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어사전] 이란 제목의 연재 두 번째입니다. 제목은 거창하지만 어쨌든 '난 TV도 안 보고 영화도 안 보고 돈만 벌지만 그래도 세상 트렌드를 웬만큼 따라잡고 싶다'는 분들을 위한 연재물입니다. (네. 의외로 그런 목적을 갖고 일주일에 한 시간, '개그콘서트'만 보는 분들이 있답니다.)
그리고 웬만큼 TV도 보고 영화도 보는 분들이 아 그렇구나 하고 보실만한 요소도 꽤 있습니다. 어쨌든 글이라는 게 읽어서 쓸모도 있어야 하지만 일단 재미가 있어야 끝까지 읽어 보겠죠.
이번에는 사극에 갑자기 많이 나오기 시작한 이씨 성의 외자 이름에 대한 탐구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바로 제목의 이호, 이순, 이도 같은 이름들이죠. 여기에 하나 더 붙으면 TV를 잘 안 보시는 분들도 아 이게 그거구나 하고 느끼시게 됩니다. 바로 '이산' 이죠. 조선 왕들의 이름입니다.
문화어 사전(2)
이호, 이순 [인명]
이호(李岵)는 각각 드라마 ‘천명:조선판 도망자 이야기’에서 임슬옹의 역할, 이순(李焞)은 ‘장옥정, 사랑에 살다’에서 유아인의 역할 이름이다. 모르면 낯설게 들리지만 사실은 각각 조선 인종과 숙종의 본명이다.
자주 쓰지 않아 잘 모를 뿐이지 왕들도 이름이 있었다. 다들 태조 이성계의 후손이니 성은 당연히 이씨. 개중엔 양녕대군은 이름이 이양녕이고 영창대군은 이영창인줄 아는 분들도 있는데 군(君)이나 대군(大君)은 모두 따로 책봉을 받고 붙이는 호칭이다.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이야 워낙 임금이 되기 전에도 유명인사였으니 친숙하지만, 그 후손 왕들의 본명이 드라마에 나오는 건 새로운 유행이다. 그 전까지는 소설과 영화 ‘영원한 제국’에서 노론 대신들이 “홍재(弘齋)는 폭군이오!”라고 말하는 정도였다. 홍재는 ‘홍재전서’에서도 알 수 있듯 정조의 호(號).
왕의 이름을 쓰는 새 유행은 누가 뭐래도 2007년작 ‘이산(李祘)’에서 시작됐다. 정조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이산’은 생명의 위협을 받던 세손이 성군으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려 호평받았다. 이어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이도(李裪)라는 세종의 실명이 등장했다. 두 드라마에서의 이름 활용은 군왕의 인간적인 면모를 그려내는 데 신선하고 효과적이었다는 게 중론. 하지만 최근의 트렌디 사극에서 나오는 왕의 실명은 그냥 패션을 따른 것일 뿐 별반 목적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아무튼 왜 왕들의 이름은 쉽고 편한 글자가 아니라 평생 가야 한번 볼까 말까 한 드문 글자로 되어 있는 걸까. 이유는 동아시아의 오랜 피휘(避諱) 원칙 때문이다. 피휘란 임금이나 조상의 이름에 포함된 글자를 존중의 뜻에서 아예 쓰지 않는 풍슴을 말한다. 예를 들어 당태종의 이름이 이세민(李世民)이었던 탓에 그 시대에는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에서 ‘세’자를 빼고 관음보살(觀音菩薩)로 고쳐 불렀고 그 습관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물론 관음증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만약 왕의 이름에 흔히 쓰이는 글자가 들어가면 백성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셈이었고, 따라서 왕손들은 모두 거의 쓰이지 않는 글자로 이름을 짓는 것이 관습이 됐다.
혹시 ‘해를 품은 달’의 이훤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 ‘해품달’은 특정 왕을 모델로 하지 않은 순수 창작물이다. 숙종의 여섯째 아들로 연령군 이훤(李昍)이란 분이 있지만 조선시대에 ‘훤’이란 이름을 가진 왕은 없었다(물론 후백제에는 있었다).
이양녕과 이영창은 너무 오버 아니냐고 생각하실 분도 있겠지만 '건축학개론'의 수지가 정릉이 정조의 능이 아니냐고 생각했듯, 꽤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는 내용입니다. 뭐 심지어 지금 방송되는 사극 중에는 인현왕후를 줄여 '인현'이라고 부르기도 하는 걸 보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죠.
피휘는 기휘(忌諱)라고도 합니다. 휘(諱)라는 글자는 '꺼리다'라는 훈이 나오지만 그 자체로 '조상의 이름'이라는 뜻의 명사입니다. 그러니까 기휘나 피휘는 '꺼리고 피한다'는 뜻이 아니라 '이름을 피하다'라는 뜻이죠.
