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회. 워낙 잘 알려진 인물인데다 드라마며 영화에도 한두번 등장한 인물이 아닙니다. 그래서 매우 친숙하게 느껴집니다.
아주 오래 전, 중학교 시절 김동인의 장편 '대수양'을 읽고 상당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기본 상식은 이광수의 '단종애사'에 입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손자의 미래를 걱정하며 김종서 황보인 같은 중신들과 성삼문 박팽년 등 자신이 신뢰하는 집현전 학사들에게 단종을 보필할 것을 당부한 세종의 모습, 당연히 그 당부를 이행하기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람들은 '선인'의 영역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또 당연히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 즉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수양대군이나 그를 도와 피바람을 일으킨 한명회 신숙주 홍윤성 같은 사람들은 악인의 위치에 올 수밖에 없었죠.
하지만 '대수양'('수양대군'이란 제목의 판본도 있습니다)은 이런 시각과는 전혀 다릅니다. 오히려 이 책에는 김종서와 황보인이 역모까지는 아니지만 어린 왕을 볼모삼아 권력을 탐하는 무리들로 그려집니다. 정작 세종의 유지를 이어 왕권을 안정시키고 새 왕조를 탄탄하게 한 것이 바로 수양대군의 공이라는 쪽이죠.
실제로 세종의 눈부신 업적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조선이라는 새로운 나라가 반석 위에 놓인 것은 세조~성종 연간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경국대전을 비롯한 제도의 정비가 완성된 것이 이 무렵이기 때문입니다. 1392년에 건국한 조선이라는 나라가 그 첫 100년에 걸쳐 이룬 것들이 이후 400년을 지탱한 힘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첫 100년을 이끈 사람들 중 '한명회'라는 이름은 단순히 업적만으로도 빼놓기 힘든 인물이더군요.
한명회(1415~1487)
권력에 눈이 먼 모리배인가, 시대의 경륜가인가. 한명회를 어떤 인물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는 16세기 이후 지식인들의 답 없는 숙제였다. 그를 정반대로 그린 이광수의 ‘단종애사’와 김동인의 ‘대수양’이 보여주듯, 한명회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의 역사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기준이었다.
개국 공신의 후예였지만 가난한 집안의 칠삭동이로 태어난 인물. 변변찮은 외모에 과거에 번번이 떨어진 낙방거사가 하루 아침에 천하를 호령하는 권력자로 거듭난 신화는 많은 창작자들을 자극했다.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가 그를 소재로 만들어졌다.
그중 기억할 만한 한명회 연기자로는 1984년 MBC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 ‘설중매’의 정진을 빼놓을 수 없다. 최근엔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의 ‘한가놈’ 조희봉과 영화 ‘관상’의 김의성을 주목할 만 하다. 특히 ‘관상’의 김의성은 실제 출연하는 장면은 두세 신 뿐이면서도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존재감을 과시했다.
한명회에 대한 사적을 검토해 보면 다른 무엇보다 냉철한 판단력이 감탄을 자아낸다. 1453년 음력 10월10일, 뒷날 계유정난이라 불린 김종서 참살의 날 당일 낮까지도 수양대군의 측근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수양은 이미 “김종서 등이 불측한 마음을 먹었으니 내가 베어 나라를 바로잡겠다”고 했으나 휘하 무장들은 “임금(단종)에게 먼저 고하는 것이 좋겠다”며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이때 한명회가 결정적인 한마디를 던진다. “큰길 옆에 집을 지으면 오가는 사람마다 훈수를 두어 3년이 지나도 완성하지 못한다(作舍道旁, 三年不成)고 합니다. 이제 공이 큰 뜻을 세웠으니 오직 실행이 있을 뿐입니다.” 이 말에 수양은 과감하게 “따를 자는 따르고, 갈 자는 가라. 강요하지 않겠다(從者從, 去者去, 吾不汝强)”는 비장한 한마디를 던진 뒤 단신으로 김종서의 집에 달려가 일을 치른다.
(그러고 나서도 곧바로 '혼자 가게 내버려두어선 안된다'고 장사들을 수습해 뒤를 따르는 것도 한명회입니다.)
세조의 내심을 그만큼 잘 읽어내는 사람도 없었다. ‘소문쇄록’에 전하는 일화 하나. 술자리에서 만취한 세조가 신숙주의 팔을 꺾으며 “그대도 내 팔을 꺾으라”고 장난을 쳤다. 역시 취한 신숙주가 대뜸 세조의 팔을 꺾자, 옆에서 보던 세자(뒷날의 예종)의 안색이 변했다. 다들 껄껄 웃으며 술자리를 파했지만, 한명회는 신숙주의 하인에게 “신숙주는 아무리 취해도 집에 가면 일어나 앉아 책을 읽는다. 오늘은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과연 밤에 세조가 내시를 보내 신숙주의 집을 정탐하게 했다. 한명회는 세조가 혹시 신숙주가 맨 정신이 아니었을까 의심하리라는 것을 내다 본 것이다.
(무슨 말인지 모르시는 분을 위한 해설. 그러니까 한명회는 '내시가 궁에 돌아가 "신숙주 대감은 귀가후 불을 켜고 한참 책을 읽다 잠이 들었습니다"라고 보고할 경우, 세조는 신숙주가 자신에게 무례한 행동을 한 것이 술에 취해서 실수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해코지를 할 것'이라고 예견한 것입니다. 세조가 겉으로는 호방하지만 속으로는 매우 의심이 많고 치밀한 성격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한명회이니 이런 예측을 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런 만큼 세조도 자신의 속내를 너무 잘 아는 한명회를 은근히 두려워했다. 1467년, 이시애의 난 때 “한명회와 신숙주가 내통한다”는 소문이 돌자 세조는 즉시 두 사람을 의금부에 잡아들였다. 10여일만에 풀려나긴 했으나, 이들의 평생 관계를 생각하면 역시 권력의 비정함을 느끼게 한다..
