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약대로 인셉션에 대한 세번째 글입니다. 첫번째 글은 그냥 전반적인 '인셉션 많이 보기 캠페인', 그리고 두번째 글이 '인셉션, 이해가 잘 안 가는 부분에 대한 집중 설명'이거나 '겉으로 안 보이는 인셉션의 속살'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세번째는 인셉션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의 이름 속에 감춰진 상징에 대한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사실 이 이름짓기의 원조도 역시 매트릭스라고 할 수 있겠죠. 주인공의 이름을 one의 배치를 바꾼 neo로 짓는다거나,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대장의 이름을 모피어스라고 지은 것이나... 여기에 비할 때 가장 선명하게 의미가 오는 '인셉션'의 캐릭터는 바로 아리아드네입니다.
<<<이번 글 역시 스포일러 가득입니다. 영화 안 보신 분들은 보고 오세요. 그게 아니고 영화 속 의문에 대한 해설이 필요한 분은 바로 아래 링크로 가시기 바랍니다. >>
그리스 신화에 조금만 관심 있는 분이라면 이 영화 속 아리아드네와 테세우스의 연인이었던 아리아드네 사이의 관계를 발견하는 건 매우 간단한 일일 겁니다. '인셉션'의 코브는 아리아드네를 보자 마자 미로를 그려 보라고 하죠.
신화 속의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 덕분에 미로를 빠져나오게 됩니다. 미노스의 미궁에 갇힌 미노타우르스를 죽이기 위해 테세우스는 제물을 가장해 미로 속으로 들어가는데, 아리아드네의 도움으로 실꾸리를 가지고 들어가 길을 잃지 않고 미노타우르스를 죽이는데 성공합니다. (물론 이들의 관계는 해피엔딩이 아니죠. 신화에도 스포일러가 있다는 세상이니 이 이야기는 여기까지. 아무튼 아래 그림, 낙소스 섬에 버려지는 아리아드네의 이야기는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줬습니다.)
그 다음 눈길을 끄는 건 임스입니다. 임스의 스펠링은 Eames. 바로 그 세계적으로 유명한 임스 체어의 임스입니다. 건축가와 가구 설계자로서 전 세계적으로 '공간의 마술사'라는 호평을 받았던 찰스 임스와 레이 임스 부부를 가리키죠.
흔히 의자 만드는 사람들로만 알고 계신 분도 있었겠지만 아래 사진이 이분들이 만든 임스 하우스라는 건물입니다.
인셉션이라는 영화의 특성상, 건축과 공간의 대가에게 오마쥬의 뜻으로 이름을 따 오는 건 그리 희한한 일이 아닐 겁니다. 아무래도 이 임스는 그 임스에서 따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놀란이 이 캐릭터의 이름을 따 오고 싶었던 대상은 아마도 따로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난 주에 중앙일보 '분수대'에 썼던 글을 잠시 갖고 오겠습니다.
세계적인 열풍을 일으키고 있는 SF영화 ‘인셉션’은 흔히 1999년작 ‘매트릭스’와 비교된다. ‘매트릭스’가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은 가짜’라는 메시지와 충격적인 영상으로 전 세계 영화 팬들을 흥분시켰다면 ‘인셉션’은 자유자재로 타인의 꿈속에 침투하며 그 내용을 지배하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언뜻 듣기엔 매우 획기적인 내용 같지만 관객들은 대부분 별 어려움 없이 받아들인다. 왜 그럴까. 사실은 인류가 몇천 년 전부터 이미 익숙해져 있던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꿈속의 수십 년이 현실에선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영화 속 아이디어는 이미 『삼국유사』의 조신지몽(調信之夢) 설화에 등장한다. 신라 승려 조신은 태수의 딸에게 반해 매일 그녀와 맺어지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가고, 슬피 울던 조신에게 어느 날 밤 그녀가 찾아와 “함께 달아나자”고 한다. 그 뒤로 두 사람은 50년을 살았지만 결국 가난을 이기지 못해 헤어졌다. 그리고 조신이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50년 세월이 고작 하룻밤의 꿈이었다는 이야기다.
다른 사람의 꿈속에서 모습을 바꿔 활약하는 이야기도 그리스 신화에서 엿볼 수 있다. 오비디우스의 ‘변신’에 따르면 바람의 신의 딸 알키오네는 항해 나간 남편이 익사한 줄도 모른 채 매일 무사귀환을 기원했다. 이를 보다 못한 헤라는 꿈의 신 몰피우스를 시켜 사실을 알려 주게 했다. 알키오네의 꿈속에 들어간 몰피우스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익사한 남편의 모습으로 변신, 그의 죽음을 알렸고 잠에서 깬 알키오네는 남편을 따르기 위해 자결한다.