피휘 때문에 빚어진 이상한 표기는 한둘이 아닙니다. 고구려 연개소문은 당나라 역사에는 천개소문이라는 희한한 이름으로 나옵니다. 성인 연(淵)이 당태종의 아버지인 고조 이연의 이름 글자였기 때문에 뜻이 같은 천(泉)으로 바꾼 것이죠.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이 표기를 그대로 이용해 '천개소문'이라고 썼습니다.
그러니까 이연이나 이세민은 황제가 될 줄 모르고 지은 이름이기 때문에 흔한 글자를 이름으로 썼고, 그러다 보니 이렇게 많은 표기를 손대야 하는 민폐를 끼쳤습니다. 그래서 후대의 왕들은 어렵고 난해한 글자를 이름으로 쓴 것이죠. 그것도 외자로.^^
마지막으로 개인적으로 어떤 분이 후백제에 훤짜 들어가는 왕이 누구냐고 물으시던데 누구겠습니까. 견훤이죠.
알랑가몰라 [관용구]
한국어로 ‘네가 알지 모를지 나는 모르지만(Wonder if you know)’라는 뜻. 싸이의 히트곡 ‘젠틀맨’의 후렴구에 등장하며 전 세계인들로부터 ‘대체 저게 무슨 말이냐’는 질문을 받고 있다. 싸이는 한때 ‘강남 스타일’ 후속곡의 제목을 ‘아싸라비아’라고 붙일까 고민한 적이 있었지만 이 말이 아랍계 인구를 자극할 수도 있다는 지적(Ass+Arabia로 해석될 가능성)에 따라 포기했고, ‘알랑가몰라’는 그 대체물이 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에선 영어로 ‘alangamola’라고 썼을 때 ‘gamo=이성간의 결합, la=감탄사’이며, 그리고 가사의 ‘Mother Father Gentleman’은 ‘아빠와 엄마가 모두 젠틀맨인 부부’라는 뜻이기 때문에 ‘젠틀맨’은 전체적으로 동성애를 옹호하는 사탄의 노래라는 허황된 주장이 보이기도 한다. 물론 ‘젠틀맨’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네 명의 노인이 바로 사탄(사탄의 별칭 중에는 old man이란 것도 있다)이며, 수가 넷인 것은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파멸의 네 기사를 뜻한다는 주장도 있다. 일고의 가치가 없는 주장들이지만, 싸이의 퍼포먼스가 이래저래 엄숙주의자들을 불쾌하게 만들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아주 오래 전에 KIA의 새 차 이름이 K-9이라는 데 대해 개와 관련된 다른 단어로 오인될 가능성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다행히도 싸이는 한국인들에게 아무 의미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어떤 문화권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미리 대비할 수 있는 지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알랑가몰라나 묵시록적 해석, 혹은 일루미나티나 프리메이슨을 가져다 붙이는 이상한 해석은 이제 지겨우시죠? 물론 싸이 말고도 많은 스타들이 겪고 있는 일인 만큼, 이런 걸 겪는게 오히려 '제대로 떴다'는 증표가 되기도 합니다.
영혼없는 [형용사]
용례: 그렇게 영혼없는 리액션만 남발하다간 오래 못 간다.
영어의 soulless를 그대로 번역했다고 해도 좋을 말. 단순히 영혼의 유체이탈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즉 ‘건성인’, 방송이나 영화를 전제로 하면 ‘대본에 있는 대로 할 뿐인’ 정도의 의미가 정확하다. 최근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 등을 통해 '영혼 없는 리액선...' 같은 자막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 표현은 2008년 정권교체기의 한 고위 공무원이 막스 베버의 말을 인용, “관료에겐 영혼이 없다”고 말한 이후 여기저기서 쓰이기 시작했다. 이 말은 곧 “공무원은 (자기 주관보다는) 행정부의 국정 철학에 따라 일해야 한다”는 의미였는데, 이를 두고 당시에도 “영혼 없는 공무원은 떠나라”는 등의 비판 여론이 거셌다. 유행에 민감한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곧바로 ‘영혼 없는 진행’ ‘영혼 없는 리액션’이란 말이 등장했다.
이 말이 일반인들에게 널리 확산된 것은 올 연초, 배우 박보영의 매니저가 예능 프로그램 ‘정글의 법칙’의 리얼리티에 대해 비판한 이후로 추정된다. 당시 김대표는 “먹기 싫은 거 억지로 먹이고, 동물들 잡아서 근처에 풀어놓고 리액션의 영혼을 담는다고?”라는 직격탄을 날렸다. 이때부터 일반 직장의 회식 자리에서도 ‘리액션의 영혼 유무’가 이슈화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살다 보니 영혼없는 리액션이라도 하는 편이 안 하는 편보단 사회생활에서 유리합니다. 물론 최고의 기술은 어떤 리액션도 영혼이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기술이겠지만 말입니다. 이런 기술은 태생적으로 남자보다는 여자가 타고 나기 마련인데, 직장마다 한두명씩 '리액션의 여왕'들이 계십니다.
아무튼 최대한 리액션을 할 때에는 진심을 담아서. 군대에서 하듯 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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