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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 지나서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분다고도 하지만 몇십년 살아 보니 세상 이치가 그렇게 쉽지 않다는 것도 깨닫게 됐습니다. 본래 입춘 지나고 나서 꽃샘추위가 오고, 입추 지나고 나면 마지막 반짝 더위가 오기 마련이죠. 일찌기 시성 두보도 음력 7월 초, 입추 갓 지난 때의 날씨가 온통 옷을 풀어헤치고 미친듯이 소리치고 싶을 정도로 덥다(束帶發狂欲大叫)고 하셨으니 거짓말은 아닐 겁니다.

아무튼 아직 더운 날이 이어지고 있으니 유효기간 지나기 전에 써먹어야 할 포스팅입니다. 요즘은 냉장고 덕분에 무더운 염천에도 마음대로 얼음을 먹을 수 있지만 이건 20세기 들어서도 한참 지난 뒤의 일이죠. 그럼 그 전, 수백년 수천년 전에는 어떻게 했을까요? 그 시절에도 여름에는 얼음이 훌륭한 식재료로 사용됐습니다.




일단 정리한 글을 가져옵니다. 전기도 없던 시절, 어떻게 한여름에 얼음을 먹었는지에 대한 간략한 글입니다. 사실 너무 간략해서 이 포스팅을 하게 된 겁니다.

제목은 '반빙(頒氷)'입니다.

냉장고가 없었다고 인류가 한여름 무더위를 마냥 참고 있었던 건 아니다. 이란에서는 BC 4세기부터 야크찰(yakhchal)이라는 원뿔형 저장고가 등장했다. 섭씨 40도가 넘는 사막 한복판에서도 얼음을 먹을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선 춘추전국시대부터 한겨울 산과 강에서 얼음을 떼어다 돌집에 보관하는 방법이 사용됐다. 이를 벌빙(伐氷)이라 했는데, 고관 대작들에게만 허용됐으므로 벌빙이란 말이 곧 출세의 동의어로 사용되기도 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한국에서도 신라 3대 유리왕(노례왕) 때 이미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藏氷庫)를 지었다 한다.고려 이후엔 나라에서 저장한 얼음을 매년 여름마다 관원들에게 나눠줬다. 이것이 반빙(頒氷)이다. 귀한 것이므로 궁중과 종친, 당상관에게 우선 지급됐지만 은퇴한 관리나 장수하는 노인, 활인서에 입원한 환자들의 몫도 있어 사회 복지의 측면도 있었다.

만기요람』에 따르면 조선시대 한양에는 동빙고와 서빙고가 운영됐다. 서빙고 하나만으로도 약 13만5000정(丁)의 얼음을 보관해 사용했고, 관리의 직급과 업무에 따라 가져갈 수 있는 얼음의 양을 표시한 빙패(氷牌)가 지급됐다. 마패 아닌 빙패로도 위세를 견줄 수 있었던 것이다.이렇듯 중요한 사업이었으니 좋다 나쁘다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예종 1년(1469년)에는 얼음을 나누면서 몰래 민간에 내다 파는 일이 있으니 이를 엄하게 단속하라는 왕명이 내려졌다.

성종 때 죄인들에게도 얼음을 나눠주자 당대의 유학자 김종직은 “성상께선 백성의 더위를 염려하여/ 감옥에도 반빙을 허락하셨다(九重尙軫元元熱 更許頒氷岸獄中)”고 선정을 칭송했다. 반면 연산군은 “궁중에서 직물 염색을 하는 데 얼음이 필요하다”며 반빙을 중단시킨 일이 있었다. 3년 뒤에 반정(反正)이 일어난 것도 왠지 우연이 아닐 듯싶다.

최근 정부가 에너지 절약을 이유로 각 관공서의 냉방 온도를 28도, 마트나 백화점은 26도로 규제하면서 '덥다'는 반발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예비전력률 저하 등의 사정은 이해하지만, 무작정 냉방 온도만을 높여 감시하기보다는 전체 사업장의 전력 소모량을 규제하는 등 보다 효율적인 방안도 있을 듯하다. 반빙을 해도 모자랄 삼복더위에 더위로 인한 스트레스가 오히려 부작용을 가져오지 않을까 우려된다. (끝)



이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야크찰의 모습입니다. 사실 칼럼 하나를 쓰려면 꽤 자료를 모으게 됩니다. 사실 모은 재료를 그냥 내버리기는 너무 아깝고, 그래서 포스팅으로 모아 본 겁니다.

한국 역사에서 얼음 저장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의 신라 유리이사금(모례왕) 편에 나옵니다. '쟁기와 보습, 장빙고를 만들고 수레를 지었다(製犁耜及藏氷庫, 作車乘)'는 것입니다. 정사인 삼국사기는 이보다 훨씬 늦은 지증왕 6년 11월, 왕이 명을 내려 얼음을 저장하게 했다(始命所司藏氷)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시절의 얼음이란 모두 겨울에 뜯어다가 여름까지 녹지 않게 보관한 것 뿐입니다. 자연상태에서도 여기저기 얼음골(여름에도 얼음이 녹지 않는 지대를 가리키는 보편적인 이름)이 조성되는 걸 보면 옛날 사람들도 여건만 잘 갖춰 놓으면 여름에도 얼음을 먹을 수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을 겁니다.

