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엠비씨 일기예보 배경음악(일설에 따르면 오늘의 주요 프로그램 안내 배경음악이라고도 한다^^)으로 늘 나오던 청승맞은 기타 연주곡이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그 곡의 제목이 '알함브라(궁전)의 추억'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알함브라 궁전? 뭔가 아라비안 나이트 풍의 이름을 가진 이 궁전이 아라비아가 아닌 스페인 땅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세월이 또 흘렀다. 제법 머리가 굵었고 왜 스페인에 아랍인들의 궁전이 있는지도 알았다. 또 세월이 흘러 그 유명한 알함브라 궁전에서도 가장 유명한 구역은 바로 나스르 궁전이고, 그 나스르 궁전이야말로 이슬람 세력이 스페인 땅에 남겨 놓은 최고의 보물이라는 이야기를 귀가 닳도록 들었다.
그리고, 드디어 왔다.
바닥도 예사롭지 않아.
드디어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사실 작다면 작은 공간이다. 나스르 궁전은 절대 규모로 사람을 압도하지 않는다.
단지 치명적인 조형미가 있을 뿐이다.
설계도면으로 보면 이렇게 생겼다. 입구로 들어가 직진하면 제일 먼저 메수아르 Mexuar 에 도달한다.
천장 장식 하나 하나가 예사롭지 않다.
기둥과 각도가 애매하다 보니 카메라에 담기 쉽지 않은 '메수아르의 방'. 거의 모든 가이드북에 '메수아르의 방'이라고 나오는데 그냥 메수아르 Mexuar 라고 부르는 것이 맞을 듯 하다. 이 메수아르는 나스르 궁전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전실 antechamber 이며, 왕의 집무실로 사용됐다. 때로 재판이 열리기도 했다고 한다.
메수아르를 거쳐 나오면 다시 하늘이 보이고
작은 파티오가 하나 나온다. 저 문 안의 방 이름을 따서 파티오 델 쿠아르토 도라도 Patio del Cuarto Dorado, 즉 '황금의 방의 파티오'라는 이름이다.
작은 분수도 하나 있다. 파티오라고 불리려면 당연히 분수 하나는 있어야 한다.
이 황금의 방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알함브라 전체에서도 가장 아름답게 느껴졌다.
황금의 방 자체는 그닥 인상적이지 않지만,
지금부터 알함브라는 디테일로 승부한다.
온 벽이 다 장식이다.;;
다른 문화권이라면 그림이나 조각이 있을 법 하지만 우상숭배를 극도로 경계하는 이슬람의 특성상 어디에나 기하학적인 문양 뿐이다. 꽃무늬 비슷한 문양은 가끔 눈에 띄지만 동물 모양은 절대 없다.
황금의 방을 나와 모퉁이를 돌아 입구를 나서면 앗, 많이 보던 광경인데, 라는 정원에 도착한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정말 낯익은 광경이 펼쳐진다.
하지만 아직 오른쪽을 볼 시간이 아니다. 왼쪽의 검게 보이는 입구로 발을 들여 놓으면,
코마레스 탑의 입구에 해당하는 배의 방 Sala de la Barca 이 나온다.
이런 다소 어두운 복도를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면,
알함브라가 규모로 사람 기죽이기에 들어간다. 이것이 '대사의 방 Salón de los Embajadores '.
대사의 방이라고 이름붙인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알함브라의 왕이 외국 대사들을 접견하기 위한 자리다.
대사의 방은 알함브라의 마지막 이슬람 군주였던 보압딜이 1492년 1월, 기독교도의 왕, 페르난도2세와 이사벨라 여왕에게 항복한 장소이기도 하다. 보압딜은 자신의 백성들에게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해를 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전쟁을 포기하고 북아프리카로 망명한다. 물론 상대가 관용이라곤 모르는 기독교도들이었으니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워싱턴 어빙의 '알함브라 이야기'에 따르면 이 기독교도 군주들의 후손인 카를로스 5세는 보압딜의 우유부단한 처사를 비웃으며 "나 같으면 알함브라를 나의 무덤으로 삼았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어빙은 이런 말로 보압딜을 옹호했다.
"권력과 권세를 지닌 사람들이 패배자들에게 영웅주의를 설교하기란 얼마나 쉬운가. 불행한 이들에게 목숨 말고 남은 게 없을 때, 그 목숨 자체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그들이 어찌 이해하겠는가."
이 거대한 방은 이렇게 이슬람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굴욕적인 역사의 현장이다.
전성기 때 왕은 이 창을 등지고 앉아 귄위를 뽐냈다고 한다.
여기 저기 인용되는 대사의 방의 천장.
조금 더 자세히 보면 이렇다. 이 시절 사람들에겐 하늘에서 별이 떨어질 듯한 위압감을 주었을 듯한 천장이다.
다들 천장을 바라보면서 머리를 쥐어 뜯는 것 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어 보인다.
어디에나 있는 종유석 문양.
대사의 방을 나서 다시 배의 방을 지나 이 아치 너머로 고개를 내밀면,
스페인어를 살려 '아라야네스의 정원'이라고도 소개되는 도금양의 정원 Patio de los Arrayanes 이 나타난다.
도금양은 뭘 도금했다는 뜻이 아니고, 식물의 이름이다.
이 샘으로부터 시작되는, 우아하고 격조있는 정원이다.
완벽한데 저 건물 너머로 보이는 흉물스러운 건물이 정돈된 스카이라인에 끼어든다. 바로 위에서 보압딜을 무시했던 카를5세가 이 궁 안에 지은 카를5세궁이다.
대체 왜 저기다 저따위 건물을 지은 것인지 불만이 생긴다.
고개를 돌려 지금까지 지나온 방향을 바라보면,
코마레스 탑이 보인다. 저 탑 안이 하나의 방이고, 그 방이 바로 그 대사의 방이다. 그러니 넓을 수밖에.
흔히 나스르 궁전은 3개 지역으로 이뤄졌다고 말한다. 첫째 메수아르, 둘째 대사의 방(코마레스 탑)과 도금양 정원, 그리고 세째는 사자의 정원과 거기 딸린 세 개의 방이다.
이것이 절정에 오른 기둥의 미학을 보여주는 사자의 정원 Patio de los Leones.
엄청나게 많은 기둥들. 기둥 하나 하나, 벽면 하나 하나가 놀랍도록 정교하고 아름답다.
그 안에 있으면 정말 아름다움에 둔감해 질 정도로 아름답다.
그런데 사자의 정원이라더니 사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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