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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래도 왜 이 드라마를 지켜보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 시작은 창대했던 드라마가 어떻게 무너져가는지를 증언할 의무감 같은 걸 느끼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전만 못하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이 드라마는 시청률 30%를 넘는 인기 드라마입니다. 이 수치는 당분간 유지될 것이고, 다른 드라마들이 언감생심 넘보지 못할 시청자들이 덕만과 유신의 갈팡질팡을 지켜볼 것입니다.
이 드라마의 문제점에 대해 지적할 때마다 '사극에서 역사왜곡이 무슨 문제냐' '드라마는 드라마고 다큐는 다큐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분명히 말합니다. 이 드라마의 가장 큰 문제는 역사왜곡이 아닙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드라마가 다루고 있는 역사가 문제가 없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많은 분들은 아마 대야성의 성문을 연 배신자의 이름이 검일(黔日)이라는 데서 거품을 물고 쓰러졌을 겁니다. 당시 백제의 장군 이름이 윤충일 뿐, 계백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야성 함락은 선덕여왕 11년(642년)의 일입니다. 그리고 당시 검일이 성문을 열어 항복하는 바람에 백제에게 대야성이 넘어간 것도 역사에 기록된 사실입니다. 그런데...문제는 당시 대야성을 지키던 성주가 품석이라는데 있습니다. 품석은 춘추의 사위죠. '삼국사기'는 딸과 사위를 잃은 춘추의 비탄에 대해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춘추는 이 소식을 듣고 기둥에 몸을 기대 선 채로 하루 종일 눈 한번 깜빡이지 않았고, 자신의 앞으로 사람이 지나가도 의식하지 못했다. 이내 말하기를 "아아!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무너뜨리지 못한단 말이냐!" (春秋聞之, 倚柱而立, 終日不瞬, 人物過前而不之省. 旣而言曰 "嗟乎! 大丈夫豈不能呑百濟乎)
실제 역사의 흐름은 이렇게 격노한 춘추가 고구려와 연합해 백제를 치기 위해 단신으로 고구려에 넘어가 연개소문과 협상을 벌이고, 여기서 여의치 않자 당나라로 가 외교 활동을 벌이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또 진덕여왕 원년(647년), 유신이 백제군의 침입을 격퇴하고 대승을 거둔 뒤 생포한 백제 장군 8명과 품석 부부의 유해를 교환해 신라로 가져오자 춘추가 감격을 금치 못하고 거듭 감사 인사를 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다른 배우들이 백발과 콧수염을 달고 나올 때에도 여전히 솜털 하나 없는 얼굴로 샤방샤방 눈웃음을 날려 주시고 있는 꽃미소년 춘추공이 징그럽게도 사위와 장성한 딸을 거느리고 있는 아저씨였다는 겁니다. 네네. 그렇습니다.
역사왜곡이 문제가 아니라고 해놓고 왜 역사 얘기냐고 궁금해 하시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이 드라마가 역사를 다루는 수준은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콩쥐팥쥐 이야기를 다루는 수준입니다. 그만치 경외심도 없고, 이해하는 수준도 낮습니다. 그런데 왜 문제가 아니냐, 그건 역사 왜곡의 정도보다, 사극 드라마로서의 기본, 아니 드라마로서의 기본에 더 큰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여왕마마의 충신 유신공이 거짓말장이로 몰리게 된 계기, '대야성에는 이름이 흑으로 시작하는 관원이나 군사가 없다'는 것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유신이 고한 것은 '대야성에 있는 첩자가 내응해 관문을 열 것이고, 그 첩자의 이름은 백제 작전지도에 흑 뭐시기라고 쓰여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온갖 신라의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흑 뭐시기라는 사람은 대야성에 없으니 유신 저놈이 살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들끓기 시작합니다. 어이 상실 시퀀스의 시작입니다.
한마디로 상황이 다 정리될 즈음에서야 그중 똑똑하다는 비담이 '부수일수도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하고 다시 명단을 뒤져 봅니다. 기절해 쓰러질 일입니다. 한글로 '흑'이라고 써 놓고, '검'이라고 써 놓으면 전혀 다른 글자겠지만 한자로 '黑'을 써놓고 그 옆에 '黔'을 써 놓으면, 똑같은 黑자가 선명하게 보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생도 명단을 보면서 여기 있네 흑, 하고 찾아 낼 겁니다.
게다가, 한글이 아니라 한문을 베이스로 생각한다면, 단지 한자로 선명한 黑 한 글자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黑으로 암시할 수 있는 비슷한 글자들을 모두 생각의 범위에 넣는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를테면 먹을 뜻하는 묵(墨)이라거나, 검은 색을 뜻하는 현(玄), 칠(漆) 등도 일단 의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저같으면 얼굴이 검은 사람도 일단 용의선상에 놓겠습니다.^^)
한번만 더 생각하면, 그 글자가 올라간 곳이 백제의 작전지도라면... 애당초 간첩의 본명이 써 있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입니다. 007은 007이니까 '본드, 제임스 본드'라고 자신의 실명을 까고 활약하지만 세상 어디의 스파이가 실명으로 활동하며, 스파이를 보낸 자가 스파이의 실명을 아무데서나 거론한단 말입니까.
애당초 '적의 스파이가 있다'는 것만 알아도 대야성의 수비진을 소환해 단속하는게 보통이겠죠. '첩자가 성문을 연다'는 구체적인 행동까지 알고 있다면 그걸로 막을 생각은 않고, 이름이 있네 없네만 따지고 있다는게 과연 정상적인 행동일까요.
사소하다면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 이런 어린애 장난 같은 수준으로 미실 사후 드라마의 가장 중요한 국면을 이끌어가고 있는게 현재 '선덕여왕'의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넓게 전체를 봐도 상황은 모순 투성이입니다. 미실의 도전을 물리치고 왕이 됐건만 덕만의 주변에는 여전히 미실의 세력이 득시글거리고, 덕만은 미실 코스프레와 성대모사에 빠져 있을 뿐 왕으로서의 면모는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덕만은 엘리자베스 여왕이 아니고, 유신은 이순신 장군이 아니건만 '선덕여왕' 제작진에게는 이미 자신들이 어디서 본 두 역사적 인물의 캐릭터를 '선덕여왕'의 두 인물에 덮어 씌우려는 생각밖에 보이질 않습니다. 이제 좀 더 지나면 '주인공 고립시키기'를 위해 '우리 편' 인물들이 억울하게 죽어갈 일밖에 없을 듯 합니다. 서현, 용춘, 알천, 필탄, 죽방, 고도 등은 이제 언제 죽을 지 모르는 나날입니다. 하긴, 이젠 그냥 죽고 쉬는 게 나을 수도 있을 듯 합니다.
제작진에게 한번 묻고 싶습니다. 신라를 이렇게 바보들의 나라로 만들어 놓고도 과연 덕만이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영명한 여왕으로, 유신이 통일과 구국의 일념으로 사랑조차도 제쳐놓은 영웅으로 그려질 수 있을까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P.S. 이제 남은 욕은 '재미없으면 보지마 이 시키야' 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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