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혹은 '노르웨이의 숲'을 읽은 사람 중에(전 세계에 1000만명이 훨씬 넘는다고 합니다) 이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 질 경우 절대 보러 가지 않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감독이 쩐 아인 훙(흔히 트란 안 훙이라고 번역되는 Tran anh hung의 실제 발음은 여기에 훨씬 가깝다고 합니다. 한자로는 陳英雄. 베트남어에 '트란'이란 발음은 없다는군요)으로 결정되고, 나오코 역의 배우가 기쿠치 린코로 결정되면서 "이따위 영화는 안 만들어지는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겁니다. 특히 쩐 감독의 최신작 '나는 비와 함께 간다'를 본 사람들 사이에선 이런 감독에게 영화화를 허락하다니 무라카미 하루키가 제 정신이 아닌게 아닐까 하는 의견도 있었죠.
막상 그렇게 마음을 먹었으면서도, 시간이 흐르고 흘러 정작 영화가 만들어지자 마음 속 한 구석이 간질간질해지기 시작합니다. 이건 그래도 한번 봐 줘야 하는게 아닐까. 욕을 하더라도 어떻게 만들어 놨나 한번은 봐야 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결국은 이기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서의 첫 느낌. '못 볼 정도는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만족과는 거리가 멀더군요.
원작을 아니 보신 분에게 '상실의 시대'의 줄거리를 어떻게 요약할 수 있을지는 참 난감합니다. 특히 영화와 연동해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권장사항은, "원작을 읽지 않은 사람은 아예 영화를 안 보는게 낫다"입니다. 줄거리 따라가기도 아마 벅차지 않을까 싶네요.
1960년대말, 와세다 대학 신입생이 된 와타나베(마츠야마 켄이치)에겐 자살한 친구의 연인이었던 나오코(기쿠치 린코)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마음 속 상처가 있습니다. 어떻게든 나오코와 가까워지고 싶지만 나오코는 연인의 자살이 준 상처로 인해 점점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리고 있죠. 그러는 사이 와타나베는 발랄하고 엉뚱한 동급생 미도리(미즈하라 기코)에게 마음이 끌립니다. 나오코가 있는 산 속 요양원과 미도리가 있는 도쿄의 캠퍼스 사이를 오가며 와타나베의 스무살이 지나갑니다.
'상실의 시대'는 어쩌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중에서는 가장 영화로 옮기기 쉬운 작품일 지도 모릅니다. 다른 작품들처럼 어지럽게 현실과 환상을 오가지도 않고, 시간에 따른 내러티브의 진행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분명히 영상화하는 데에는 엄청난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되어 온게 사실입니다.
그때문에 원작자 무라카미도 쏟아지는 영화화 제의를 굳게 거절해 온 게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쩐 아인 훙이 이 영화를 만들게 허락하는 모습을 보니, 무라카미는 아마도 영미권의 감독이 제안을 했다면 진작에 OK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가 원한 건 원작의 감성을 잘 살려 줄 연출이 아니라, 이 작품을 영상물로 만들어서 세계적인 관심을 받게 할만한 연출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약간은 불측한 상상입니다.^^) 그리고 영화는 그런 고심을 그대로 드러내줍니다.
아마도 가장 많은 사람들의 불만은 기쿠치 린코가 과연 나오코 역에 적합한 배우냐는 것으로 모아질텐데, 이 답은 보기 전부터 많은 분들이 생각하신 바와 같습니다. 전혀 아닙니다. 나오코가 단순히 산골 요양원에서 죽어가고 있는 자폐증의 스무살 여자라면 기쿠치는 꽤 좋은 연기를 보여줬습니다. 하지만 나오코는 스무살 와타나베의 가슴을 찢어 놓을 만큼 아름다워야 하는데, 이 배우는 전혀 그런 역할에 적절하지 않습니다. 쩐 감독의 눈이 의심스러워지는 순간입니다.
(물론 위의 속물적인 '세계적인 관심' 이론을 적용하면 또 상황은 달라집니다. 쩐 감독과 무라카미는 이런 대화를 나눴을 수도 있겠죠.
쩐: 아무리 생각해봐도 기구치 린코밖에 없어.
무: 뭐라고! 그건 말도 안돼! 그건 나의 나오코에 대한 모욕이야!
쩐: 이봐, 잘 생각해 보자고. 나는 이 영화를 갖고 유럽 3대 영화제에 갈 수 있는 감독이야. 그런데 거기엔 아시아의 뮤즈가 필요하다고. 유럽의 바보들이 생각하는 아시아 최고의 미녀 여배우가 누구겠어? 일본 유일의 아카데미상 노미네이트 배우를 두고 왜 내가 다른 선택을 해야 하지?
무: 그래도 스무살 나오코 역에 서른살 먹은 못생긴 배우를 쓴다는 건 좀...
