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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여름 시즌의 블록버스터들은 치열한 눈치 싸움 끝에 개봉 날짜를 잡습니다. 당연히 방학 앞부분, 즉 7월 초쯤에 개봉하는게 제일 좋겠지만 그렇다고 무리하게 날짜를 앞당겨 경쟁작과 '박치기'라도 하게 되면 피해가 막심할 수도 있습니다. 미국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개봉 첫주 박스 오피스 1위' 달성은 매우 중요한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미국보다 훨씬 더 '기업 마인드'로 스크린수를 조절하는 한국 멀티플렉스들의 성향으로 볼 때, 미국처럼 개봉 초기에는 미미했지만 점점 더 스크린 수를 불려 나가며 롱테일 흥행작으로 우뚝 서는 경우는 더 보기 힘듭니다.  

그런 의미에서 8월 후반에 개봉하는 작품들은 스스로 약세를 인정한 셈이라는 시각이 있었는데, 의외로 올해는 8월 중순 개봉작들이 완성도 면에서 훨씬 더 뛰어나다는 입소문이 났습니다. '최종병기 활'과 '블라인드'가 그렇고, 외화 중에도 '혹성탈출 2'가 평이 좋더군요.


인조반정. 광해군의 측근에 대한 토벌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어린 남이와 자인은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북쪽으로 달아납니다. 아버지의 친구 김무순(이경영)에 의해 길러진 남매. 자인(문채원)은 곱게 자라 무순의 아들 서군(김무열)과 혼인을 하게 되지만, 혼인 당일날 병자호란의 발발로 청의 군대에 의해 마을은 쑥대밭이 되고 서군과 자인은 포로로 끌려가는 몸이 됩니다.

바뀐 시점. 청의 바이러(貝勒)이며 황제의 동생인 용장 쥬신타는 전쟁을 마치고 귀환하는 길에 이상한 궁수 하나가 앞서 귀환한 조카(청의 황자)를 뒤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말을 재촉해 보지만, 북쪽으로 갈수록 그 궁수가 놀라운 솜씨를 갖고 있으며, 자신이 한 마을에서 본 이상한 자와 동일인물이라는 확신만 굳어 갈 뿐입니다.



일단 영화를 보고 나면 왜 이 영화가 이렇게 뜨거운 호응을 얻고 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화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속도감이 일단 발군입니다. 주인공들의 감정을 설명하기 위해 굳이 따로 감정 신을 나열하는 식의 구태의연한 연출은 없습니다. 석양이나 모닥불을 바라보면서 주인공들이 굳이 자기의 속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시 같은 대사를 읖조리게 할 만큼 이 영화는 한가하지 않습니다.

이 부분에서 약간의 손실이 있어 보이긴 하지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정신은 분명합니다. 그 결과, 시작부터 끝까지 영화의 탄력이 살아났습니다. 어느 부분을 짚어도 탱탱하게 튕겨나갈 듯한 박진감이 느껴집니다. 김한민 감독의 전작 '극락도 살인사건'과 비교해 볼 때, 윤색에 참여했다는 하리마오 픽처스('추노'와 '7급 공무원'을 히트시킨 천성일 작가의 회사입니다)의 공헌이 꽤 커 보입니다.

아무튼 재미 요소에서 이 영화는 근 몇년 동안 개봉됐던 한국 영화 가운데 최상위권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에게나 권해도 욕 먹지 않을, 잘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주연배우들의 힘은 굳이 말할 게 없을 정도입니다. 특히 쥬신타를 연기하는 류승룡의 중량감이야말로 영화의 큰 힘입니다. '고지전'의 인민군 중대장 역할이 비슷한 시기에 공개됐다는 것이 다소 불만이긴 하지만, 아무튼 '넘어야 할 막강한 적'이면서 '그 적에게도 싸울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알려주는 역할로 이보다 좋은 캐스팅과 연기는 찾기 힘들 듯 합니다.