그 뒤로 얼음을 뜯어다 저장하는 건 상당히 보편적인 일이 된 걸로 보입니다. 위에 나온 벌빙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얼음을 사냥한다(?)는 뜻인데 이게 대부(大夫) 이상의 벼슬아치들에게만 허용되는 사치였다는군요. 조선시대 유학자 김굉필의 시에 이 벌빙이란 말이 나옵니다. 바로 '출세'라는 뜻으로 쓰였죠.

분수 밖에 벼슬을 하여 벌빙하는 데까지 이르렀는데 / 分外官聯到伐氷
임금을 돕고 세상을 바로잡는 데 내가 어찌 능할쏜가 / 匡君救俗我何能
후배들로 하여금 나의 우졸을 조롱하게 하였으나 / 從敎後輩嘲迂拙
권세와 이익을 구차하게 바라지 아니하네 / 勢利區區不足剩


(물론 경주 석빙고가 신라시대 유물인 건 아닙니다. 이 석빙고는 조선시대 것.)

하지만 이렇게 얼음을 채취하고 보관할 장소를 짓고 하는게 꽤 고된 일이었던 모양입니다. 한겨울에 해야 하는 일이니 당연히 그랬을 겁니다. 그래서 거기에 대한 비난도 끊이지 않습니다. 고려사절요에 전하는 1243년, 고려 고종때의 기록입니다.

12월에 최이가 사사로이 얼음을 캐어 서산(西山)의 빙고(氷庫)에 저장하려고 백성을 풀어서 얼음을 실어 나르니 그들이 매우 괴로워하였다. 또 안양산(安養山)의 잣나무를 옮기어 집의 후원에 심었다. 안양산은 강도(江都)에서 여러 날 걸리는 거리인데 문객인 장군 박승분(朴承賁) 등으로 감독하게 하였다.

이 최이는 최충헌의 아들인 최우의 다른 이름이죠. 최씨 무신정권이 정점에 올랐을 때의 권력자 최이는 이렇게 백성들을 괴롭혀 얻은 얼음을 중신들에게 나눠줘 당대의 문장가 이규보 같은 사람은 감사의 시를 짓기도 합니다.

얼음, 또 반빙에 대한 시를 많이 쓴 사람으로 목은 이색을 꼽을 수 있습니다. 고려말 삼은의 한 사람인 이색은 상당히 비대한 몸에 더위도 많이 탔던 모양입니다. 유난히 여름의 얼음을 고마워하는 글이 여러 편입니다. 예를 들면,

전각은 조용하고 덥지도 않은데 / 殿閣靜無暑
얼음 깬 물에 꿀을 타서 마시어라 / 蜜漿調碎氷
지경이 깊으니 인적은 적적하고 / 境深人寂寂
바람이 부니 나무는 층층이로다 / 風動樹層層
얼굴에 비추면 냉기가 쏘아대고 / 照面冷相射
목에 삼키면 머물 틈도 없이 넘어갔지 / 入喉流不凝
(중략)
형세는 한로 절기부터 시작하여 / 勢從寒露始
물이 얼어서 절로 얼음이 되는데 / 水結自爲氷
골짝마다 사람은 얼음 조각을 캐내고 / 萬壑人擎段
교하엔 말이 층층 얼음 위를 달리네 / 交河馬踏層


한편으론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온 뒤, 반빙의 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함을 서운해 하는 글도 있습니다. 얼마나 한여름 얼음이 고마운 존재인지 보여주죠.

해마다 유월에 얼음덩이 마주하면은 / 年年六月對氷峰
잠자리 깨끗하고 부채 바람 인 듯했는데 / 枕簟無塵扇有風
앓고 나서 문득 반사가 적음에 놀랐노니 / 病後忽驚頒賜
지난겨울 다수워 빙고가 텅 빈 때문일세 / 只因冬暖凌陰空

반빙하는 총재는 홀로 여유가 있거니와 / 頒氷冢宰獨優游
양부의 관원들은 등에 땀이 줄줄 흐르네 / 兩府摩肩背汗流
승선 다섯 사람만 유독 반사를 얻었으니 / 五箇承宣偏得賜
성조에서 예부터 승선을 중히 여겼음일세 / 聖朝從古重龍喉

기억컨대 연산에 모진 더위 푹푹 찔 적엔 / 記得燕山酷熱蒸
길거리 곳곳에서 얼음 꿀물을 타 마셨는데 / 街頭處處蜜調氷
동에 돌아온 신세는 청량하기 그지없어라 / 東歸身世淸?甚
시냇물 솔바람에 시원한 기운이 모이는 걸 / 澗水松風爽氣凝


조선시대 들어서는 반빙이 아예 정부의 주요 사업이 됐습니다. 이조 아래에 빙고를 관장하는 관직이 생겼고, 도성에는 동빙고와 서빙고를 설치해 반빙을 실천했습니다. 만기요람에 나오는 서빙고의 반빙 현황은 이렇습니다.

