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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프로 아가씨 출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마자 인터넷은 들끓었습니다. 꽤 인기있다는 연예 블로거들도 비판의 목소리를 쏟아내더군요. 한마디 하고도 싶었지만 방송을 볼 때까지 참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는 '텐프로 아가씨'가 출연한다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게 없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질문입니다. 대체 '텐프로 종사자'가 방송에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비판하는 것은 정당한 일입니까? 그 방송이 그 '텐프로 종사자'를 어떤 시각으로 어떻게 다루는지 전혀 보지 않은 상태에서 욕부터 하는 것이 온당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15일, 이 프로가 방송됐습니다.
23세의 김시은(가명). 현재 대학생이고 텐프로 룸살롱에 나가고 있습니다. 텐프로 룸살롱이라는 세계는 사실 이 세상에 있는 90%의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세계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소위 최고급 룸살롱이라는 '텐프로'에 나가거나, 변두리 대폿집에 나가거나, 술집여자이기는 마찬가집니다. 웃음과 교태, 때로는 몸을 파는 가격에 차이가 있을 뿐 그 본질은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텐프로'에 가는 손님이나 업소 종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손님들은 손님들대로 그런 비싼 술값을 감수하고 그런 업소에 갈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사회에서 최상위에 속하는 엘리트의 상징이라고 생각하는게 보통입니다. 마찬가지로, 종사자들 - 즉 '텐프로 아가씨' 들 역시 자신들이 최상위의 엘리트들만을 상대하는, 최고 수준의 '서비스업 종사자'라는 식으로 생각하곤 합니다.
더욱 웃기는 것은 그런 업소에 가는 손님들 - 거액의 술값을 지불하는 그 사람들 - 가운데는 이런 아가씨들과의 성적인 관계를 '사귄다'고 포장한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점입니다. 방송에서도 이런 내용이 나왔지만, 돈과 명품 선물, 심지어 살 집까지 제공해주며 갖는 성관계를 '사귄다'고 지칭하는 것은 일반인들은 참 받아들이기 힘든 얘깁니다. 이처럼 이 세계의 사람들과 바깥 세계의 일반 사람들 사이에는 만만찮은 인식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날 방송에 나온 김시은씨는 그런 기만적인 세계가 존재한다는 걸 시청자들에게 충분히 보여줬습니다.
'황금나침반'의 패널들은 나름대로 충실하게 자기 역할을 이행했습니다. 김시은씨는
"월 1000만원 정도 벌어서 700만원 정도 쓴다"
"가게에서 만난 남자친구와 만나고 있다. 평균잡아 월 400만원 정도를 용돈으로 받고 있다. 그래도 나는 '오빠'에게 내가 300만원 정도를 쓰기 때문에 돈을 받는 것이 그를 만나는 이유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텐프로 아가씨들? 그 사람들은 스폰서를 만난다"
"집에서 받는 용돈은 고작 70만원 정도 뿐이다. 그걸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집세는 누가 내 주나? 공주만 택시를 타고 다니는 건 아니다"
는 식의 이야기를 태연하게 해서 패널들을 경악하게 했습니다. 아마 절대 다수 시청자들도 분개했을 겁니다.
시청자들이 느꼈을 심정을 가장 잘 대변한 사람은 김어준씨였습니다. 김시은씨의 논리를 가장 잘 파헤친 사람은 단연 김어준씨였죠. 물론 방향을 잘못 잡은 순간도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패널1: 혹시 그 일을 하면서 보람같은걸 느낀 적 있나
김시은: 뭐 힘든 일이 있는 사람을 위로해줬다든가 할때...
김어준: 그렇다고 그런 일을 하러 업소에 나가는 건 아니지 않은가.
김시은: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그것도 이유 중 하나로...
김어준: 생각해보라. 돈을 안 줘도 가게에 나가서 술마시는 손님들을 상대하겠나?
김시은: 오빠(김어준을 지칭)는 돈 안 줘도 이 프로에 나오시겠어요?
네. 이런 부분은 좀 논리의 부족이 눈에 띄었습니다. 정신과 의사도 돈을 안 받고 환자들의 고민을 들어 주지는 않죠. 위 대화에서도 보듯 김시은씨는 만만찮은 '말빨'을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이 화법 자체가 비판의 대상이 될만 했습니다. 논지를 슬쩍 슬쩍 비껴가는 교묘한 화법이었죠. 김어준씨는 "핵심적인 비판은 슬쩍 흘려보내는 화법이다. 말하는 태도를 보니 술집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고 정곡을 찔렀습니다. 김시은씨도 "그 말이 가장 기분이 나빴다"고 하더군요.
사실 이날 대화의 핵심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스스로 술집에 나가야 하는 이유를 나름대로의 논리를 들어 합리화하고 있지만 정작 "술집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나쁘다는 것. 이것이 그녀의 모순을 요약해서 보여준 대목이었죠.
아무튼 '황금나침반' 첫회의 룸살롱 아가씨 출연은 제가 보기엔 할만 한 방송이었습니다. 일반 사람들은 '대체 정신이 어떻게 박혔길래 멀쩡한 여대생이 룸싸롱에 나가냐"고 혀를 끌끌 차지만, 실제로 그 사람들의 '정신이 어떻게 박혔는지'를 알 기회가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얼마나 황당무계한 논리가 있는지 들어 보는 것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적절한 비판과 함께라면 말입니다.
게다가 당사자의 나이가 23세. 누구라도 실수할 수 있는 나이입니다. '황금나침반' 첫회는 이 사회 안에 존재하는 '텐프로'라는 기형적인 삶의 방식에 대한 비판과, 이상한 세계에 발을 들여 놓고 그것이 나쁘다고 생각지 않는 23세의 한 개인에 대한 조언이라는 두 개의 차원 사이에서 비교적 적절한 균형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김제동이라는 MC가 자기 몫을 다 했다는 얘기도 됩니다. 단지 시간이 너무 짧았던 탓에 그런 조언과 비판이 명백하게 구분되지 않았다는 문제가 있었죠.
그리고 김어준씨와 다른 패널들 사이의 기량 차이가 너무 심했습니다. 다섯 패널 가운데 자기 역할을 다 한 사람은 김어준 김현숙 두 사람 뿐으로 보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별 존재감이 없었고, 특히 요즘 유난히 포장되고 있는 이외수씨는 대체 왜 앉아 있는지 모를 정도였습니다. "젊어서 아내가 술집에 나간다면 말렸을 거다. 지금 아내가 술집에 나간다면 대 환영이다"라는 식의 얘기를 유머라고 하고 있는 이외수씨의 모습을 보니 한숨이 나오더군요.
결론적으로, '황금나침반'의 텐프로 아가씨 출연은 방송이 나가기도 전에 막연히 비판받을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이 방송은 '텐프로 아가씨'를 돈 잘 버는 신세대 직장인으로 묘사하지도 않았고, 그저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비판의 초점을 놓쳐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후반부에 방송된 '바람둥이 남자' 쪽에 비판의 여지가 훨씬 많더군요. 별로 관심 갈 만한 얘기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p.s. 그나자나 케이블TV에서 방송중인 '화성인 바이러스' 팀이 참 박탈감을 느끼겠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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