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가몬 박물관 2층으로 올라가면 뜬금없이 방 하나가 나타난다.
(혼동을 막기 위해 다시 한번 강조하면, 한국식으로는 3층에 해당한다)
알레포의 방 Aleppo Room 이라는 전시물이다.
이 대목에서 알레포가 누구야, 라고 하시면 안됨.
왜냐하면 알레포는 지명이라서.
지도 보시다시피 알레포는 레반트 지역의 북쪽, 시리아 북부의 도시다.
십자군 전쟁 관련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 없는 오래 된 도시.
이 방은 17세기 초, 알레포의 기독교인 거주구역에 있던 한 부유한 상인의 집에서 방 하나를 통째 뜯어내 재현한 것이다.
(독일 분들은 뭔가 통째 뜯어와 재현하는 걸 참 좋아하지 싶다.)
옆방은 여전히 복원 공사가 진행중이다.
자세히 보면 볼수록 방 안의 치장이 정교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는 엄청난 양탄자의 습격이다.
뭔가 엄청나게 비싸 보이는 이런 작품도 있고,
(왠지 애니메이션 캐릭터처럼 보이는 형상들이 날고 있다)
이 박물관 전시품들 중 가장 큰 카펫. 7.68 x 2.98 m 크기로 무게만 50kg에 달한다.
무굴 제국의 샤 자한이 자신의 왕궁 또는 아내의 무덤(타지 마할)에 깔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고.
(그렇다고 인도에서 만든 것은 아니고, 만들어진 곳은 바그다드 근처로 추정된다고.)
본래 카펫에는 동물 그림은 넣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고 어디선가 들은 것 같은데 이 카펫은 용과 불사조가 그려져 있다.
뭐 실물이 있는데, 해도 되는 거겠지.^^
아무튼 양탄자 사진만 한 20장 찍어왔는데 양탄자에 토하실 수도 있으니 이 정도로 한다.
안쪽으로 죽 들어가 보면 역시 꽤 큰 형상에 눈길을 끈다.
므샤타 Mshatta 의 궁전 성벽을 홀랑 뜯어 와서 전시중이다.
Mshatta를 대체 어떻게 읽어야 하나... 음샤타? 므샤타? 어디를 봐도 별 지침이 없어 곤란했는데 유네스코 페이지는 친절하게 Mushatta 라고 표기해 놓고 있다. 고마워요 유네스코.
(바르셀로나 화이팅)
우마이야 조 Umayyad 는 이슬람교의 성립 이후 최초로 등장한 통일 아랍 왕조다.
(아랍어를 옮기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으므로 중역 과정에서 옴미아드 혹은 옴미야드 조라고 배운 사람도 많은 것 같다. 사실 그런걸 누가 다 기억해. )
지배자는 칼리프 caliph 혹은 칼리파 Khalifah. 기독교 문화권에 비교하면 칼리프는 교황, 술탄은 황제라고 보면 된다...고 예전에 배운 것 같다.
이 므샤타 유적이 건설된 시기는 8세기, 그러니까 우마이야 조의 말기라고 보는 것 같다.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안 가봤지만 공항 가는 길이라고)
이런 유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고 한다. 뭐 여기서 뜯어가고 저기서 뜯어가고... 했겠지.
그래도 아직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이라니 대단하다.
사람이 사는 게 유적 보호에 좋은지, 안 사는게 유적 보호에 좋은지, 늘 궁금하다.
아무튼 페르가몬 박물관에 와서 30여년만에 들어보는 고유명사들을 다시 영접하려니 좀 당황스럽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이 일 한국(Il-Khanate)만 해도 그렇다.
몽골 제국은 징기스칸 사후 서서히 대원제국과 네 개의 한국으로 정리되어 간다. 중국과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원(元)제국은 익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원나라고, 네 개의 한국은 각각 일 한국, 킵차크 한국, 차가타이 한국, 오고타이 한국이다.
차가타이(징기스칸의 2남)와 오고타이(징기스칸의 3남, 공식 후계자) 한국은 중앙아시아 지역을 남북으로 나눴고, 징기스칸의 손자들이며 위대한 정복자 바투(친자 여부가 의심스러운 징기스칸의 장남 주치의 아들)와 훌라구(4남 툴루이의 아들, 쿠빌라이의 동생)는 그보다 더 서쪽으로 진출했다. 그래서 훌라구는 아랍 지역을 차지해 일 한국을, 바투는 러시아를 거쳐 폴란드와 헝가리까지 진출해 킵차크 한국을 세웠다. 만약 바투가 몽골 제국의 황위 계승 분쟁 때문에 귀환조치를 받지 않았다면 서유럽도 몽골 제국의 일부가 되었을 지 모른다.