박해일의 남이는 참 흥미로운 역할입니다. 만약 다른 배우가 맡았다면 전혀 다른 캐릭터가 됐을 거라는 생각이 들게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장혁이 이 연기를 했다면 정말 진중한 캐릭터가 됐을 거라는 생각이 들죠. 하지만 박해일이었기 때문에, 극도로 비장미 넘치는 장면에서 슬랩스틱에 가까운 장면까지 캐릭터의 폭이 훨씬 넓어졌습니다. 물론 취향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역시 이 영화가 이 정도까지 큰 호응을 얻는 데 있어 박해일의 힘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는 쪽에 표를 던지겠습니다.



도르곤 역의 박기웅을 비롯해 남이를 잡기 위해 목숨을 걸고 추격하는 니루들의 역할도 모두 이름이 하나씩 붙어 있더군요. 아무튼 요즘은 영화를 보다 보면 정말 저 장면 하나 찍기 위해 진짜 목숨을 걸어야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때가 많습니다. 특히 절벽에서 따라 뛰는 장면 같은 부분에서는 대체 어떻게 찍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 정도.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들은 사실 꽤 중량감이 있습니다. 한국인이니 당연히 광해군과 북방 외교 정책, 인조반정과 서인의 득세에 이은 외교 균형의 파괴, 그리고 그 뒤로 이어진 역사적인 치욕에 대해서는 관객의 사전 지식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도르곤이나 정황기, 바이러나 니루 같은 청나라의 군 제도에 관련된 단어들이 아무런 설명 없이 쑥쑥 튀어 나오고 육량시, 애깃살 같은 군사 전문 용어(?)도 마구 등장합니다. 물론 몰라도 영화를 즐기는 데에는 전혀 상관이 없지만, 알고 보면 볼수록 더 재미있어 진다는 것도 이 영화의 특징입니다. (뭐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이니 직접 검색해서 찾아 보시는 것도 영화를 즐기는 방법일 듯 싶습니다.)

영화 속 청의 군대가 사용하는 언어는 이제 사어 취급을 받는 만주어입니다. 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복원한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그런데 만주어를 복원할 정도의 공덕인데 남이와 서군은 어찌하여 이렇게 현대화된 한국어를 쓰고 있는 것인지...)



단지 하나 딴지 아닌 딴지를 걸자면, 이 영화가 가리키고 있는 '병자호란'이라는 시기와 사용되는 무기가 적절한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청의 주력이 일단 궁장기병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청의 팔기군은 이 궁장기병의 기동력으로 총포를 사용한 명군을 무력화하며 승승장구한 기록이 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이 청을 상대로 기록한 몇 안되는 전과 가운데 하나가 청 태조 누루하치의 사위라는 명장 양고리(楊古利)를 사살했다는 것인데요, 여러가지 주장이 있지만 양고리는 고창 출신 무장 박의의 조총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이 가장 신빙성있게 보입니다. (물론 원두표라는 설도 있고, 무명의 병사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방어 전술은 활보다는 총포를 중심으로 한 성곽 체제였고, 조선을 대표하는 병기 역시 조총으로 급격히 변해갔다고 알고 있습니다. 물론 영화 속 남이가 정규군 소속도 아니었고, 혼자 산속에서 무예를 익힌 인물이었으므로 활대 활의 개연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 영화를 처음 만들 당시에도 '배경이 병자호란이라면 활대 활이 아니라, 청의 활대 조선 총의 대결이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곤 했습니다.

(써놓고 보니 괜한 지적질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심지어 일부 기록은 박의가 양고리를 사살한 무기가 활인 듯 묘사하고 있기도 합니다만...ㅋ 5천년 역사를 이어온 조선 명궁의 전설이 '명포수'로 바뀌어 가는 것이 이 시대였기 때문에 해 본 얘기였습니다.)



아울러 한가지만 더: 속도감을 높이는 편집을 위해 많은 것이 희생되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위에도 했지만, 그래도 남이와 몇몇 동료들이 '호랑이 사냥을 위해 압록강 일대를 자주 넘나들어 주변 지리에 익숙해 있었다' 정도의 밑밥은 영화 앞 부분에 좀 깔아 두는 것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지막으로 영화 속 남이의 활에 써 있던 문장 해석. 전추태산 발여호미(前推泰山 發如虎尾)는 '앞은 태산처럼 무게를 두고 시위는 호랑이 꼬리처럼 말아 쏘라'는 뜻입니다. 알고 보니 국궁 용어 중 유명한 전추태한 후악호미(後握虎尾)의 변형이더군요. 뜻은 마찬가지입니다.



