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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사망 제보를 받았을 때, 그리고 '장자연'이라는 이름 석 자를 들었을 때 불현듯 미안함을 느꼈습니다. 별다른 이유는 아닙니다.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 한 사람이 아닌 세 사람, 즉 KBS 2TV '꽃보다 남자'에 나오는 '진선미 삼총사'의 얼굴이 함께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시청자들이 비슷한 입장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직업이 직업인지라 더욱 면목이 없습니다. 제 기억 속에는 '배우 장자연' 보다는 '진저, 써니, 미란다 - 그 셋 중의 하나'라는 이미지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망자가 생전에 가장 바랐던 것은 '써니 장자연', 혹은 '배우 장자연'을 기억해 주는 사람들의 존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 때문에 더욱 송구스럽습니다.
사람들은 "'꽃보다 남자'에서 F4 따라다니는 세 여자애들 가운데 하나"로 고인을 기억합니다. 이 세 사람에 대한 마지막 기억은 당연히 지난주 끝난 백상예술대상입니다. 사실 이 세 분을 모실 계획은 없었습니다. 단지 행사 직전, F4가 모두 행사장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고 이 진선미 트리오의 한 측근이 "삼총사도 이 자리에 서고 싶어하는데 가도 되겠느냐"고 문의해 왔습니다.
저희로서는 당연히 행사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죠. 단 F4가 그랬듯, 이 셋도 함께 모여 들어와 주기를 바랬습니다. 당연히 셋이 함께 있는 것이 더 화제도 되고, 임팩트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시점에서 진선미 트리오는 이미 '꽃보다 남자'에서는 공식적으로 물러난 상태였습니다. 본래 이들의 역할은 12부까지에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마지막회 쯤에는 우정출연을 하게 될 수도 있었겠지만 이제 그런 모습은 볼 수 없게 됐고, 저 백상예술대상 레드 카펫에 선 모습이 이들의 마지막 함께 한 모습이 될 전망입니다. 이날 행사장에선 참 밝기만 한 모습이었는데...
고인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고인의 소속사사 사실상 매니지먼트 관련 업무를 정리하면서 '매니저 없는 연예인'이 됐다는 건 대략 알고 있었지만, 10년 전 부모를 모두 여의고 언니와 살고 있다는 것 역시 이번 사고가 난 뒤에 알았습니다.
신화고 미녀삼총사는 모두 그리 어리지 않습니다. 그중에서도 장자연이 1982년으로 27세, 국지연과 민영원은 1984년생이어서 25세입니다. 주연급들의 나이를 살펴보면 꽃남 F4중 가장 나이가 많은 김준과 구혜선이 25세, 가장 어린 김범은 1989년생으로 만 20세입니다.
F4나 구혜선이야 주연급이니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25-27세의 나이로 여고생 역할을 한다는 건 그리 바람직한 경우는 아닙니다. 그만큼 20대 역할로 한창 활동해야 할 나이에 아직 연기자로서의 기반을 잡지 못했다는 얘기니까 말입니다. 연기자에게는 그보다 더 아픈 일이 없겠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수많은 스타 지망생들 가운데서는 이 '미녀삼총사'의 일원이 되는 것만으로도 만세를 부를 사람들이 수백 수천명 있을 겁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연예인들의 밝은 면만을 봅니다. 연예인이 되면 누구나 스타크래프트의 개조 밴을 타고, 돈을 물쓰듯 쓸 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정작 연예인이 되려고 준비하거나 해 본 사람들은 드라마에 단역 한번 서는 데까지도 얼마나 많은 운과 노력이 필요한지 알고 있을 겁니다. 사람들이 이름을 기억하는, '진짜 연예인'이 되기가 얼마나 힘든지 말입니다.
물론 장자연의 죽음을 통해 세상은 다시 한번 무명 연예인의 비애를 거론할 것이고, 한 젊은이의 못다 이룬 꿈에 눈물을 흘릴 겁니다(물론 오래 가진 않겠지만 말입니다). 슬픈 일입니다. 같은 미녀삼총사 멤버인 국지연의 말에 따르면 장자연은 드라마가 끝난 뒤에도 연기학원을 다녔고, 소속사와 장래 문제로 고민은 많았지만 무슨 일에 대해서도 '잘 되겠지'라고 말하는 낙천적인 사람으로 비쳤다고 합니다.
더구나 '꽃보다 남자'의 이민정과 함께 출연한 영화 '펜트하우스 코끼리'도 개봉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그런 그가 왜 이런 죽음을 맞았는지 참 의아하기만 합니다.
현장에선 누구나 아는 얘깁니다만, 제가 초년병일 때 한 노장 연기자가 물었습니다. "송기자, 배우가 뭐 하는 직업인지 아나?" 느닷없는 우문에 우물쭈물하다 "연기하는 직업이죠"라는 평이한 답을 내놨습니다. 당연히 그건 답이 아니었죠.
그의 답은 "기다리는 직업"이었습니다. "연기자가 20년을 하건, 30년을 하건 실제로 연기하는 시간은 얼마 안 돼. 나머지는 전부 기다리는 시간이야. 좋은 대본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고, 맞는 배역이 나한테 올때까지 기다리고, 연기 하러 가서는 내 차례까지 기다리고, 기다리는 시간이 몇 배나 더 많아."
이 말의 속뜻은 '그러니 기다리는 시간에 넋 놓고 기다리지 말고, 잘 준비해 두고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루 아침에 스타가 될 거라고 기대하지 말고 여유를 가지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죠. 배우가 아니라도 이 말은 모든 젊은이들에게 유용한 얘기일 겁니다. 하지만 이런 지혜는 정작 한껏 나이가 들어서야 얻게 되는게 보통입니다. 그러니 젊은이들의 갑작스런 죽음이 더욱 아쉬울수밖에요.
한창 나이의 젊은이, 그것도 사람들이 선망하는 연예인이란 직업에서 이제 막 빛을 발할 무렵의 연예인이 이런 죽음을 맞았다는 건 경악과 함께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게 합니다. 아무쪼록 좋은 데로 가시기를 바랍니다.
아울러 고인도 고인이지만 힘겨움을 겪고 있는 수많은 연기자 지망생들, 연예인이 아니라도 한창 장래를 준비할 나이의 젊은이들은 부디 다시 한번 마음을 독하게 먹어 제발 이런 뉴스를 다시 안 보고 안 듣게 해 줬으면 하는 마음 뿐입니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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