 것이 역사에 기록된 바 없는 사건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고 계실 겁니다. 그리고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선덕여왕' 제작진이 생각하는 '미실의 난'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칠숙-석품의 난'을 모태로 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극중의 '현재'는 서기 631년이어야 합니다. 바로 진평왕 53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드라마 속의 온갖 정황이 모두 엉망으로 꼬여 시간을 알아보기 힘들다는 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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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몇가지 사건들을 실제 시간순으로 살펴보겠습니다.

579년 진평왕 즉위

595년(진평왕 17년) 김유신 출생

604년(진평왕 26년) 김춘추 출생

611년(진평왕 33년) 진평왕, 수나라에 재차 원병 요청

618년(진평왕 40년) 당 건국

621년(진평왕 43년) 당에 사신 보낸 첫 기록

626년(진평왕 48년) 당 태종 이세민 즉위

631년(진평왕 53년) 칠숙,석품의 난

632년(진평왕 54년) 진평왕 사망, 선덕여왕 즉위


일단 월요일 방송에서 미생은 당나라 사신이 온 데 대해 "당나라는 건국한지 10년도 안 됐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의 건국은 618년입니다. 그럼 이 해로부터 13년 전이군요. 뭐 이 정도는 미생의 착각이라고 치고 넘어갑시다. (앞으로 나올 일들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자, '선덕여왕'에 따르면 춘추는 신라로 귀환할 때 수나라로부터 귀환했습니다. 최대한 늦게 잡아 춘추가 618년에 망하기 직전의 수나라를 멋지게 탈출한 것으로 칩시다. 그렇다 해도 춘추가 귀국한 때부터 현재까지는 역시 1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신기하군요. 드라마상으로는 몇달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말입니다.

여기에 소화는 죽어가면서 칠숙에게 "30년 동안 돌고 돌아 결국 우리의 운명이..."라며 쌍팔년도 영화에 자주 나오던 "할말 다 하고 죽기" 신공을 펼칩니다. 소화가 칠숙의 추적을 받은 것은 바로 덕만과 천명이 태어나던 그날 밤 부터입니다.

이걸 보면 덕만은 30세 정도란 얘기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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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선덕여왕' 제작진은 덕만과 천명의 출생을 진평왕 원년으로 잡아 놓고 있습니다. 당연한 얘깁니다. 마야부인이 임신한 상태에서 진평왕이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죠.

여기서 집필진의 혼란이 시작됩니다. 진평왕의 출생이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서기 579년 왕위에 올라 632년 숨을 거뒀다는 것은 역사에 기록돼 있습니다. 만으로 53년, 햇수로 54년을 재위한 초장수 왕이었던 것이죠.

이건 확실한 모순입니다. 소화의 말을 따라 소화와 칠숙이 쫓고 쫓긴지 30년 정도 되는 해라면 '현재'는 진평왕 31년 전후, 서기 609년의 언저리여야 합니다. 그러자니 여러가지로 말이 안 됩니다. 우선 이 시기는 아직도 중국을 수나라가 다스리고 있던 시절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춘추공은 604년생이므로 젖먹이는 아니지만 세발자전거나 타고 다닐 나이입니다. 595년생인 유신낭 역시 14세, 지금처럼 분전하기에는 좀 어린 나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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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칠숙의 난'에 초점을 맞춰 다시 631년으로 돌아가 보면 이것 역시 골치아파집니다. 춘추는 27세, 좀 징그럽긴 하지만 엄청난 동안이라고 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의 나이입니다. 칠숙과 소화가 처음 쫓고 쫓길 때 스무살 안팎이었다고 하더라도 70세가 넘은 노인들이어야 합니다. 워낙 고령이라서 "쫓고 쫓긴지 54년"이라고 해야 할 것을 착각해 "30년"이라고 한 걸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 그러고 나면 덕만은 몇살일까요. 이미 작가들이 '덕만의 출생=진평왕이 즉위한 그 해'라고 못박아 놓았기 때문에, 631년 칠숙의 난 현재 덕만공주의 나이는 53-54세 입니다. 많은 시청자들이 미실이 늙지 않는다고 무슨 신공을 익힌 게 아니냐고 말하지만, 이쪽도 만만찮습니다. 50대의 덕만이 36세의 유신과 함께 도망치자며 징징 울어대고, 젊은 화랑들 못잖게 산야를 뛰어다닙니다. 대단한 신공입니다. 역시 미실의 적수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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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소화가 죽어가면서 "쫓고 쫓긴지 30년..."이라고 한 걸 보면 작가들은 시청자들이 그냥 천명(당연히 덕만과 동갑)이 15세 정도에 아들 춘추를 낳고, 그 춘추가 지금 15세 정도가 되었다는 설정을 따라와 주길 바랐던 것 같습니다. 이 대목에서 초반에 진평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마야부인이 쌍둥이를 임신한 걸로 묘사했던 걸 시청자들이 그냥 다 잊어주길 바랐던 것이겠죠. 아니면 아무도 대체 진평왕이 왕위에 몇년이나 있었는지를 궁금해 하지 않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계속 반복해서 말하게 되지만, '선덕여왕' 작가들은 이미 마야부인이 아이를 임신했을 때부터, 주인공 덕만공주가 선덕여왕이 되기까지는 53년이 걸린다는 것을 슬쩍 잊어버린 듯 합니다. 그리고 칠숙과 석품의 난이 진평왕이 죽기 1년 전에 일어난다는 것 역시 슬쩍 무시하고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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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가지고 노는 것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퀜틴 타란티노처럼 아예 "자, 한판 놀아 볼까?"하고 시작하고 대체우주를 설정했다면 그건 그냥 그렇게 봐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름 정통 사극을 표방했다면 최소한 인물들의 나이 정도는 맞춰 놓고 극을 구성했어야죠.

당나라 사신에게 당당하게 맞받아치는 미실의 모습을 보고 몇몇 시청자들은 환호할 지 모르지만, 그런 인기전술을 쓰는 사이 드라마 '선덕여왕'의 품질에는 수정하기 힘든 금이 갔습니다. '미실의 난'이 어떻게 마무리될 지 모르지만, 그리고 40%대의 시청률도 그대로 유지되긴 하겠지만, '얼렁뚱땅 사극'이라는 오명은 피하기 힘들 듯 합니다.




P.S. /몰아서/ '드라마는 다큐가 아니다' 라는 분들께:

드라마는 다큐가 아니란 걸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전부가 아니면 전무'라는 흑백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드라마에는 전적인 창작의 자유가 있고, 다큐에는 사실을 그대로만 전달하는 의무가 있다는 식으로 기계적인 구분을 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어떤 경우에든 '허용되는 정도'라는 것이 있는 법이죠. 그리고 이 글은 '선덕여왕'이 그 도를 넘어섰다는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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