댓글
  • 프로필사진 흐르는 강물처럼 설마 1등

    1등이 맞군요.
    송기자는 요즘 워낙 글을 안올리셔서 혹시나 하고 와봤는데 운좋게 1등이네요.
    많이 바쁘시겠지만 간혹 글좀 올려주세요.
    송기자님 글 읽는 낙이 제법 쏠쏠했는데...
    2011.08.15 11:47
  • 프로필사진 송원섭 잊지 않고 찾아주셔 감사. 2011.08.20 10:32 신고
  • 프로필사진 지나가다 빠른 전개와 주연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활 시위 에서 당겨진 활이 빠르게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듯 조준 되는 모습이 영화 의 모든것을 말하고 있는 듯 해요. 2011.08.15 12:19
  • 프로필사진 송원섭 암요. 2011.08.20 10:32 신고
  • 프로필사진 아자哲民 올여름도 끝나가는 군요.
    블록버스터들의 승부도 이제 슬슬 종료되어 가네요.
    2011.08.15 13:03
  • 프로필사진 송원섭 내년 금세 옵니다.^^ 2011.08.20 10:32 신고
  • 프로필사진 이지연 아~~~ 이건 정말 극장에서 봐야하는 건데...ㅠㅠㅠㅠ
    제가 처한 지리적 여건 탓에 컴에 다운 받아 볼 수 밖에 없군요..ㅠㅠ
    2011.08.15 15:07
  • 프로필사진 송원섭 좋은 데 사시나보군요.^ 2011.08.20 10:32 신고
  • 프로필사진 후다닥 이번주말 예약했습니다.. ^^;;;
    전에 언뜻 본 기록에는 구한말 러시아 포수들이 연발도 안되는
    구식장총으로 호랑이 잡는 조선의 포수들을 보고 기겁했다는
    글이 생각나네요...
    우리나라 사람들 확실히 쏘는 거에는 재능이 있나봅니다..
    2011.08.16 08:11
  • 프로필사진 송원섭 어떻게 허락을 받으시고...? 2011.08.20 10:33 신고
  • 프로필사진 whatsupdude 채원양의 연기가 기대 이상이라고 들었어요...
    이 영화로 연기력 논란이 종식^^되고
    비호감 이미지도 개선되면 좋겠네요...
    채원양의 팬은 아닙니다만
    애궂은 악플에 희생되는 모습이
    가엽더라구요...쩝...
    2011.08.16 11:30
  • 프로필사진 송원섭 그런가요? 뭘 잘못했길래.. 2011.08.20 10:33 신고
  • 프로필사진 사랑과평화 청조에 왠 활? 하는 생각이 저도 드네요.

    신기전이나 최종병기활드의 영화들이 자꾸 나오는 것은 우리 나라 역사 그 중에서도 조선조에 대하여 아쉬운 부분들이 참 많다는 방증인것 같네요.

    요샌 영화도 안보면서 댓글질만 자꾸 하네요. ㅋ
    2011.08.16 14:11
  • 프로필사진 송원섭 z 2011.08.20 10:33 신고
  • 프로필사진 Harryc 중국 동북부 오지의 노인 열 명 정도가 사용하는 언어라는데
    '고대 민족문화 연구원'에 도움을 요청해서 리얼만주어 사용 가능했다라는...ㅎ
    우리나라 CG기술이 날로 날로 발전해갑니다~
    2011.08.16 16:37
  • 프로필사진 송원섭 하하. 글게요. 2011.08.20 10:33 신고
  • 프로필사진 unchi 남자들은 총보단 칼, 활 뭐 이런걸 좋아한다더군요.

    그래서 계백보다는 무사쪽을 더 선호한다고도...

    순전히 제 짝을 위해 선택한 영화였는데 잼나게 봤어요.

