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은 가을의 중심. 가장 풍요로운 달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루 늦었습니다만, 아무튼 10월의 권장 소비 문화 행사를 정리합니다.
가장 효율적인 문화 소비는 '10만원 가이드'와 함께~~
10만원으로 즐기는 10월의 문화생활 가이드
올해가 베르디와 바그너의 탄생 200주년이란 얘기는 이미 여러 번 해서 지겨울거야. 그래서 국내외에서 수많은 공연이 있었는데, 아마도 올해 한국에서 무대에 올려졌던 오페라 중에 지금부터 얘기할 공연만큼 의미 있는 무대는 없을 것 같아.
10월 1일, 3일, 5일 예술의전당에서 올리는 ‘파르지팔(Parsifal)’이야. 바그너의 마지막 오페라인 ‘파르지팔’은 아서왕 휘하 원탁의 기사 중 성배를 발견하는 기사 퍼시벌Perciva의 이야기를 모태로 하고 있어. 퍼시벌의 독일어식 표기가 파르지팔이지. 그리고 이 파르지팔은 이미 바그너의 초기작 ‘로엔그린’에서 백조의 기사 로엔그린의 아버지로 나와.
아무튼 ‘응, 드디어 하는구나’라는 생각으로 페이지를 열었다가 헉 하고 놀랐어. 이 오페라의 주역인 구르네만츠 역으로 연광철 선생이 나온다는 거야.
참고로 바그너 오페라의 주역을 꿈꾸는 가수에게 최고의 무대는 잘 알려진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이야. ‘파르지팔’도 바이로이트에선 거의 매년 공연되지. 그런데 연광철 선생은 거기서 5년 연속으로 구르네만츠 역을 맡았거든. 이건 한마디로 굴지의 바그네리안인 동시에 세계 최고의 베이스 가수로 인정받았단 뜻이야.
여기다 지휘를 맡은 로타 차그로젝(Rotha Zagrosek)도 슈투트가르트 오페라 음악감독을 역임한 바그너 전문 지휘자야. 또 악한 마법사 크링졸 역을 맡은 몇해 전 국내 음악회에서 본 바리톤 양준모도 미래가 촉망되는 성악가지. 한마디로 흥분되는 무대야.
당연히 아쉬운 건 가격인데, 오페라하우스 3층 B석에 5만원 정도는 투자할만한 생각해. 경쟁 상대라면 10월15일 신영옥이 질다 역을 맡는 ‘리골레토’가 있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이미 질다 역으로 재능을 인정받은 신영옥이니 누가 토를 달 수 없는 훌륭한 공연이겠지.
그런데 이 공연은 무대 장치 없이 콘서트 홀에서 약식으로 공연이 진행되는 콘체르탄테(concertante)야. 반면 ‘파르지팔’은 제대로 무대와 의상을 갖추고 하는 정식 공연이지. 비슷한 가격이라면, 이번엔 ‘파르지팔’을 권하고 싶어. 아, 물론 무조건 바그너 보다 베르디가 좋다는 사람은 취향을 따라야겠지.
다음은 전시. 지난 달에 로버트 카파전을 소개했으니 이번 달에는 라이프 사진전이야. TV나 영화의 위력이 요즘같지 않던 시절, 사진 저널리즘의 최고봉이었던 ‘라이프(LIFE)’ 지는 지금까지도 그 방대한 포트폴리오를 통해 잊혀지지 않고 있어.
이번 전시는 ‘people’ ‘moments’ ‘It’s life’라는 3개 섹션을 통해 1936~1972년 사이에 촬영된 140여점의 사진이 전시돼. 특히 관심을 끄는 건 ‘people’ 섹션이야. 윈스턴 처칠-아돌프 히틀러, 무하마드 알리-조 프레이저에서 김구-이승만까지 ‘라이프’의 앵글에 잡힌 20세기 대표 인물들의 모습이 자못 기대돼. 11월25일까지. 1만2천원.
국립극장에선 9월부터 하반기 완창 판소리 공연이 재개됐어. 10월19일, 최승희 명창이 정정렬제 춘향가를 완창해. 지난 3월에 우리 나이로 여든인 성창순 명창의 심청가를 듣고 홀딱 반했는데, 올해 희수(喜壽)인 최승희 명창도 그 못잖은 관록을 보여 주실 거야. 워낙 고령이시니 따님인 모보경 명창을 비롯한 네 제자들이 분창자로 나와. 2만원.
최근 이 모 국회의원 사건과 주사파 논란을 보면서 존 르 카레의 ‘영원한 친구’라는 소설이 생각났어. 유럽에서도 한때 학생운동이 뜨거울 때가 있었지. 하지만 이상주의적 좌파였던 학생들은 나이를 먹어 가며 동서 양대 진영의 현실 정치 세력에 의해 도구가 되어 있는 자신들을 발견해. 그리고 세월이 흘러 소련과 동구가 몰락한 뒤, 이들은 정체성의 혼란을 겪지. 그로부터 꽤 긴 세월이 지난 어느날, ‘현장’이 다시 이들을 찾아와.