[징기스칸 전기와 그 부록 - 징기스칸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들 - 을 열심히 읽은 것이 근 40년 뒤에 이런 데 도움이 될 줄이야.]
어쨌든 독일 제국의 관심사는 중근동 지방이었으므로 페르가몬 박물관은 일 한국의 유물들을 전시해 놓고 있다.
물론 그런 나라가 있었다는 것을 알 뿐이지, 그 나라의 문화가 어땠는지, 심지어 어디 말을 썼는지, 그런 거야 알 바 아니다. 일 한국의 영토가 이란, 이라크, 동부 터키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었으니 당연히 그 지역 문화에 흡수됐겠지... 하는 정도.
생각해보면 학교 다닐 때 몽골 제국의 후예들이 4개의 한국을 세웠다는 말에 오오 우리가 몽골 제국의 후손인가 하는 바보들도 좀 있었는데, 이 한국은 韓國이 아니라 汗國, 즉 '칸(汗, Khan)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뜻이다. 영어로는 Khanate.
(요즘은 이렇게 한국이란 이름이 혼동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한국에서도 '칸국'이란 말을 더 많이 쓴다고 한다.)
뭐 그렇다고.
그렇다고 생각하고 보니 어쩐지 짙은 몽골 냄새가 나는 것도 같다.
알함브라에서 본 듯한 이런 것도.
알함브라 얘기를 하고 있자니 진짜 알함브라에서 뜯어 온 것도 있다.
알함브라 돔 Alhambra Dome 이라고 불리는 목조 천장
알함브라의 나스르 궁을 가 보신 분들은 이것과 거의 비슷한 천장을 많이 보셨을 거다.
차이가 있다면 이 천장은 목조고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다.
아르투르 폰 귀너 Arthur von Gwinner라는 독일 은행가가 알함브라 지역의 부동산을 샀다가 스페인 정부에 다시 기증한 댓가로 이 목조 천장을 뜯어 올 권리를 얻으셨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유물 하나.
상아로 만든 뿔피리(Oliphant)다. 서사시 '롤랑의 노래'에 나오는, 롤랑이 불고 죽은 바로 그 피리...는 아니지만, 아무튼 그 피리와 같은 종류의 올리펀트다. 길이 50cm 정도. 꽤 크다.
중세 내내 아랍령이었던 시실리 지역에서 만들어 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모양의 올리펀트는 유럽 전역과 북아프리카에 걸쳐 발견된다. 심지어 조각된 문양에도 비잔틴, 아랍, 기독교 양식의 특징이 골고루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 뿔피리 하나에 유럽과 중근동의 역사가 다 담겨 있는 셈이다.
아무튼 가능한 한 짧은 시간 사이에 페르가몬 박물관을 훑고 나오는 동안 우마이야 조, 사마라, 압바스 조, 파티마 조, 티무르 제국, 호라즘, 셀주크 투르크, 사파비 조, 앗시리아, 사산 조, 수메르 등등 언젠가 뇌 한 구석에 들어왔다 나갔던 수많은 고유명사들이 다시 한번 머리 속을 명멸하는 것을 느꼈다.
아마 죽을 때까지 내가 저런 고유명사들의 의미를 다시 알게 될 일은 없을 지도 모른다. 그만치 인생은 짧고, 인류가 구축해 놓은 유산들은 너무나 많다.
50이 되면 이제 새로운 것을 배우는 건 그만 둘 때가 된 거라고 며칠 전에 한 선배가 말씀하셨지만, 아직은 그 이야기를 부정하고 싶다. 세상은 넒고 알고 싶은 건 아직 너무나 많은데.
사실 페르가몬을 보고 왔지만, 정작 페르가몬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이 거대한 '페르가몬의 제단'은 보지 못했다.
기적적으로 2차대전 때 살아남은 이 유물은 현재 대대적인 보수에 들어가 있고, 2020년에야 다시 공개될 전망이다.
밀레투스의 시장 문도 어마어마했지만 이 제단에 비하면 소규모 유물인 셈인데.
과연 언제 또 베를린에 들러서 저 제단의 계단을 직접 밟아 볼 일이 있을까, 솔직히 장담할 수가 없다.^^
아무튼 저 제단 때문에 페르가몬박물관에 가 볼 날을 꿈꿨지만, 저 제단 없이도 페르가몬은 충분히 위대했다.
밖으로 나오니 하늘엔 한껏 구름이 끼어 있다.
박물관 하나 보고 나왔는데 벌써 다리가 아파 온다. 자, 박물관 섬에서 두번째 박물관으로 황금 모자를 보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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