서빙고에 저장한 얼음 134,974 정(丁)은 그 가운데 수가(受價)한 혜청미(惠廳米) 677석ㆍ호조미 367석을 합하면 1,054석인데 그 가운데 장빙미 551석의 나머지 쌀 503석과 병조목 6동(同) 29필을 본고에 응용할 것과 얼음을 져나르는 품삯으로 지급하고, 본고를 수리할 때에 목물값 쌀 82석은 선혜청에서 매년 지불함.

각 전(殿)ㆍ궁(宮)에 공상(供上)하는 것 10,100정 3월부터 9월까지.

각 궁방(宮房)에 660정 5월부터 7월까지 각 전ㆍ궁 아지(阿只) 시녀(侍女)ㆍ장번내관(長番內官)ㆍ내반원(內班院)에 900정 5월부터 7월까지로 하나 시녀청에는 6월로부터 7월까지.

종친(宗親 국왕의 친족)ㆍ문ㆍ무 2품 이상ㆍ삼사장관(三司長官)ㆍ육승지(六承旨)ㆍ제상사(諸上司) 패빙(牌氷 패를 가지고 찾는 얼음)이 9,144정 각원(各員) 패빙은 다만 6월 한 달뿐이고, 매 패(牌)에 10정이며, 각 사 예빙(例氷)은 한 달 혹은 두 달로 하되 많고 적음은 같지 아니함 내빙고 이래조(內氷庫移來條)ㆍ각 궁방(宮房)ㆍ내각(內閣)ㆍ내반원(內班院)에 반빙(頒氷)하는 것 1,800정 5월부터 7월까지.

시임(時任 : 현임(現任)) 직각(直閣)ㆍ대교(待敎) 각 45정, 제학(提學)ㆍ직제학(直提學) 각 90정, 원임(原任 : 전임(前任)) 각 10정 을 합계한 얼음 22,623정. 각사의 반빙을 받을 각원(各員)에게는 선공감(繕工監)에서 패를 제조하여 공급하되 패면(牌面)에 받을 정수(丁數)를 써서 얼음을 받는 데 빙고(憑考)가 되게 함.


사실 이렇게 관에서 배급하는 얼음 외에도 시중에서 사사로이 얼음을 저장해 쓰는 사람도 적지 않았을 겁니다. 뭣보다 1급 기방 같은 곳에서는 얼음 없이 한여름에 손님을 받을 수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다 보니 얼음 수요를 놓고 부정행위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예종 1년 기축(1469), 7월2일의 기록입니다. 

서빙고의 관리와 예빈시·내섬시 등 제사의 얼음을 저장하는 관리를 추국하게 하다
의금부에 전지하기를,
“서빙고(西氷庫)에 저장한 얼음은 처음에 단단하지 않아서 녹아 없어지기에 이르며, 또 얼음을 흩인 후에 여염(閭閻)에 많이 파니, 서빙고의 관리와 예빈시(禮賓寺)·내섬시(內贍寺)·의금부(義禁府)·군자감(軍資監) 등 제사(諸司)의 얼음을 저장하는 관리를 추국하여 아뢰라.”


또 성종은 옥중의 죄수들에게도 얼음을 하사해 당대의 거유 점필재 김종직을 감동시켜 이런 시가 나오게 됩니다.

때로는 아첨 집어다 졸린 눈에 뻗지르고 / 時點牙籤挑睡睫
한가히 누수 들으며 저녁 종을 기다리기도 / 閑聽銅漏待昏鐘
성상께선 오히려 백성의 더위를 염려하여 / 九重尙軫元元熱
감옥에까지 얼음을 나눠 주도록 윤허하도다 / 更許頒氷岸獄中


이런 아버지를 닮지 못한 폭군 연산은 반빙을 막아 민심을 분노케 하죠. 연산군 10년 갑자(1504) 7월6일의 기록입니다.
 

전교하기를, “예조(禮曹)가 더 반빙(頒氷)하기를 청하였는데, 얼음은 비록 많이 저장되어 있으나 궁중에 남빛 물들일 물건이 많아서 반드시 많이 쓰리니, 더 반사(頒賜)하지 말라.”
하였다.


그로부터 3년 뒤, 중종반정이 일어나 연산군은 쫓겨납니다. 뭐 여기서 인과관계를 찾기는 쉽지 않겠지만 어쨌든 이럴 때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도 하죠.^^

아무튼 이렇게 해 놓고 슬며시 정작 얘기하고 싶었던 주제인 '냉방온도 상한제'로 넘어갑니다. 애당초 무더위 속 냉방으로 전력이 부족하지 않도록 대비했어야 하는 것도 물론이지만, 더위를 참는 걸로 전력 대책을 삼으라는 것도 참 답답한 일입니다. 국민을 시원하게 해 줘도 모자랄 판에 자꾸 덥게만 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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