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는 가다피라고 불렸던 카다피. 요즘은 과대망상증에 걸린 미친 노인네 대접을 받고 있지만 한때는 '제3세계 반미 자주의 상징'으로 영웅 대접을 받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특히 1980년대 국내에서 카다피의 인기는 대단했죠. 한때 한국의 운동 깨나 한다는 학생들은 '카다피의 리비아야말로 한국이 미래에 본받아야 할 국가 모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사회주의를 표방하긴 했지만 리비아는 한국과 친근한 나라였던 것도 분명합니다. 동아건설이 주도했던 리비아 대수로 공사를 포함해 한국 건설사들이 많이 진출했던 나라입니다. 심지어 얼마 전 우연히 탔던 택시 기사 아저씨는 왕년에 리비아 건설 현장의 중장비 기사 출신이시라며 가까이서 본 카다피의 영걸스러움(?)에 대해 한바탕 칭찬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아무튼 이런 상황이었으므로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카다피의 독재나 국내 인기에 관심을 가질 사람은 없었다고 봐도 좋을 겁니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국내에서도 보신 분들이 꽤 있을 겁니다. 1980년작, '사막의 라이온'이란 영홥니다.
그동안 어찌 어찌 하다 보니 신문에 쓴 글을 이쪽으로 가져오는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꽤 오랜만에 가져오는군요.^^
[분수대] 영화와 현실
2009년 6월, 위성방송 스카이 이탈리아 채널은 느닷없이 1980년작 영화 ‘사막의 라이언(Lion of the Desert)’을 편성했다. 미국·리비아 합작인 이 영화는 1930년대 리비아 민중이 지도자 우마르 묵타르(Omar Muktar)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침략군에 맞서 싸우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탈리아 정부는 이 영화가 이탈리아군이 포로를 폭행해 학살하는 장면 등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1982년 상영 금지 조치를 내린 바 있었다. 하지만 2009년 리비아 지도자 무아마르 알 카다피의 이탈리아 방문 기간에 맞춰 TV 편성이 이뤄졌다.
카다피와 이 영화의 인연은 매우 각별하다.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카다피는 대작 영화를 통해 ‘서구에 맞서는 아랍의 영웅’으로 자신의 위업을 전 세계에 알리고 싶었다. 그가 원하는 이미지의 이상적인 모델이 바로 우마르 묵타르였다.
할리우드의 아랍계 프로듀서 무스타파 아카드가 감독에 선정됐다. 아카드는 1977년 예언자 무함마드의 전기 영화 ‘무함마드, 신의 메신저’ 제작 때문에 카다피의 신뢰를 얻은 인물이었다. 3500만 달러의 오일 머니가 아낌없이 투입됐다. 같은 해 나온 007 시리즈 ‘포 유어 아이즈 온리’(제작비 2800만 달러)보다도 1.5배나 많은 규모였다.
그 결과 묵타르 역의 앤서니 퀸을 비롯해 올리버 리드, 로드 스타이거 등 월드 스타들이 캐스팅됐고, 수백 명의 기마대가 탱크부대와 맞서 싸우는 대규모 전투 장면도 화제가 됐다. 하지만 관객은 프로파간다를 원치 않았다. 전 세계 흥행 수입은 100만 달러에 미치지 못했고, 이는 20세기 영화 사상 손꼽히는 실패 사례로 꼽힌다. 물론 가장 큰 투자자 카다피가 만족했으니 돈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영화 속 리비아인들은 유목민족 베두인의 후예답게 탱크 앞에서도 끈으로 다리를 묶고(후퇴하지 않기 위해) 용감하게 싸운다. 포로가 된 묵타르도 “승리 아니면 죽음이다. 우리에게 타협이란 없다. 내가 안 되면 다음 세대가 이어 싸울 것”이라고 당당하게 외친다.