이 소설의 결말과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그리 비슷하지는 않아. 단지 세상은 쑥쑥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여전히 젊은 날의 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게 공통점이랄까. 고전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나 ‘러시아 하우스’를 재미있게 읽은 사람이라면 그 뒤로 존 르 카레의 관심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아. 대략 1만2천원 정도.
마지막으로 놓치지 말고 지켜봐야 할 것이 간송미술관의 가을 개관이야. 매년 5월과 10월에만 꼭 보름씩 보물창고를 여는 독특한 진행인데, 그런 만큼 이번 기회를 놓치면 사진으로나 봐야 할 명품들이 나와. 게다가 이 전시는 공짜.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 한 이번에도 10월 중에는 개관을 할 테니 다들 개관 소식을 기다려 봐.
바그너 오페라 ‘파르지팔’ B석 5만원
라이프 사진전 1만2천원
최승희, 정정렬제 춘향가 완창 2만원
존 르 카레, ‘영원한 친구’ 1만2천원
간송미술관 가을 개관 전시 무료
합계 9만4천원
아시는 분들은 이미 너무나 잘 아시겠지만 베이스바리톤 연광철은 한국 음악계의 진정한 국보입니다. 실제로 해외에서 평가하는 한국 성악계의 최대 강점은 베이스에 있습니다.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쓸만한 강속구 투수가 없을 때 '어디 쿠바에서 배 타고 누가 도망 안 나오나' 하듯, 유럽 오페라 관계자들은 '소프라노는 발트해 연안에서, 베이스는 한국에서'라고 이미 생각하고 있습니다. 강병운, 연광철, 전승현(아틸라 전) 등 스타들이 줄줄이 배출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현재 최고의 명성을 가진 스타는 바로 연광철.
일단 몸풀기 영상부터. 도니제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에서 라이문도 역을 맡았습니다. 세계적인 소프라노 나탈리 드세이와의 듀엣.
워낙 바그너 전문 가수로 잘 알려져 있어서 이탈리아 오페라에 출연한 모습은 저도 처음 봤습니다. 아무튼 가볍게 감상.
다음은 독일계 성악의 최고봉이라고 할 수 있는 슈베르트 가곡.
'겨울나그네' 중의 '밤 인사'입니다.
자, 다음은 대망의 '파르지팔'.
'파르지팔'은 바그너의 마지막 오페라입니다.
당연히 표면적인 주인공은 파르지팔 역의 테너지만, 바그너 오페라가 대개 그렇듯 테너의 역할은 사실 별게 없습니다. 전체 등장인물 중 맨 처음 무대에 오르는 기사 구르네만츠가 실질적인 주인공이죠.
그런데 연광철은 현역 최고의 구르네만츠로 이미 정평이 나 있습니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의 '파르지팔'에서 5년 연속 구르네만츠 역을 맡았다면 뭐 더 할 말이 없는 거죠.
2012년 바이로이트에서는 성배수호자인 왕 암포르타스의 부하인 구르네만츠와 그 시종들에게 모두 천사 날개를 달았습니다. 12분30초 쯤 보시면 구르네만츠가 등장합니다.
아무튼 뭐 이 정도로 해 두겠습니다.
(참고로 '파르지팔'의 메인 테마라고 할 수 있는 '성 금요일의 음악'은 아주 오래 전 MBC 뉴스 타이틀 음악으로 쓰인 적이 있습니다. 당시 라이벌이던 TBC 뉴스는 '백조의 호수'에 나오는 팡파레를 타이틀로 썼죠.^^)
신영옥이야 굳이 설명이 필요할까 싶습니다만.
포레의 '월광'입니다. 아름답습니다.
이상하게도 신영옥이 질다 역을 맡은 영상은 유튜브에서 발견할 수가 없군요. 아무튼 맑고 투명한 소리에는 세계 최고 수준의 소프라노입니다.
존 르 카레의 '영원한 친구'는 사실 끝까지 읽고 나면 좀 허탈할 수도 있는 결론입니다.
하지만 1970년대, 80년대의 이념을 21세기에 적용한다는 건 결국 이렇게 끝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인상적인 마무리이기도 합니다.
(위 사진은 '영원한 친구'를 검색하면 제일 먼저 나오는 그룹 폭시 사진. 이 친구들은 요즘 어디가서 뭘 하는지...^^)
끝으로 간송 가을 전시는 13일부터 27일까지 열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간송미술관 정도 되는 소장품을 가진 미술관이 아직 공식 홍페이지도, 전시 안내도, 이번 전시의 주제에 대한 발표도 없다는 건 여러가지로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매번 전시를 할 때면 이런 국보급 문화재들을 가산을 털어 마련한 간송 전형필 선생의 업적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되지만, 그 전시 방식이나 미술관의 운영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리게 됩니다.
무슨 문제가 있는지는 제가 알지 못합니다만, 언젠가는 좀 개선되었으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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