이렇듯 고대에는 꿈의 지배가 신의 영역으로 여겨졌다면 현대에는 프로이트의 후계자들이 그 권능에 도전하고 있다. 지난 28일자 뉴욕 타임스는 ‘대본을 따라 악몽에서 탈출하기(Following a Script to Escape a Nightmare)’라는 기사를 통해 최근 미국 정신의학계에서 꿈의 변환을 이용해 성폭행 피해자나 참전 용사들을 치료하는 기법이 각광받고 있다고 전했다. 악몽을 좋은 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물론, 환자가 꿀 꿈의 구체적인 내용을 미리 정하는 것도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인셉션’은 무당이 하던 일을 과학자들이 하게 된 지금, 과연 인간은 더 행복해진 것인지를 묻는 영화로도 읽힌다. (끝)
가운데 빨간색으로 표시된 부분은 영화 속 임스의 역할을 연상시킵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으로도 모습을 바꿀 수 있다는 기능을 생각하면 아마도 임스의 이름은 몰피우스로 지어졌다면 딱 떨어졌겠죠. 하지만 불행히도 몰피우스라는 이름은 '매트릭스'에서 이미 사용돼 버렸습니다. 그래서 놀런 감독은 아예 방향을 틀어 임스라는 이름을 붙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다음은 한 팀입니다. 피셔, 아서, 유수프는 하나로 엮을 수 있습니다. 바로 '성배'라는 상징과 관련한 이야기입니다.
아서 왕과 성배의 관련은 새삼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죠. 원탁의 기사들에게 최대의 목표는 성배를 발견하는 것이었으니 말입니다. 아무도 모르는 성배의 위치를 발견하는데 이르기까지 꿈을 통한 암시와 상징은 매우 중요한 단서로 간주됐습니다.
아서 왕 전설에 방계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어부 왕, 피셔 킹입니다. 물론 영화 속의 피셔는 Fisher가 아니라 Fischer지만 독일어의 fischer는 영어의 fisher와 같은 뜻, 바로 어부라는 뜻입니다.
어부 왕은 아서 왕 전설에 한때 성배를 수호했던 왕으로 등장합니다. 물론 성배와 원탁의 기사 전설은 여러가지 방계 전설들로 둘러싸여 매우 혼란스럽지만, 그중 정설로 여겨지는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원탁의 기사 중 최강의 전투력을 가진 랜슬로트가 어부 왕의 성을 찾아갔을 때, 어부 왕은 성스러운 창에 찔린 상처로 병석에 누워(!) 아들과 함께(!) 성을 지키고 있습니다. 랜슬로트가 신비로운 힘으로 어부 왕을 치유하고(위 그림은 어부 왕의 치유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이 왕은 자신의 딸 일레인을 랜슬로트와 동침시켜 성배를 찾을 능력을 가진 성스러운 기사 갈라해드를 태어나게 합니다.
영국 밖으로 나가면 이 전설은 더욱 복잡해집니다. 바그너의 '파르지팔'에서는 이 상처입은 어부 왕이 암포르타스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다른 오페라 '로엔그린'에 나오는 로엔그린은 또 이 파르지팔의 아들이라는 설정입니다. 물론 이 파르지팔은 원탁의 기사 중 하나인 퍼시벌의 독일식 발음이죠.
아무튼 병석에 누워 성을 지키는 피셔 킹과 그의 아들, 그리고 그들이 지키는 비밀에 접근하는 아서, 이런 설정은 왠지 '인셉션'과 겹쳐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럼 유수프는 뭐냐구요? 아, 유수프는 성경에 나오는 요셉(즉 영어식으로 조셉)을 아랍식으로 부르는 이름입니다. 처음에는 이 유수프라는 이름이 바이블 앞부분에 등장하는 야곱의 아들 요셉(꿈으로 자신이 선지자임을 깨닫죠)에서 따 온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런 피셔 킹의 등장과 관련해 생각해보면 아리마대의 요셉 Joseph of Arimathea 이 더 적절한 것 같습니다.
아리마대의 요셉은 바로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피를 성배에 받아, 그 성배를 유럽으로 가져왔다는 인물이죠(위 그림). 비밀의 운반자라는 의미에서 매우 적절해 보입니다.
그럼 남는 것은 코브와 사이토입니다. 일단 코브라는 이름은 놀런 감독이 전에도 한번 써 본 적이 있습니다. 1998년작 'Following'이란 작품이었죠. 저도 보지 못한 작품이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Cobb라는 인물의 직업도 도둑입니다.^^ 마지막으로 사이토라는 인물은 당최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일본에선 워낙 흔한 성이라서..
이걸로 끝은 아닙니다. Eames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해석의 여지도 있습니다. 혹시 등장인물 모두가 건축가 이름에서 따 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죠. 이것도 꽤 유력합니다. 세계적인 건축가 집단 가운데 Pei Cobb Freed & Partners라는 회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회사는 루브르 박물관의 리모델링으로 대단히 유명합니다. Cobb이란 이름은 이 멤버 가운데 Henry Cobb라는 건축가에서 따 온 것이죠.
이 길로 가면 사실 더 쉬워질 수도 있습니다. 빈의 쉔브룬 궁을 설계한 사람은 요한 베르나르트 피셔 Johann Bernhard Fischer von Erlach 라는 건축가이고, 유수프라는 이름도 카이로의 살라딘 성을 건축한 그리스 출신의 건축가 유수프 부쉬나크 Yusuf Bushnaq 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일본에도 Saito Kazuya라는 건축가가 있다고 구글이 가르쳐 주는데,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뭐 아서나 사이토는 사실 흔한 이름과 성인 만큼 어떤 직업에서라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현실적으로는 이렇게 건축가 이름 집단이라는 게 더 간단해 보이지만, 성배 전설과 관련된 짜깁기도 꽤 매력적이란 느낌이 듭니다.^^ 아무튼 뭐든 순전히 저의 개인적인 생각이고, 얼마든지 틀릴 수 있습니다. 뭐 어차피 영화 '인셉션'은 놀런 감독의 꿈이고, 그 꿈 속에서는 뭐든 그분 마음대로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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