과연 카다피는 그 국민이 목숨을 걸고 물리치려 하는 상대가 바로 자신이고, 국민들이 외세 개입에 희망을 거는 상황을 상상이나 해봤을까. 아직도 “국민들은 나를 사랑한다”고 우기고 있는 카다피는 더 이상 자신이 영화 속 주인공이 아니란 사실을 언제 깨닫게 될까.
송원섭 JES 선임기자
영화 속에도 나오듯 이슬람 지도자이며 교사 출신이었던 우마르 묵타르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유목민족 특유의 치고 빠지는 기동력을 이용해 이탈리아 침략군을 괴롭혔습니다.
사실 로마 제국 이후 이탈리아군이 다른 나라 앞에서 무력을 뽐낸 사례는 별로 기억나지 않습니다. 19세기까지 여러 도시 국가로 분열돼 있던 탓도 있었겠지만, 2차대전사에서도 이탈리아군은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해 같은 편인 히틀러의 골머리를 썩힌 사례가 여러 차례 보고됩니다.
지금도 리비아는 광대한 영토에 비해 인구는 600만 정도입니다. 만약 이탈리아가 아니라 좀 더 군사력이 강한 나라였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만(^^), 아무튼 묵타르의 영도력이 카다피에게 영감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영화는 1981년 12월 국내에서 개봉됐고, 저도 광화문 한복판에 있던 '국내 최대의 무허가 건물' 국제극장에서 봤습니다. 대한극장을 제외하면 당시 가장 큰 스크린을 보유하고 있는 극장이었기 때문이죠.
광대한 화면에서 펼쳐지는 액션은 전혀 나쁘지 않았고, 약소국 국민들이 제국주의 침략군에 맞서 싸운다는 내용은 충분히 감동적이었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리비아는 적대해야 할 사회주의 국가가 아니라 한국이 개척해야 할 건설 시장이었으므로 이 영화가 상영되는 데 장애 같은 건 전혀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신 분들 중 90% 정도는 이 영화의 배경이 리비아였다거나, 이 영화와 카다피의 관계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광고를 보면 사상 초유의 제작비 3500만달러라는 얘기가 나오는데, 당시의 3500만달러가 엄청난 돈인 건 분명하지만 그때도 크리스토퍼 리브 주연의 '슈퍼맨' 같은 영화는 5000만달러 대의 제작비를 쓰곤 했습니다. 물론 뒷날 제임스 카메론이 '터미네이터2'로 1억달러 제작비를 넘어 서기 전까지 이 정도의 금액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건 분명합니다.
그런데 분명 영화가 그리 나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대실패한 것은 아마도 처음부터 제작/후원/배급자인 카다피가 이 영화를 통해 돈을 벌어 들이는 데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국내에도 거의 무료로 틀어달라고 한 게 아닐까...
묵타르에 대한 카다피의 집착은 바로 저 가슴에 달린 사진에서도 나타납니다. 이탈리아 군에 생포된 당시 묵타르의 사진(위 사진)을 가슴에 붙이고 공식석상에 수시로 등장할 정도로, 묵타르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카다피의 야망은 적나라했습니다.
어쨌든 세상은 변했고, 카다피는 자신이 원했던 묵타르의 모습이 아니라 묵타르와 리비아 민중에게 쫓기는 이탈리아 침략군의 위치에 오게 됐습니다.
30년 사이 카다피가 초심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30년 사이 가식이 걷힌 것인지. 결과에는 큰 차이가 없겠지만 아무튼 30년 전 그가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다고 생각한 영화를 보면 정말 어떤 생각이 들지 궁금합니다.
P.S. 가끔 이 영화 얘기를 하면 션 코너리가 아랍 족장으로 나왔던 영화를 떠올리시는 분이 있습니다. 그 영화는 '바람과 라이온'입니다. 두 영화 모두 '사자'를 굳이 '라이온'이라고 쓴 이유는 아마도 일본식 표기의 영향이 아닐까 하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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