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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아트센터의 2009년판 '브로드웨이 42번가'를 보고 왔습니다.

어떤 장르든 '입문용 작품'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한국음식이라는 분야를 대상으로 한다면, 처음부터 삭힌 홍어나 청국장을 먹여서 한국음식에 입문을 시키려 한다면 거부감을 느끼고 달아날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으로 이 '브로드웨이 42번가'는 뮤지컬, 특히 대중용 뮤지컬의 입문용 작품으로 가장 적절한 작품이 아닐까 하고 생각합니다. 춤과 노래, 스토리의 세 박자가 - 오늘날의 시선에서 볼 때는 유치할 정도로 지나치게 단순하고 명쾌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 잘 갖춰진 작품입니다. 물론 어떤 작품부터 시작해도 지금 뮤지컬을 즐기고 있다면 좋은 일이지만, 이런 작품부터 시작해서 내공이 쌓여나간다면 이상적일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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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이번으로 모두 네번째 보게 됐습니다. 1996년 국내 초연 때 처음 봤고 브로드웨이서는 2001년 리바이벌 공연 때 본 적이 있습니다. 뮤지컬의 고풍스러운 느낌과는 달리 브로드웨이 초연도 1980년, 생각보다 훨씬 늦습니다.

그런데도 옛날 작품 냄새가 가득한 이유는 이 뮤지컬이 1933년 제작된 동명의 영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자주 오해가 일어나는데, 이 원작 영화는 '뮤지컬 제작 현장을 무대로 하고 있을 뿐' 뮤지컬 영화가 아닙니다. 뮤지컬인 줄 알고 DVD를 샀다가 이게 뭥미 했던 사람이 여기도 하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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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번가'의 스토리 라인은 앞에서도 말했듯 지독하게 단순합니다. 브로드웨이 최고의 연출자인 줄리언 마쉬는 새로운 뮤지컬 '프리티 레이디'에 출연할 배우들을 고르기 위해 오디션을 실시합니다. 연예계 진출을 꿈꾸는 시골 처녀 페기 소여(빌리 조엘의 노래로 유명한 알렌타운 출신입니다)는 이 오디션에 늦어 기회를 얻지 못하지만, 어찌 어찌 하다가 막차로 코러스에 합류합니다.

마쉬가 이 뮤지컬의 주인공으로 점찍은 도로시는 무식하고 촌스러운 장난감 공장 사장 애브너를 꼬드겨 '프리티 레이디' 제작에 거액을 투자하게 하지만 정작 도로시에게는 숨겨운 애인 팻이 있습니다. 마쉬는 팻의 존재가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팻을 제거하려고 손을 쓰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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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이 작품을 처음 대하는 사람도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결말이 펼쳐집니다. 즉 이 이야기는 '순진한 시골 처녀가 하루 아침에 브로드웨이의 빅 스타가 되는 이야기'인 것이죠.

1980년 초연된 작품은 3천회 이상 공연되는 성공을 거뒀고, 2001년의 리바이벌 공연도 1천회 이상 무대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이번 LG아트센터 공연은 굳이 1980년의 프로덕션을 따른다고 되어 있더군요.

'1980년 버전이 스토리의 완결성에서 앞선다' 어쩌고 하는 설명이 있긴 하지만 이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2001년 버전과 1980년 버전은 몇가지 무대 장치를 빼놓고는 똑같기 때문입니다.

2001년 버전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이 계단 신입니다. 출연자 거의 전원이 조명이 밝혀진 화려한 계단에 서서 금빛 반짝이 의상을 차려 입고(이 대목에선 영화 '코러스 라인'의 영향이 느껴집니다) 화려한 탭댄스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장면이죠. 이 장면을 위해 수십명이 무대 뒤에서 계단을 달려내려오는 장면은 그 자체로 대단한 볼거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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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번 LG아트센터 공연은 엄밀히 말하면 1980년과 2001년의 중간입니다. 화려한 반짝이 의상과 탭댄스 퍼포먼스는 그대로 있지만 계단은 없어졌습니다. 무슨 의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계단을 만드는 비용의 문제일지... 그러고 보면 2001년 버전에 있는 중간의 코러스 숙소 신(서로의 방에서 전화로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없어졌습니다.^

아무튼 이 작품이 주는 고전적인 스타일의 향수와 순진한 유머감각은 오늘날의 관객들에게도 충분히 통하는 듯 합니다. 공연장 분위기는 그야말로 열광 그 자체였습니다. 사실 '지킬 앤 하이드'나 '돈 주앙' 같은 심각한 분위기의 뮤지컬들이 나오는 시대에 이렇게 선의와 순박함으로 가득 한 작품이 생명력을 얻고 있다는 것 역시 이 작품의 위대성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 작품의 주제가이자 브로드웨이의 주제가가 되어 버린 '브로드웨이의 자장가'입니다.

제가 본 공연은 마쉬(김법래), 페기(임혜영), 도로시(박해미)의 캐스트였습니다. 김법래의 마쉬는 매우 훌륭했고, 아마도 박상원의 마쉬보다 카리스마의 측면에선 좀 더 나은 캐스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장 아쉬웠던 것은 임혜영의 페기입니다. 춤과 외모, 전반부의 목소리에서는 흠잡을 데가 없었지만 이 뮤지컬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인 끝부분, '페기의 성숙'을 표현하는 장면을 볼 수 없었다는 것은 매우 놀랍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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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쉬는 공연 직전 페기에게 "무대에 올라갈때는 신출내기지만 내려올 때에는 스타가 되어 있어야 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마쉬에게 파티에 함께 가자고 말하는 페기는 전과는 전혀 다른, 요부의 느낌을 주어 마쉬를 놀라게 합니다.

그런데 임혜영의 페기는 이 장면에서 무대에 올라가기 전과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목소리의 한계 때문인지, 새로운 인물 해석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극 전편에서 이 장면이 갖는 중요성을 생각한다면, 임혜영의 페기로 이 공연을 본 사람은 포인트 하나를 놓치게 될 지도 모릅니다. 물론 옥주현의 페기를 보지 못했으므로 둘 중 누가 더 나은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LG아트센터 공연의 강점은 잘 짜여진 안무와, 원작의 의도를 전혀 훼손하지 않는 화려한 안무입니다. 특히나 '대체 뮤지컬이라는 걸 왜 보러 가는 거야?'라고 생각하던 사람들에게 '이래서 보는 거구나'라는 생각을 심어주기에는 더 이상 적절한 작품이 없을 정도입니다. 평점은 '놓치면 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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