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 어찌 하다 보니 모리스 자르(Maurice Jarre) 선생의 부음을 모르고 지나칠 뻔 했군요. 1924년 9월13일 생이니 향년 85세. 30일 미국 LA의 자택에서 영면에 드셨습니다.
솔직히 이분의 전성기가 1980년대 이전이다 보니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 관객들은 모리스 자르라는 이름이 그리 익숙하지 않을 겁니다.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엔니오 모리코네가 아직도 현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데 비하면 모리스 자르의 시대는 너무 일찍 끝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어쩌면 모리스 자르의 시대는 스케일 큰 '에픽' 무비의 시대와 함께 사라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거장 데이비드 린으로 대표되는, 시대착오적으로 큰 영화들이 사라지면서 더 이상 작곡에의 의욕을 잃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까요.
데이비드 린을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는 아무래도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입니다.
사막과 인간, 역사와 인간, 엄청난 규모와 스토리를 엄청난 배우들과 함께 엄청난 화면으로 잡아 넣은 이 영화(제가 계속 '엄청나다'는 말을 남발하고 있는건 그보다 적절한 단어를 찾기 힘들어서입니다. 21세기의 영화 기술로 이보다 방대하게 보이는 영화를 만들어 낼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이 영화만큼 오만하고 방대한 구상을 영상에 담을 사람들은 다시 나타나지 않을 겁니다)에서 모리스 자르의 웅장한 음악은 관객들 KO시키는데 역시 큰 몫을 합니다.
1992년, 데이비드 린 감독에 대한 헌정 공연에서 직접 지휘봉을 잡은 자르의 모습입니다.
사실 '아라비아의 로렌스'도 대단했지만, 같은 해의 다른 영화에서도 자르는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지상최대의 작전 The Longest Day'. 역시 이 영화보다 더 규모가 커 보이는 영화가 나올 수도 있겠지만, 실제로 이 영화보다 더 큰 규모의 대작은 앞으로도 다시 볼 수 없을 겁니다. 그 영화의 음악 역시 자르의 작품입니다.
1980년대. 자르는 '인도로 가는 길'로 또 한번 '아라비아의 로렌스'와 '닥터 지바고'에 이은 세번째 아카데미 음악상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나 이 음악은 그리 대단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공로상의 성격이랄까요.
오히려 1980년대의 자르 옹은 아들 장 미셀 자르의 영향인지, 신디사이저를 이용한 소품에서 잔잔한 재미를 봅니다. 자르 옹이 선택한 영화들 중에 상업적으로 크게 히트한 영화들이 많지 않아서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물론 그가 음악을 맡은 영화 가운데 '사랑과 영혼 Ghost'같은 작품도 있긴 합니다. 그가 작곡한 메인 테마보다 'Unchained Melody'가 훨씬 더 기억되고 있어서 그렇지.)
1980년대의 자르의 작품 중 저는 이 곡에 유난히 애정이 갑니다. 해리슨 포드 주연의 영화 '위트니스'에서, 아미쉬 마을에 간 포드가 헛간 짓는 행사를 돕는 장면에서 잔잔하게 울려퍼지던 곡이죠. Raising Barn 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영화상으로는 켈리 맥길리스가 예쁘게 보이기 시작하는 장면입니다.
대사는 더빙이지만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건 음악.
또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의 영화'로 기억되고 있는 '죽은 시인의 사회 Dead Poets Society' 역시 자르 선생의 입김을 받았습니다. 음악으로는 크게 기억나지 않을 작품이긴 합니다만, 많은 분들의 기억 속에 아직도 생생할 이 마지막 장면에 잔잔하게 깔리는 곡이 바로 자르 선생의 곡이죠.
'하우스 M.D'의 윌슨 선생의 앳된 모습은 보너스.
아들 장 미셀 자르도 1980년대에는 반젤리스와 함께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전자음악 아티스트였는데 요즘은 영 조용하군요. 요즘은 어디서 이런 음악이 나오면 촌스럽다고 질색을 할 사람들 천지지만, 한때는 이 음악이야말로 첨단 유행의 상징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교훈: 어느 시대든 최첨단으로 여겨지는 것일수록 빨리 퇴조합니다.
아무튼 뭐니뭐니해도 마지막 곡은 '닥터 지바고'.
'라라의 테마'입니다. 역시 데이비드 린 헌정 공연때의 실황.
이 곡을 빼놓으면 자르 선생에 대한 결례가 되겠죠. 그저 고인의 명복을 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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