    아, 전 무순의 아들이 지 목숨이나 건지자는 찌질남이겠거니 했었는데, 제가 왜 이런 선입견을 가지게 된건지 곰곰 생각해봤더니, "작전"에서 본 그 사람이여서 아마도..ㅋㅋ
    2011.08.17 16:39
  • 프로필사진 송원섭 계백도 칼이고 백동수도 칼인데...? 2011.08.20 10:34 신고
  • 프로필사진 지나가다가 도르곤 왕자가 입은 청색 갑주를 본 순간, 역사책 도판에서 보았던 청 건륭제의 기마도를 그대로 재현했구나 해서 괜히 반가운 생각이 들더군요^^

    근데, 도르곤은 소현세자 등을 인질로 끌고 가고, 공녀로 온 조선의 공주(실제로는 임금의 10촌 너머 먼 친척인데, 나라의 화평을 위해서 공주로 입양처리해서 보냈지요)를 부실로 맞이하고 오래도록 권세를 누린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영화속에서는 어이없이 죽어 버리더군요..

    마지막에 서군-자인 부부가 압록강의 조선군막을 바라보면서 조국으로 가는 길임에 안도하는 모습을 보면서 안타깝더군요...한명기 교수 글을 보면, '도망자는 다시 청으로 돌려보낸다"는 청나라와의 화약을 굳건히 지킨(국가간 신의를 유달리 지켜서라기보다는 백성 몇때문에 시끄러워지는 것이 싫은 조선 지배층의 무사안일주의로 ) 병자호란이 지난지 30년만에 살아서 도망온 사람도 조선에서 받아 주지 않아서 결국에는 울면서 청으로 쫓겨갔다고 하던데..서군-자인 부부도 그런 경우를 당하지 않았을까??? 무인의 아들/딸이 이들 부부가 그 낌새를 알고 조선군이 경비서지 않는 곳으로 몰래 접안해서 무사히 조선으로 입경할 수도 있었겠지만요...

    글구, 서군-자인이 중심인물이니 그들만의 생사만 중요한게 영화이지만, 자인과 같이 있다가 남이의 습격으로 일시 청군의 군막에서 탈출했던 사람도 물설고 낯선 이국의 땅에서 결국에는 도망자 추적에 나선 청군에게 잡혔을 것이고, 그렇지 않았더라도 산야를 헤매이다 추운날씨에 얼어 죽고, 굶어 죽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니, 중심인물 살리려고 다른 사람들이 무수히 희생되었겠구나는 생각이 들더군요...
    2011.08.22 10:50
  • 프로필사진 착하신 분.. 영화 보면서 너무 심오한 생각을 하시는군요. 2011.09.09 16:06
  • 프로필사진 만주어 읽기 만주 왕자에게 잡혀가서 고기를 뜯어 먹으며 만주어 대사를 하는데, 무슨 말인지 못알아듣는데도 책읽는 줄은 알겠더만요. 2011.08.24 21:06
  • 프로필사진 잘 읽었습니다 코멘트를 조심스레 처음 남겨 봅니다.^^; 저도 역사에 관심이 많아 병자호란에 대한 글을 찾다 이곳까지 찾아왔네요.ㅎㅎ 후기 잘 봤습니다. 활을 보면서 궁금했던 무기에 대해 어느정도 해소하고 가네요^^ 정말 잘읽었습니다~! 저는 초반에 나왔던 기생의 칼춤(?)이라고 하나요, 춤도 매력적으로 다가왔고 그 시기의 복색과 한복에 대해 많은걸 볼수 있었던 좋은 영화 같았습니다. 2011.08.25 02:00
  • 프로필사진 세바스찬 시사회 응모부터 하다가 떨어지고
    엊그제야 간신히 본 영화입니다.^^
    개봉전부터 기대가 많았기에 재밌게 잘 봤구요.

    개인적으로는 영화볼때 개성 전투신에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초야의 무인(?)이라고 할 수 있는 남이야 당연히 활로 싸우는게 정황상 당연하다고 생각이 들고...
    청나라 군사의 기습에 대응하는 조선군이 다들 활만 들고 있더군요. 사실 정규군이라면 조총이 주력이고 아무리 허접해도 수비용 화포들은 성곽이 구축되어있었던걸로 아는데 말입니다.
    물론 성 전투신이 워낙 부수적인거지만 갑옷도 무장도 완전 엉망인게 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었죠.
    2011.09.20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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