‘관상’의 한명회는 김내경(송강호)의 예언 때문에 ‘평생 적을 만들지 않고 살았다’고 했지만 사실은 좀 다르다. 그에게 도전한 신진 세력은 어김없이 철퇴를 맞았다. 귀성군과 남이의 옥사가 대표적인 예다. 김종직 이후 배출된 사림파는 한명회가 죽고 나서야 비로소 조정에서 일정 지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래도 1487년 사망할 때까지 아무도 그의 권위에 도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죽은 뒤의 일까지 예측할 수는 없는 법. 1504년, 연산군은 22년 전 아버지 성종이 폐비 윤씨를 사사하겠다 결정할 때 찬성한 사람들을 색출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당시 조정의 중신 전원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진 셈이다. 살아있던 사람들은 즉시 참수됐고, 이미 죽은 정창손 한명회 등은 관을 뻐개고(剖棺) 시신의 목을 치는(斬屍) 부관참시를 당했다. 중종반정과 함께 복권이 이뤄졌지만, 선조 이후 정권을 장악한 사림은 대의명분을 앞세워 그를 대표적인 간신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오늘날까지 사용되는 행정구역의 이름 면,리(面里)제도를 포함해 조선시대의 문물과 제도 가운데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한명회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이 드물다. 북방을 개척한 무인으로서의 공훈까지 생각하면, 조선 500년을 통틀어 그만한 업적을 가진 인물로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다. 결과가 과정을 덮을 수 있을지 고민할 만 하다.
그는 한강변에 압구정(狎鷗亭)이란 정자를 세우고 “하루 빨리 고된 조정 일을 떠나 낙향의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고 입버릇 처럼 말했지만, 그가 압구정에서 베푸는 연회는 그에게 줄을 대려는 사람들이 들끓는 권력의 잔치였다. 공교롭게도 그 일대가 동네의 이름이 되어 오늘날에도 부귀공명의 상징이 됐다. 참 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끝>
나이가 좀 드신 분들이 기억하고 있는 가장 선명한 한명회의 이미지는 과거 '조선왕조 500년'의 '설중매' 편에 등장한 정진 씨의 모습입니다. 당시 TV에선 사실상 무명이었다고 할 수 있는 정진씨는 이 드라마에서 '체구는 왜소하지만 꾀 많은 한명회'의 모습을 그럴싸하게 그려내면서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진왜란' 편에서는 풍신수길 역으로 다시 등장했죠.
그리고서 기억할만한 한명회는 역시 또한번 '한명회의 틀'을 깬 '이덕화 한명회'. 한명회 역을 하기엔 너무 멀쩡한 외모 때문에 당나귀 귀 모양(혹은 스포크 귀^^)의 특수 분장을 하고 등장했습니다.
역시 최근의 모습 중에는 '뿌리깊은 나무'의 '한가놈'을 빼뜨릴 수 없죠. 끝까지 이름은 나오지 않고 '머리 좋고 임기응변에 능한 한가놈'이었던 조희봉은 마지막회에서야 '한명회'라는 실명을 드러냅니다. 작가진이 이 한명회가 주축이 되어 다시 밀본을 재건하는 내용의 속편을 준비중이라는 이야기가 있었죠.
이번 '관상'의 한명회는 목소리가 포인트라는 점이 특이합니다. 등장은 최소화하면서도 존재감을 강하게 느끼게 하는 목소리가 필요했던 것이죠. 그리고 나서 마침내 얼굴이 공개되는 장면, 이 장면의 긴장감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탁월한 발성 덕분에 '목소리만으로 공포감을 조성하는 한명회' 역할이 제대로 살았던 거죠. 기억나는 영화와 비교하자면 영화 '프롬 헬'에서 마지막 시퀀스, 이안 홀름의 눈동자 색이 바뀌는 장면과 비교할만 합니다.
배우 김의성은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두 주인공이 들은 건축학개론 수업의 교수님으로 잘 알려진 분입니다. 물론 기억을 되새겨 보시면 홍상수 감독의 출세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주인공이기도 했죠.
최근에는 연극 '우먼 인 블랙'의 주인공으로도 장기 출연중. 근래 몇년 사이 갑작스레 주목이 늘었지만 80년대부터 활동해온 원로 배우(물론 중간에 휴지기가 있었지만)에게 새삼 신 스틸러니 명품조연이니 하는 것도 적절치 않은 얘기라는 생각.
아무튼 1980년대 이후 국사 교과서에서 훈구파와 사림파 중심의 내용이 나오면 '좋은 건 훈구파, 나쁜 건 사림파'로 쓰면 맞다는 우스개도 있었습니다. 사림파의 집권이 결국 지나치게 절의와 명분에 집중하고, 뒷날 당쟁의 기원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그렇기도 합니다만, 그 훈구파의 '좋은 점'들을 마지막으로 계승한 인물이 바로 한명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대의명분과 역사의 정의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정 반대의 답이 나오겠지요.
그래서 한명회라는 인물은 더욱 매력적으로, 그리고 한명회를 연기한 배우들을 더욱 명배우로 이끌어 내는 듯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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