쩐: 오우 노우. 유럽의 바보들이 보기에 일본 여배우는 다 베이비페이스야. 당신이 원하는 게 한국 중국 일본의 관객들인가? 그 사람들에게 당신은 이미 더 올라갈 데가 없어. 당신에게 진정 필요한 건, 아직 당신을 모르는 세계의 독자들이야! 그럼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다고!
무: 그, 그럴까?
쩐: 그럼! 당연하지! 유럽 매스컴의 찬사가 보이지 않아? '아시아의 신비로운 미녀 린코가 무라카미의 원작을 환상적으로 재현해 냈다' 부라보! 기쿠치가 들어 오면 우린 벌써 해 낸거나 다름없어!
<= 물론 전부 농담입니다. 절대 도청한 적 없습니다. 제 상상입니다.)
심지어 기쿠치 린코를 나오코로 쓴 것보다 더 나쁜 점은 나오코의 비중이 지나치게 크다는 겁니다. 나오코에게서 벗어나지 못하는 와타나베의 갈등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나오코는 오히려 주인공 와타나베보다 영화 전반에서 더 중시되고 있습니다.
나오코에 집착하는 감독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일단 미도리. '봄날의 곰처럼'이 없는 미도리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지만 쩐 감독은 과감하게 미도리 부분을 삭제해 버립니다.
미도리 역의 미즈하라 기코는 한국계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0.1초도 의심하지 않고 동남아 혼혈이라고 생각했을 느낌입니다. 아마도 쩐 감독의 취향이 가장 잘 반영된 캐스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아울러 쩐 감독이 이해한 이 작품의 분위기는 대다수 한국 독자들의 느낌과는 분명한 온도차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한국 독자들이 이 작품을 좋아한 이유는 절망과 희망이 5:5 정도로 적절하게 배합된 느낌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쩐 감독은 7:3 정도로 절망에 집착합니다. 심지어 마지막 시퀀스조차도 와타나베의 새로운 희망을 보여준다기보단 여전히 과거의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한 음침함만 풍겨 나옵니다.
마츠야마 켄이치의 연기력이나 외모는 와타나베를 구현하는 데 부족함이 없지만 그 혼자서 건져 내기엔 다른 캐스팅이나 전체적인 영화의 분위기가 너무 무겁습니다. 게다가 충실하게 와타나베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이 원작의 매력이라면, 이 영화는 그 시선을 너무 흩어놓습니다. 심지어 나오코나 미도리도 아니고, 레이코의 시선으로도 영화를 보게 만듭니다. (그리고 조 아무개 감독님의 지적대로 이 레이코는 원작과는 달리 너무 미인입니다. 게다가 레이코스러운 농담은 완전히 사라진, 이상할 정도로 심각하고 차분한 레이코입니다.)
쩐 아인 훙이 성공하고 있는 건 다양한 구상을 통해 구현되는 화면의 색채와 영상미입니다. 특히 60~70년대풍의, 다소 정제되지 않은 원색 위주의 색감과 자연이 보여주는 조화는 매우 훌륭합니다. 그러나 이런 장면들이 필요했다면 우리는 훨씬 더 잘 해낼 수 있는 대안이 있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만약 무라카미가 왕가위의 제의를 받아들였다면 우리는 훨씬 더 마음이 놓이는 '상실의 시대'를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번 '상실의 시대'는 필사적으로 원작 '상실의 시대'를 요약하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빠져 있는 부분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과연 살려 놓은 부분이 얼마나 효과적으로 살려져 있는지는 매우 의문입니다. 다소 천박한 용어지만 '선택과 집중'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80년대에 60년대를 배경으로 쓰여진 '상실의 시대'가 여전히 지금의 20대에게도 유효한 원작이라면, 그 이유는 '스무살'이라는 말 속에 들어 있습니다. 스무살 때에는 이 세상에서 '스무살 전후의 사람들' 이외의 사람들이나 사물은 대체 왜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법입니다. 아울러 자신의 인생에서도 '열다섯에서 스무살 사이에 일어난 일' 이외의 사건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매우 힘든 법이죠. 그런 사건들 역시 긴 시선에서 보면 다섯살 때나 일곱살 때 일어난 그저 그런 사건들과 별 차이 없는 일이라는 걸 알게 되려면 10년 이상 더 살아 봐야 합니다.
무라카미는 어느 시대, 일본이란 나라에 살았던 '스무살 짜리' 들의 이야기를 통해 온 세계가 공감한 '상실의 시대'를 써 냈고 그걸로 세계적인 작가가 됐습니다. 그리고 이제 24년전에 쓰여진 이 작품을 영상으로 변신시키는 모험에 참여했죠. 과연 그 결과가 어떤 것이 될지는 전 세계의 '스무살 짜리' 들이 판가름할 일인 듯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비관적이지만, 굳이 영화도 책도 읽지 않은 그 언저리 나이대의 분들에게 권장한다면, 일단은 책을 읽어 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P.S. 레이코의 트라우마 부분은 오히려 영화적으로 매력적이었을 듯 한데 왜 사라졌는지 궁금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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