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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질문 중 가장 흥미도(?)가 떨어질 법한 안성기와의 관계. "배우 박중훈에게 안성기는 어떤 의미냐"는 질문에 박중훈은 "아버지와도 같다. 안성기라는 배우는 속도는 느리지만 크고 튼튼한 트럭이다. 반면 나는 시속 200km를 낼 수 있는 스포츠카다. 가끔은 추월하지 않고 그 트럭의 뒤를 쫓는게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그 뒤를 쫓아 달렸기에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한국 영화계, 혹은 연예계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이건 단순히 이 말 이상의 의미가 담긴 얘기가 됐습니다.
대한민국 가요계에 조용필이 있다면 영화계에는 안성기가 있습니다. 이 경동중학교 동창생인 두 사람은 스타일은 전혀 다르지만 양쪽 분야에서 수많은 후배들의 추앙과 존경을 받고, 독보적인 '대선배'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조용필에게 김종서와 신승훈이 있다면 안성기에게는 박중훈이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도 차이는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전통적으로 가수 쪽의 선후배 의식이 훨씬 강합니다. 아이들 그룹의 범람도 이런 전통적인 선후배간의 관계를 흔들지는 못했습니다. 조용필에 대한 존경은 80년대를 휩쓴, 카리스마 넘치는 제왕에 대한 자연스러운 추종이기도 하지만 전통적으로 강한 위계질서의 연장선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배우 쪽에서는 안성기라는 인물이 구심점으로 자리를 잡기 전까지 한동안 이런 전통적인 관계들이 실종됐었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증언입니다. 그리고 그런 관계들을 다시 정립한 것이 바로 박중훈이라는 것은 이미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런 관계를 정립하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한때 한국 영화계 최대의 파워 서클이었던 골프 모임 싱글벙글이었습니다. 이름은 살짝 촌스럽지만^ 회장 안성기, 부회장 한석규 박중훈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한국 영화계의 거의 모든 주연급 남자 배우들이 회원이었던 모임이죠. 이 모임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안성기-박중훈을 축으로 하는 한국 남자 톱스타의 대열에 합류한다는 의미였으니 말입니다.
그 후배들인 남자배우들은 가끔 "중훈이형의 부름을 받았을 때"를 흥분된 목소리로 상기하곤 합니다. 사실 영화계는 제작자건 스태프건 모든 소속된 사람들을 하나의 거대한 서클로 취급하는 몸짓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안성기 선배님'이라고 불리는 안성기의 카리스마를 완성시킨 데 박중훈이 세운 공헌은 수많은 다른 후배들에 의해 재생산되고, 그것이 영화계의 한 시스템을 완성하는 역할을 해 온 것 역시 분명한 사실입니다.
얼마 전 한 술자리에서 어느 톱스타 남자 배우가 이제 막 스타로 발돋움하려는 남자 배우에게 열심히 이런 체제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톱스타(이름을 그냥 쓰기는 그렇고, 얼마 전 왕 연기로 호평을 받은 J씨라고 해 두겠습니다)는 후배에게, 자신이 처음 '안성기 선배님'과 '중훈이 형'을 선배로 모시게 된 계기를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내용입니다.
"나도 처음에는 다 잘난 사람들끼리 무슨 선배고 후배고, 위 아래 질서를 이렇게 따지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고. 영화계에 들어온 이상, 그렇게 형들이 위에 계시고 그 어디쯤에 내 위치가 있다는 걸 알게 되니까 그게 그만큼 든든하고 자랑스러울 수가 없어. 너도 곧 알게 될거다. 내가 자리를 만들테니까 그때 다시 한잔 하자."
술자리라서 얘기가 좀 장황해진 탓도 있겠지만, 그 후배는 아직 이런 이야기에 그리 귀를 기울이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도 머잖아 그 대열에 합류해 있을 거란 점은 그리 의심스럽지 않더군요.
아무튼 박중훈은 '안성기 선배님'을 영화계 전체가 '선배님'이라고 부르게 하는 데 지대한 역할을 했지만 누구도 그를 안성기의 그림자에 묻힌 인물이라고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런 질서의 정립을 통해 그 자신 또한 존경받는 선배로 자리하게 된 것이죠. '박중훈 쇼'에 그 많은 톱스타들이 선뜻 출연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언젠가 "연예계에서 분야에 관계 없이 대통령을 뽑는다면 가장 당선 확률이 높은 사람은 박중훈일 것"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무릎팍 도사'에서 보여준 모습은 이 주장이 옳다는 데 꽤 무게를 실어 준 듯 합니다. 그리고 이런 폭넓은 인망이야말로 그가 '시속 40km로 달리는 트럭 안성기'의 뒤를 묵묵히 지킨 대가가 아닐까 합니다. 만약 그가 무리하게 앞서가려 했다면 결코 얻지 못했을 것들 말입니다. 이런 부분이야말로 박중훈의 현명함을 돋보이게 하는 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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